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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데살로니가전서강해

종말의 때에 관하여(살전 5:1-11)

종말의 때에 관하여(살전 5:1-11) 

노승수 목사

『[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1. 종말의 때에 관하여(1-3)
본문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함에도 시한부 종말론이 늘 대두됩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때(크로노이)와 시기(카이로이)는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크로노스’ 는 일정 기간의 시간을 뜻하고 ‘카이로스’
는 한 시점이나 위기 또는 기회를 뜻합니다. 종말이 어떤 기간에 걸쳐 어떤 지점에 일어나는 것은 다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종말의 때와 시기에 대한 질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종말을 좀 더 잘 준비하길 원했던 데서 비롯된 거 같습니다. 오늘날 사이비 종말론이 생성되는 데는 이런 이유들이 있습니다. 전도서도 이야기하지만 장래일을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주를 경외케 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계시록에서 보듯이 우리가 그것을 미리 안다고 잘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날을 감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그 날들을 견디겠습니까?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그 날과 시기를 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우선 아무도 그 날과 시기를 알 수 없고 그 역사의 경륜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니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날에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2절에서 밝혔듯이 그들도 자세히 이미 배워 아는 바였습니다. 그리고 바울도 더 쓰고 가르칠 것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만한 교훈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주님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어서 교훈이 부족하고 아는 바가 부족해서 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배워 아는 것도 제대로 믿고 따르기보다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데 여기서 패착이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강조하는 것이 이 시간을 경영하시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요 비밀에 속한 것입니다. 전도서를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곤고한 날을 경험하게 하시고 형통한 일을 경험하게 하셔서 이 둘을 번갈아 하심으로 장래 일을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역사의 진행과 경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로 혼란스러워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내일 일을 어떻게 그 시간을 경영하실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죠. 오히려 성경의 여러 교훈을 우리에게 드러내셨고 그 교훈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가려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비밀한 것에 속한 것이며 그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열심과 열정은 이해할 수 있으나 항상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열정적일 때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그래서 이단에 빠지기도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을 보십시오. 그중에 심심하고 열정적이지 않은 이단도 있었습니까?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항상 우리의 분수를 넘은 열심이 우리를 패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더 잘 준비하겠다는 열심이 불필요한 일을 만듭니다. 그래서 바울도 종말에 관해 더 가르칠 것이 없고 너희가 충분히 안다고 말합니다. 나는 오늘 어떤 모습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2. 종말을 사는 자의 태도(4-8)
종말에 임하는 바른 태도는 그러면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빛의 아들로 낮에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 구원의 소망으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날이 도둑처럼 임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임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기습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적들이 방비하지 못했을 때, 기습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당하는 입장에서 기습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발생합니다. 첫째는 한밤에 다 자는 시간에 오기 때문이고 둘째는 방비하는 자가 잠이 들었기 때문에 셋째 술에 취해 준비할 수 없었기에 당합니다. 바울이 낮에 행하고 빛에 행하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재림은 이 기습처럼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입니다. 낮과 밤은 물리적 낮밤을 가리키기보다 영적인 메타포입니다. 누가 낮 동안 두 눈을 뜨고 지켜 방비하는 동안 기습을 합니까? 이 때는 기습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기습적이지만 낮을 사는 신자에게는 기습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혀 준비되지 않은 밤을 사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느날 갑자기 당하는 천재지변과 같은 불행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낮을 사는가? 그것은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과 구원의 투구로 낮을 사는 것입니다. 이 역시 메타포입니다. 기습이란 단어와 맞물려서 군인의 군장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되는 믿음, 소망, 사랑은 이미 1장에서 믿음의 표지를 다루면서 언급했습니다. 추가해서 설명하자면, 믿음은 일종의 플러그 인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죽고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합니다.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플러그 인 하는 우리 내적인 도구들입니다. 믿음 자체가 그리스도의 연합을 만들지는 않지만 믿음이 도구가 되어서 그리스도 안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사랑은 호심경으로 비유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의를 호심경으로 비유했는데요.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플러그 인이 된 결과가 바로 사랑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형제와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사랑이란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무장을 해제하고 누군가에게 다가서는 일이 되다 보니 쉽게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상처의 결과는 항상 비뚤어질테다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호심경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일어나는 율법의 정신과 메시지의 실천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몇몇 상처들로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의 불꽃이 꺼지게 되면 믿음에도 영향을 입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사단과 세상의 화전을 피할 수가 없고 그것을 맞서는 동안 우리 상처는 불가피합니다. 견디기 어려울 때도 존재합니다. 그 때, 구원의 소망이 필요합니다. 회의는 항상 머리에서 찾아오죠. 우리가 구원의 소망에 관한 투구를 써야하는 이유입니다.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나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우리 생각 속에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일을 저버리고 회의와 의심이 찾아들지 못하게 소망으로 투구를 쓰라는 말입니다. 

3. 종말에 대한 권면(9-11)
종말이 우리 앞에 놓여 있으나 근본적으로 우리를 세우심은 그 진노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깨든지 자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 목적 의식이 바로 소망이요 이 소망을 근거로 우리는 인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견고하게 우리 안에 지식으로 자리 잡아서 현재에 당하는 여러 일들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리얼리티는 지금 당하는 여러 환란과 고난의 현실이 아니라 장래에 우리가 맞게 되는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구원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확고한 지식을 가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임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바로 소망입니다. 우리가 평탄할 때도 무언가를 소망할 수 있지만 지금이 좋으면 미래를 소망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소망이란 지금의 척박한 현실이라는 배경 속에서 피는 한 떨기 꽃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 첫째 우리를 세우심은 노함에 이르레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우리와 더불어 살려고 그러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붙드는 것입니다. 투구처럼 견고하게 흔들림이 없이 말입니다. 이 지식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미래를 현실로 당겨오는 것, 마치 줌인 카메라로 수억 광년이 더 떨어진 미래의 별을 바로 내 앞에 현재로 당겨오는 것처럼 이 지식이 줌인 카메라가 되어서 저 먼 하나님 나라와 참된 성취를 이땅으로 당겨서 내 삶에 가져오는 것 그것이 종말에 삶에 처한 자가 누리는 소망입니다.


2014.07.08 1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