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1-8)
노승수 목사
『[1]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도 바울신학의 전형적 예를 따릅니다. 전반부는 교리나 내러티브로 후반부는 교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통상 다른 서신서들은 전반부에서 교리를 다룬 반면 데살로니가전서는 첫 서신이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긴박했던 상황은 지금 교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이들을 위로하고 어떻게 환란을 이겨낼 것인가에 대한 권면과 믿음의 구체적 표지와 그런 너희를 어떻게 양육했으며 믿음이 헛되이 될 것을 우려해서 디모데를 보내는 일까지를 전반부에서 다루었다면 후반부는 교훈을 다루는 데 이것은 아마도 디모데가 가지고 온 몇가지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형태는 고린도전서에도서도 등장을 하는데 페리....데(
Περὶ δὲ
)라는 구문으로 ...에 관하여 라는 뜻인데 4:9, 13, 5:1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처한 현실적 질문들에 대해서 바울이 답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2장의 본문을 설명하면서 유모처럼 유순하게 대답하고 가르치는 특성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묻고 답하는 형식을 통해서 바울은 데산로니가 교회를 가르친 것 같고 그 같은 특성이 잘 드러난 본문이 이 후반부의 본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교회 교육에서 이런 게 사라진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최근 교리 교육을 강조하면서 이런 요리문답 형태의 교육이 증가한다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 실제 우리 신앙 현장에서의 의문과 그에 대해 답하는 형태로 더 살아 있는 질문과 대답 형태로 자라가야 합니다.
1.배운 것을 힘써 행하라 (1-2)
그러나 전반부는 내러티브고 후반부는 임페라티브 곧 교훈이다라고 정형화해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은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고 그 내용을 보면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다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이는 바울이 실제로 데살로니가에 방문했을 과거사를 회고하면서 말하는 것을 수도 있지만 본문의 문맥상으로 보면 전반부에 내용을 지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여러 행동들을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 생활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근간은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가정 생활이 부부간의 신의를 지켜가는 것이 듯 교회 생활도 그 언약에 충성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구문적으로 보면, 구하고 권면한다는 두 동사가 이끄는 두 개의 대등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한다는 말은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일행이 무엇을 요구하느냐면 두 개의 대등절인데 첫째, 배웠다는 것이고 둘째 그것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배운 내용이 무엇이냐면 마땅히 어떻게 행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는 것이죠. 사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끝판왕이 뭐냐면 이 데살로니가전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윤리를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 윤리는 우리가 힘써야 진전이 가능한 점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운 바는 2절에 의하면 개인적인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들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2. 성적 순결을 유지하라(3-8)
3-8절은 윤리의 표준 곧 우리가 기쁘시게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음란을 버리라는 것이고 둘째, 거룩함과 존기함으로 아내를 취하고 이방인처럼 색욕을 따르지 말라는 것 셋째, 분수를 넘지 말고 상대를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개인적 성결, 가정적 성결, 사회적 성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좀 재미있는 표현은 4절의 아내를 취하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자기 자신의 그릇을 취하다'능 뜻인데 성경은 종종 사람을 그릇으로 묘사한다는 점을 주목해두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셋은 공히 모든 성적 윤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번째 6절에 나타난 분수를 넘어 상대를 해하지 말라는 표현에서 앞을 유심히 보시면, '이 일에'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3절 하반절부터 5절 까지의 내용으로 성윤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실제로 6절이 말하는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말은 십계명의 7계 곧 타인의 가정을 깨는 일을 범하지 말라. 그것이 형제를 해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7-8절은 다시 3절의 하나님의 뜻과 2절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돌아가서 설명을 합니다. 곧, 그 뜻대로 우리를 부르신 바는 성적 범죄에 빠져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거룩은 바로 성적 순결을 문맥상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음란을 버리고 거룩과 존귀로 아내 취할 줄 알고 이 일에서 이웃을 행치 않는 이것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윤리에서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진술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진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몸은 항상 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죠. 몸으로써 성생활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되는 데 이 내주의 약속은 우리 몸에 거하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성생활은 몸에 성령의 현존하심에 부응되게 영위되어야 합니다(15-17절). 오늘 본문도 특별히 성적 부정을 다루면서 '성령을 주신' 이라는 수식을 더해 그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6장에서 보이는 창녀와 관계하는 경우에는 그 몸에 성령의 현존하심에 부응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 성행위는 전적 인간에 대한 관계로부터 유리되어 있어서 몸이 비책임적 소행의 연장과 희생물로 죄의 도구와 희생물이 되기 때문이다(18절). 그래서 이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나 음행에 관해 권고하면서 피하라고 권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고전 6:18). 오늘 본문의 경우는 버리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버려야 할 것이고 피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죄들에 대해서는 싸우라 권하는 성경이 특히 이 몸에 관한 죄에 대해서는 피하라고 권합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 겉옷을 벗어 놓고 도망하듯이 피해야 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죄의 연장이자 도구가 된다면 사실 모든 것이 파괴되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1.배운 것을 힘써 행하라 (1-2)
