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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시편 32:1-11)

내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시편 32:1-11)

노승수 목사
1. 서론
시편 32 편의 표제는 다윗의 마스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이란 교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장르는 교훈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참회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몇번의 시편 설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시편을 이해할 때는 1-2절이 중요합니다. 특히 시편 32편은 "복있어라"라는 말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시편 1 편 이렇게 시작합니다.(그외 42, 112, 128, 129편도 이렇게 시작을 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역시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시편은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한 이 구절은 로마서의 인용으로도 유명합니다. 로마서 4:7-8절에 인용이 되었는데,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과 행위에 의한 것임을 논증하는 내용으로 바울이 인용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결국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의 복음은 구원에 대한 복입니다. 그 구원을 시편 32 편에서는 죄 사함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 사함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2. 본론
1. 감사의 고백(1-2절)
1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1-2절 32편 전체의 표제에 해당합니다. 3가지의 죄악에 대한 단어와 3가지의 용서에 대한 단어로 성경의 복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허물(페샤)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죄를 말합니다. 로마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롬 1:28)것입니다. 사실 모든 신자는 이런 죄에 빠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스스로 돌이키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의해서 돌이키게 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허물을 사함을 얻는다]라고 말합니다. 사함(나사)이란 단어는 "짊어진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죄를 짐으로 보는 구상어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요한은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향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말합니다. 반역의 죄에 대해서 그 죄짐을 하나님이 짊어지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죄(하타아)는 바른 길에서 이탈하는 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서 벗어나 있는 죄를 의미합니다. 허물이 고의적인 죄에 대한 언급이라면, 이 두 번째 죄는 우리의 죄의 경향성을 설명해줍니다. 천지창조의 기사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의도대로 되었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그 의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경향성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가리우신다:카사]고 말합니다. 말 그대로 덮는다는 뜻입니다. 가린다는 단어는 수동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흔히 신학적 수동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까지라도 하나님은 덮으십니다. 
세 번째 정죄(아온)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생각을 의미합니다. 모든 반역과 모든 죄된 경향성의 출발점은 죄된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로마서 8:6에 이르는데로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육신에 속한 생각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당치 않는"(하샤브 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해서 눈을 감아준다는 뜻입니다. 
이 세가지 죄에 대한 표현은 보다 더 본질적인 죄의 근원으로 나아갑니다. 일종의 점증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우리가 스스로 죄를 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런 씻을 수 없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결과 우리 죄를 사함을 입게 되고 이런 자들이 복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성도인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무엇입니까? 바로 마음에 간사함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복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런 놀라우신 은혜를 대하는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과거 회상: 은혜에 이르는 길(3-5절)
3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다윗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회상합니다. 그 때 자신이 실제로 죄 문제에 부딪혀서 어떻게 하나님게 용서를 받게 되었는지 자신의 신앙의 체험을 나누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부분은 하나님이 그의 택하신 자녀들의 생애에 어떻게 개입해 오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저항 할 수 없는 은혜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죄악과 우리 영혼의 상태 그리고 육신의 질병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 심령의 죄는 영혼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 심령의 죄는 육신의 질병을 가져옵니다. 내 뼈가 쇠하고 내 진액이 마르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고통 받는 것은 우리가 죄를 토설치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회개가 없이 우리 영혼이 평화를 누릴 수 없고, 회개가 없이 우리 육신이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부인이 사랑하는 아들과 저녁 약속을 했습니다. 아들과 저녁 약속에 나가기 전에 전에 건강검진 받을 결과를 설명을 들으려 병원에 갔습니다. 그녀는 암이었습니다. 그녀가 암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의 저녁 스케줄은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절망스러웠습니다. 마음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그녀의 절망할 것을 몰랐을까요? 그럼 그녀가 절망하기 때문에 그녀가 암이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을까요? 예레미아서를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이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은 계속 그들의 영혼과 육신이 평안할 것이라 말합니다. 이런 평안이 그들을 구원해줍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암이라는 사실을 절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치유를 위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회개란 마음을 찢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부터 돌이키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에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오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스르는 생각들로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영적 사고 방식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이 길은 다윗이 표현한 것처럼 뼈가 쇠하는 일입니다. 그 영혼이 뙈악볕 아래 마름과 같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정직히 인정하는 마음이 회개의 마음입니다. 마음에 간사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간사한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합리화하여 평안함을 외칩니다. 이런 마음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자복하기로 결정합니다. 그가 죄악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간사가 없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발견되면 우리 마음은 변명꺼리를 찾기 위해 분주해집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평화를 얻는 길은 우리 죄악을 자복하는 길입니다. 
