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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환대’에 관하여

데리다, ‘환대’에 관하여
월드 리베로 사상가, 자크 데리다
월드컵의 계절에 축구를 좋아했던 한 사상가를 떠올린다. 축구 포지션 중에 ‘리베로’(libero)라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 스위퍼 같은 최종 수비수 역할을 맡으면서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는 선수를 말한다. 한국의 홍명보가 그랬듯이, 리베로는 급작스레 롱슛을 때리거나, 세트 플레이가 되면 전방 깊숙이 솟아 헤딩슛을 한다. 평생 축구를 좋아했고, 가장 힘들 때, 외로울 때, 차별받을 때, 볼을 차며 울분을 참았을 그을린 얼굴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20세기 사상사에서 숱한 고정관념을 펑펑 차대며 리베로의 책무를 다했다.
프랑스령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사상가를 흔히 ‘순수하지 않은 알제리아인’(Algerians improper)이라고 한다. 데리다는 에스파냐에서 15세기에 쫓겨난 토착 유대인 공동체의 후손이었다. 알제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알베르 카뮈, 알튀세르, 사르트르, 프란츠 파농은 모두 알제리를 거쳐 사상의 변화를 겪는다.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에서 병역을 마치기 위해 정신병원에 근무한다. 여기서 그는 정신병자로 감금된 환자들에게 축구 경기를 즐기게 한다. 알제리대학 축구부 골키퍼를 했던 알베르 카뮈도 데리다처럼 프로축구 선수가 꿈이었다. 차두리처럼 축구를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면, 어린 시절 지독한 왕따를 당한 많은 헝그리 축구광은 볼을 차며 울분을 참지 않았을까.<문학의 길>,<쇼쇼쇼>등을 남기고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간 문학평론가 고 이성욱도 사립국민학교 시절 부자 아이들 틈에서 겪었던 열등감을 볼을 차대며 삭였다고 했다.
뿐이랴, 데리다는 알제리 태생에다가 ‘유태인’이란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비시 정권(Regime de Vichy,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있던 북부를 제외한 남부 프랑스를 1940~1942년까지 다스린 정권 - 편집자 주) 때 다니던 중학교에서 1년 동안 쫓겨나기도 했다. 고교생 때 울분에 더 볼을 찼던 데리다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떨어졌다. 재수 기간 중에 독서에 열중하고 시를 써서 발표한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데리다는 대신에 이때부터 인생을 걸고 전통적 철학사와 한 게임을 치른다.
차연, 현재와 다른 것
데리다는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파괴(Destruktion) 개념을 빌려 와 ‘해체’(deconstruction)란 말로 번역한다. 1967년부터 데리다는 다양한 저술을 통해 서양 형이상학에 ‘해체’의 태클을 걸기 시작한다. 데리다는 형이상학의 ‘이항대립’ 구조에 태클을 걸었다. 구조주의 같은 서양의 사고는 그리스 때로부터 철저한 이분법의 사고였다. 진리 - 비진리, 선함 - 추함, 유한 - 무한, 남 - 여, 음성 -문자(기호), 기의 - 기표 등의 개념을 놓고 서로 대립시켰다. 데리다는 이 점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오류와 한계를 본다.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 ‘음성 중심주의’, ‘남근 중심주의’도 데리다에 의해 흔들린다.
데리다는 언어에 초점을 맞춰 철학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텍스트가 불변의 의미를 지닌다는 기존의 생각을 뒤집었다. 그에게 텍스트의 의미는 계속 한없이 ‘미끄러지면서’ ‘변한다.’ 그는 텍스트를 섬세하게 해석하면서 하이데거의 ‘사이’(間)에서, ‘차이’의 철학을 형성시켜 나간다. 그것이 차연(差延)이라는 개념이다.
차연이란 무엇인가. 지금에 앞서 의식에 현전(現前)했던 것보다 더 앞서서 의식에 현전했던 것조차 지금 재-재현되고 있지 않는가? 현전하는 것은 재현된 것과 차이 나고, 재현된 것은 재-재현된 것과 차이 나고, 재-재현된 것은 재-재-재현된 것과 차이 나고, … 차이 나고. 차이 나는 것들의 무한정한 대행진이 죽 펼쳐진다. 차이에서 차이로 계속 이어지면서 차이의 정체가 계속 무한정 연기되는 것을 데리다는 차연(差延, differance)이라고 말한다. 차연(differance)이라는 생소한 단어는 차이(difference)와 지연(deferment)을 합성하여 데리다가 만든 신조어다.