그러나 전반부는 내러티브고 후반부는 임페라티브 곧 교훈이다라고 정형화해서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절은 그러므로 라고 시작하고 그 내용을 보면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다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이는 바울이 실제로 데살로니가에 방문했을 과거사를 회고하면서 말하는 것을 수도 있지만 본문의 문맥상으로 보면 전반부에 내용을 지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의 여러 행동들을 그대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 생활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그 근간은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가정 생활이 부부간의 신의를 지켜가는 것이 듯 교회 생활도 그 언약에 충성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구문적으로 보면, 구하고 권면한다는 두 동사가 이끄는 두 개의 대등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한다는 말은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바울 일행이 무엇을 요구하느냐면 두 개의 대등절인데 첫째, 배웠다는 것이고 둘째 그것을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배운 내용이 무엇이냐면 마땅히 어떻게 행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는 것이죠. 사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관한 끝판왕이 뭐냐면 이 데살로니가전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윤리를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 윤리는 우리가 힘써야 진전이 가능한 점진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운 바는 2절에 의하면 개인적인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들이 받은 것이었습니다.
2. 성적 순결을 유지하라(3-8)
3-8절은 윤리의 표준 곧 우리가 기쁘시게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함은 크게 셋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째, 음란을 버리라는 것이고 둘째, 거룩함과 존기함으로 아내를 취하고 이방인처럼 색욕을 따르지 말라는 것 셋째, 분수를 넘지 말고 상대를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개인적 성결, 가정적 성결, 사회적 성결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좀 재미있는 표현은 4절의 아내를 취하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자기 자신의 그릇을 취하다'능 뜻인데 성경은 종종 사람을 그릇으로 묘사한다는 점을 주목해두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이 셋은 공히 모든 성적 윤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번째 6절에 나타난 분수를 넘어 상대를 해하지 말라는 표현에서 앞을 유심히 보시면, '이 일에'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3절 하반절부터 5절 까지의 내용으로 성윤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실제로 6절이 말하는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말은 십계명의 7계 곧 타인의 가정을 깨는 일을 범하지 말라. 그것이 형제를 해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7-8절은 다시 3절의 하나님의 뜻과 2절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돌아가서 설명을 합니다. 곧, 그 뜻대로 우리를 부르신 바는 성적 범죄에 빠져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거룩은 바로 성적 순결을 문맥상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음란을 버리고 거룩과 존귀로 아내 취할 줄 알고 이 일에서 이웃을 행치 않는 이것을 지키는 것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사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윤리에서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룬다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진술은 고린도전서 6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루는 진리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몸은 항상 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죠. 몸으로써 성생활도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특히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게 되는 데 이 내주의 약속은 우리 몸에 거하심에 대한 약속입니다. 성생활은 몸에 성령의 현존하심에 부응되게 영위되어야 합니다(15-17절). 오늘 본문도 특별히 성적 부정을 다루면서 '성령을 주신' 이라는 수식을 더해 그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라고 묘사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6장에서 보이는 창녀와 관계하는 경우에는 그 몸에 성령의 현존하심에 부응하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에 성행위는 전적 인간에 대한 관계로부터 유리되어 있어서 몸이 비책임적 소행의 연장과 희생물로 죄의 도구와 희생물이 되기 때문이다(18절). 그래서 이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나 음행에 관해 권고하면서 피하라고 권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고전 6:18). 오늘 본문의 경우는 버리라고 권합니다. 그것은 버려야 할 것이고 피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죄들에 대해서는 싸우라 권하는 성경이 특히 이 몸에 관한 죄에 대해서는 피하라고 권합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피해 겉옷을 벗어 놓고 도망하듯이 피해야 하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죄의 연장이자 도구가 된다면 사실 모든 것이 파괴되기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2014.07.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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