3. 하나님 경험에서 교훈으로(6-7절)
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셀라)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 경험으로 이스라엘에게 교훈합니다.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만한 때에 주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본질을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기도할 때, 사실 하나님의 뜻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급급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6절은 "이로 인하여"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앞의 3-5절에 결과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뼈가 쇠잔케 되는 일, 우리 영혼과 육신의 여름 가물의 마름과 같이 되는 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무엇이 변화 되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다윗 자신입니까? 다윗이 처한 환경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내면세계입니까? 당연 다윗 자신이며 다윗의 환경이 아니라 다윗의 내면세계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많은 성도들이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소원만을 아뢰이기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를 권면하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께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회를 타라고 말합니까? 주를 만날 기회를 타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자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대면함이 있습니다. 이 대면함의 결과 하나님이 계획을 변경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당연 그 대면함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어떤 환란도 그를 범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은 홍수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잘 읽어보십시오. 홍수가 범람한다고 합니까? 안한다고 합니까? "할지라도"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평화는 홍수가 없는 고요한 강가가 아니라 범람하는 홍수 속에서 우리를 안전히 지키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삶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가지 환란들을 인해서 우리가 더욱 주님을 닮고 그 결과 우리가 안전지대에 이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은신처이십니다. 환난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며 구원의 노래로 우리를 에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누가 이런 은혜를 누립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 곧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면전 앞에서 정직한 자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4. 계시의 임함(8-10절)
8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8절은 하나님 계시의 임함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입니다. 갑자기 인칭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8절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의 내용입니다. 9-10절은 그 말씀을 받은 다윗이 예언자로서 대언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의 이 기도를 모범을 삼아서 우리도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구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기록된 성경을 갖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다윗에게 임한 계시는 부분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씨를 목격했을 뿐 그리스도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계시사적으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아니 구약 인물 중에 세례 요한 만한 인격이나 지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약의 여러 계시를 했던 선지자들이 보고자 하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해 보았음으로 구약의 여러 믿음의 위인보다 계시적 우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는 말씀은 구약과 신약의 완전한 계시를 가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세례요한 보다 훨씬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온전하고도 완전한 계시인 성경을 받은 성도가 직통계시를 부러워한다니 가당키나 합니까? 또 성경도 온전히 모르면서 무슨 다른 직통 계시를 받는다 말입니까? 성경 외 다른 계시를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계시가 부족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자기 마음을 믿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발람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돈을 주어 예언케 했습니다. 그가 처음 받은 계시는 바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오히려 축복하지요. 그러나 불의의 삯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못하는 나귀의 입으로 그를 금하지 않습니까?(벧후 2:15-16) 이런 하나님의 막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직통계시를 좇다가 망합니다.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게 한 고로 칼에 맞아 죽습니다.(계2:14 ; 민 31:8) 성경은 분명한 어조로 이 모든 계시의 마지막이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히 1:1-3)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뜻을 분별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충분하고도 온전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갈길을 보이십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성경 계시를 통해서요. 우리를 주목하셔서 가르치십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성경 계시를 통해서요. 이 시대의 모든 예언은 다 거짓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속지 마십시오. 말세의 징조에 그리스도가 여기 저기 있다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고도 확실한 그리고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이미 계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갈길을 보이십니다. 우리를 주목하여 보시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계시에 근거해서 두 가지 권면을 합니다. 첫째가 말이나 노새처럼 어긋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긋나지 않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마음에 간사가 없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악인의 마음은 이와 같아서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재갈과 굴레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경험했던 뼈가 쇠잔해 지는 일이며, 그 영혼이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이런 일로 자신의 죄를 토설케 된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그러나 악인은 마음은 이런 하나님의 재갈과 굴레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는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권면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신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경건한 기도자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지요. 그 앞에 토설하는 것이며 자복하는 것입니다. 왜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용서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오늘 다윗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두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3. 결론 : 함께 하는 자들을 권함(11절)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누가 의인입니까? 마음이 정직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기뻐하는 까닭, 그들이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로마서의 표현을 빌어 오늘의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Romans 4:4-6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행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은혜 앞에 정직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입니다. 벧엘교회 모든 성도들은 이와 같은 복을 누리시는 하나님의 백성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09. 6. 15. AM 10:00 담임 목사님께 설교 부탁을 받아, 하루 내내 묵상하다. 
PM 6:00 설교 작성을 시작하다. 
PM 7:26 저녁 식사를 위해 일시 중단 하다. 
PM 8:20 다시 설교 작성을 시작하다. 
PM 9:42 1차 원고를 완성하다. 
PM 10:00 2차 원고 수정, 직통 계시와 관련하여 발람에 관한 기사를 예증으로 들다. 
PM 11:51 3차 원고 수정, 존 파이퍼의 자신을 시험해보십시오. 라는 설교에서 영감을 얻다. 
2009. 6. 16. AM 1:06. 4차 원고 수정, 성경에 대한 신앙에 대한 묵상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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