데리다는<글쓰기와 차이>(1967)에서 20세기 철학의 2대 조류였던,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 Claude)의 구조주의와 후설(Husserl, Edmund)의 현상학, 프로이트(Sigmund Freud),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등을 해체한다. 모든 동일성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며, ‘동일성보다 차이가 더욱 앞선다’는 그의 입장은 기존 철학계를 지배해 온 명료성과 통일성을 거부한다. 플라톤 이후 서양 철학사를 주도해 온 ‘이성’에 태클을 건 그는 니체, 하이데거를 잇는 ‘반(反)철학’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어린 시절 왕따였던 데리다는 이후 프랑스 철학계에서 말이 비판이지, 차갑게 따돌림받았다. 철학 체계를 망치로 부수려 했던 ‘망치의 철학자 니체’를 창조적으로 이어받은 데리다는 ‘리베로 사상가’로서 모든 기록의 고정관념을 발로 차댔다. 이때부터 ‘리베로 데리다’의 시합은 대부분 다수보다는 소수, 주류보다는 비주류를 위한 사상 투쟁의 한판이었다. - 데리다가 평생 싸워 온 사상의 그라운드 이야기는 김형효 선생이 쓴<데리다의 해체 철학>(민음사)에 비교적 쉽게 설명되어 있다. -
괴물에 대한 관용을 넘어, ‘환대’를 위하여
커니(Richard Kearney)가 이방인을 ‘악마화’해 온 서양사를 지적했듯이, 타자는 악마로 표상되어 왔다(커니,<이방인, 신, 괴물>, 개마고원, 2004). 그러나 이방인에 대한 환대란, 우리에게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소수자, 외국인, 이방인, 디아스포라 등의 어휘는 이미 우리에게 난감한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영화<파이란>(2001)을 생각해 보자.
이 영화는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불법 체류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저당 잡힌 파이란이 처음 보내진 곳은 술집이다. 바닷가 마을 세탁소에서 고되고 초라한 생활을 꾸리며 빚을 갚아 나가는 파이란은 죽어간다. 그런데도 파이란은 한국 사회에 감사하고 강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가짜 결혼을 해 준 불량배 강재에게 파이란은 질문과 감사가 가득 찬 편지를 남긴다.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 주시겠습니까? 만약 오신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당신의 무덤에 같이 묻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으시겠습니까? 응석부려 죄송합니다.”
파이란은 자기가 죽으면 매장에 대해 법 문제가 생기리라 생각하고 편지를 남겼던 것이다. 파이란은 이렇게 스스로 존재가 처할 죽음의 장소까지 묻는다. 이방인이 개입할 때 토박이 공동체는 이방인과 함께 물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그 물음은 이방인에게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방인은 ‘물음을 던지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방인이란 물음으로-된-존재, 물음으로-된-존재의 물음 자체, 물음-존재 또는 문제의 물음으로-된-존재”(데리다,<환대에 대하여>57면. 이후 면수만 표기한다)라고 데리다는 말한다. 이렇게 한 공동체에서 당연시 여기는 세계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이방인으로 데리다는 소크라테스의 예를 든다. 아테네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이방인으로 대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공동체의 관습적 질서에 따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러한 경계인, 이방인들은 토박이 공동체 안에 의미 있는 자극을 준다. 또한 이방인 자신도 스스로 불안정하고 쓰라린 경험을 하면서, 공동체에게도 비교와 물음을 통한 자극과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데리다의 논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3부작 중의 두 번째 이야기인<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시작된다.<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오랜 방랑 끝에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클로노스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다가오는 클로노스인을 “이방인이여!”라며 불러 세운다. 이 장면은 ‘이방인’이 위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주어지는 호칭임을 보여 준다. 즉 오이디푸스는 클로노스 땅에 이제 막 도착한 방랑자요, 외국인이요, 이방인이지만, 오이디푸스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고장 사람들이 ‘이방인’인 것이다. 외국인으로 대우받는 기본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은 우선 환대의 의무, 비호권, 그 한계, 그 기준, 그 치안 등이 명시되어 있는 법의 언어 앞에서 이방인이다. 그는 정의상 자신의 언어가 아닌 언어로, 집주인, 주인(접대인), 왕, 영주, 권력, 국민, 국가, 아버지 등이 자신에게 강요하는 언어로 환대를 청해야 한다. 주인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언어로의 번역을 강요하는데 이것이 첫 번째 폭력이다(64면).
그리고 서로 이방인이 된 입장에서, 예언에 따라 안정한 죽음의 장소를 제공받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와 클로노스 고장 사람들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 같은 이방인은 콜로노스의 토박이 공동체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관용(tolerance)될 수 있다. 데리다는 관용이 권력자의 양보와 자비, 은혜 베풀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 그것은 “힘이 곧 정의”라고 하는 “최강자의 논리” 편에 있게 된다고 지적한다. 데리다는 강자의 자비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이방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원리’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여기서 관용을 극복할 윤리적 이념으로 데리다는 ‘환대’(hospitality)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절대적 환대의 윤리적 이념’은 ‘타자 혹은 타인’을 ‘그 자체의 충만함’으로 받아들이는 타자 중심의 윤리적 지향을 갖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타자에 대한 데리다의 차이의 윤리가 레비나스의 윤리적 태도와 이 지점에서는 같음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콜로노스의 숲에 도달한 오이디푸스가 그랬듯이, 이방인은 항상 법과 지식에 대해 잉여이자 초과이다. 언어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이자, 국가의 영토 밖도 안도 아닌 곳에 있는 자, 그가 바로 이방인이다. 그런데도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를 말한다.
절대적 환대는 내가 나의-집을 개방하고, 이방인(성을 가진, 이방인이라는 사회적 위상 등을 가진 이방인)에게만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미지의 절대적 타자에게도 줄 것을, 그리고 그에게 장소를 줄 것을, 그를 오게 내버려 둘 것을, 도래하게 두고 내가 그에게 제공하는 장소 내에 장소를 가지게 둘 것을,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호성(계약에 들어오기)을 요구하지도 말고 그의 이름조차도 묻지 말 것을 필수적으로 내세운다. 절대적 환대의 법은 권리의 환대와 결별할 것을, 권리로서의 법 또는 정의와 결별할 것을 명령한다(70~71면).
이렇게 볼 때 절대적 환대는 관용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절대적 환대는 스스로를 주인이면서도 동시에 손님으로 여기는 태도다. 불어에서 Hote는 주인과 손님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불어에서 hospitalite는 베푸는 사람과 아울러 받는 사람을 동시에 말한다. 비교컨대 관용은 주체(혹은 주인)의 입장이지만, 환대는 타자에게 선택권을 넘겨준다. 따라서 관용은 ‘조건부 환대’다. 이러한 환대는 “나는 나의 ‘내-집’을, 나의 자기성을, 나의 환대 권한을, 주인이라는 나의 지상권을 침해하는 이는 누구나 달갑지 않은 이방인으로, 그리고 잠재적으로 원수(敵)처럼 간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타자는 적의에 찬 주체가 되고, 나는 그의 인질이 될 염려가 있는 탓이다”(89면)라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관용이란 주인에 의한 ‘초대(invitation)의 환대’를 말하고, 무조건적 환대는 이방인에 의한 ‘방문(visitation)의 환대’(135면)를 말한다.
그런데, 환대받아야 할 이방인은 항상 친숙한 모습으로 현관문을 두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심지어 강도이거나 도둑일 수도 있다. 사건처럼, 진리처럼, 잉여이자 초과인 상태 그대로 이방인은 환대받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에 기반을 둔 무조건적 환대’에 대해서 데리다는 해체 철학의 창시자답게, 자신이 세운 개념과 체계를 스스로 반성한다.
달리 말하면 이율배반이 있다. 환대의 법과 환대의 법들 사이엔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 변증법화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 있는 듯하다. 한편 환대의 법은 무제한적 환대에의 무조건적 법(도래자에게 자신의 자기-집과 자기 전체를 줄 것, 그에게 자신의 고유한 것과 우리의 고유한 것을 주되 그에게 이름도 묻지 말고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최소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을 것)인가 하면, 다른 한편 환대의 법들은 언제나 조건 지어지고 조건적인 권리들과 의무들로서, 그리스-라틴 전통이, 유대-그리스도교적 전통이 규정하고 있으며, 칸트 그리고 특히 헤겔까지의 모든 권리(법)와 모든 법철학이 가족·시민 사회·국가에 걸쳐 규정하고 있는 환대의 권리들과 의무들이기 때문이다(104~105면).
레비나스와 달리,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직시한다. 우선 그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과장적인 환대의 (유일무이한) 법(la loi)”과 “한계들·권한들·권리들·의무들을 정해 놓음으로써 환대의 법에 도전하는 환대에 관한 모든 법들(le lois)”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정말 싫어할 방법이지만 그가 말한 관용과 환대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가령 새터민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처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집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법들’이 준비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결국 무조건적 환대를 위해서는 환대의 법들이 필요하다는 말인데, 법들에 의해 선별되는 환대란 무조건적일 수 없다. 데리다가 무조건적 환대의 “환원 불가한 타락 가능성(pervertibilite)”(72면)에 대해 말하거나, “이방인은 타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절대적이고 야생적이고 야만적인, 전(前)문화적이고 전(前)법적인 외부에 내밀어 버리는 극도의 타자, 가족과 공동체와 도시와 국민 또는 국가의 저쪽 외부로 추방해 버린 극도의 타자가 아니다. 이방인에 대한 관계는 권리에 의해, 정의의 권리의 생성에 의해 규제된다”(99~100면)라며 무조건적 환대의 윤리와 조금 다른 주장을 펼치는 구절도 보인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이름을 불러야만 관용인, 이 ‘이율배반’을 어찌할 것인가?
이 딜레마는 끊임없이, 한편으로 권리나 의무나 정치까지도 초월하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다른 한편 권리와 의무에 의해 테두리가 정해지는 환대 사이에서 우리를 번민하게 할 것이다. 한쪽 환대는 언제나 다른 한쪽을 타락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타락 가능성은 환원 불가능한 것으로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질문 삼가(“오시오, 들어오시오, 우리 집에서 머무시오, 당신 이름을 묻지 않겠소, 책임 있게 행동하라고도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겠소”)는 유보 없이 증여를 제공하는 절대적 환대에 훨씬 합당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며, 게다가 어떤 이들은 거기서 언어의 가능성을 가려낼 수도 있을 터이다. 침묵하기(le se-taire)는 이미 발언 가능한 말의 양태가 아니던가. 우리는 언어의 개념에 있어서도, 또한 환대의 개념에 있어서도 이러한 두 가지 의미 확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할 것이다(141~142면).
영원한 번민, 발언하기와 침묵하기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투쟁, 이것이 데리다의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 공허하다는 비판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진하게) 절대적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는 결국 필연적으로 환대의 법들, 권리들, 제약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다. 어떤 권리나 법에 의해 매개된 환대는 더 이상 무조건적 환대가 아니다.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여기까지)
바디우가 말한 ‘진리에 대한 충실성’은 데리다가 말한 ‘환대의 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방인이 항상 낯설게 내 집에 도래하는 것처럼, 진리는 항상 그처럼 낯설게 의견들 속으로 도래한다.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 알랭 바디우의 윤리라면, 그와 똑같은 의미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 또한 윤리이다. ‘진리의 윤리학’(바디우)과 ‘환대의 윤리학’(데리다)은 이렇게 만난다.
데리다는<환대에 대하여>152면부터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가정 이야기를 쓴다. 두 천사가 롯의 집에 찾아오자, 소돔 남자들이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성관계)하리라”(5절)고 말한다. 이에 롯은 두 딸을 음란한 소돔 남자들에게 내놓는다. 비슷한 상황이 사사기 19장에도 나온다.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지키기 위해 자기 딸과 손님의 첩을 내놓는다. 그러자 “그들이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을 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그 주인이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서 누었더라”(25~26절). 밤새 강간당한 여자들이 죽은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장면의 의미를 해설하지 않는다. 이것은 첫째, 무조건적 환대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며, 둘째, ‘환대의 법들’을 만드는 것이 가정의 폭군, 아버지, 남편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무조건적 은혜, 조건적 은혜
데리다의 선조라 일컬어지는 니체가 말한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필로소피(Philosophy)는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되었다.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니체는 “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입대 연대를 따지고 금방 “충썽!”을 외치는 전우회 패거리로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다. 니체는 “제발 그대의 먼 이웃을 사랑하라. 그대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 그대 옆의 사람을 마구잡이로 사랑하면 민족주의가 된다”고 말한다. 옆에 있는 존재만을 “가엽게 여기는 연민, 동정, 박애, 적선 따위의 짓 좀 하지 말라”며 니체는 상투적인 사랑 관념을 ‘망치로 부순다.’
니체의<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에 보면 ‘증여의 덕’이라는 장이 있다. 아낌없는 주는 태양처럼 주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거지한테는 절대 베풀지 말라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주는 것은 친구들끼리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이 장관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뇌물이다. 친구가 아니면 선물 주기 힘들다. 거지는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어, 타자에게 뭔가를 가져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와는 친구가 절대 될 수 없다. 거지란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를 학대한다.
가령 마태복음 5장 46절의 “너희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무슨 보상을 받겠는가. 너희가 형제에게만 친절하다면 남보다 뭐가 나을 게 있겠는가”를 해석하면서, 이 구절은 기독 ‘교단’에서는 “기독교적 사랑은 보상을 받는다”라고 가르친다고 니체는 비판한다. 니체는 예수가 가르친 사랑은 그런 보상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보상이란 그것을 잘했다고 주는 게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것 자체가 보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보상이며, 곧 소유욕의 다른 표현이라고 지적한다. 타인을 사랑한다 하면서, 그것으로 타인을 소유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타인을 주체로 보는 니체나 데리다의 환대에 대한 생각과 자세는 필자가 보기에 놀랍게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누가복음 10: 25~37)’와 닮아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름이나 신분 따위를 묻지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영생이 뭐냐’는 질문에 구약성경에 뭐라고 나왔느냐고 되묻는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예수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말꼬리를 잡고 율법학자들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뭐냐고 묻는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해간 강도 만난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그리고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35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말한다. 율법학자들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답한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무조건적 환대를 겨냥하고 있다.
가령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말씀은 한국 교회에서 많이 설교되는 구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구절만 보았을 때, 하나님은 무조건적 환대, 곧 무조건적 은혜(unconditional grace)의 상징으로만 보인다. 그런데 그 앞의 구절을 읽어보자.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줄 쳐진 대목에서 ‘무조건적 은총(혹은 환대)’이란 그냥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능력은 고난과 배고픔과 궁핍에 거할 줄 아는 그 능력이기도 하다. 공짜로 로또가 당첨되는 그런 능력과는 사뭇 다르다. 노숙자와 부자의 삶 그 사이를 체험하고 그 삶의 비결을 아는 사람만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조건적 은혜’(conditional grace)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요즘 비유로, 미국 시민권에 하버드대학 정도 졸업했지만 복음을 위해 감옥에 들락날락했던, 로마 시민권 소유자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갔을 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받았던 것이다.
위 구절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흉내 내서 누군가에게 무조건 주면, 상대방을 거지로 만들 수도 있다. 타자를 거지로 유지시키며 물건을 주는 박애주의자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을까. 성경에서 ‘이방인’의 문제는 도처에 나타난다. 다니엘 6장 12~14절을 보면, 이방인 다니엘을 사자 굴에 보낼 수밖에 없는 왕의 고민이 나타난다. 왕은 ‘조건적 환대’를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왕은 다니엘에 대한 고통과 염려로 밤을 꼬박 새운다. 다음날 새벽 그는 일찍이 일어나 슬픔에 젖어 사자 굴에 가지만, 다니엘이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임금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살아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지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아났던 것은 무조건적인 환대 혹은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 살아난 것이 아니다. “제가 결코 왕에게 나쁜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이 구절이 다니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드러낸다. 다니엘은 바울처럼, 궁핍과 풍부에 처하는 비결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에게 다니엘은 단순한 신하가 아니었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다니엘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 이상의 가족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다니엘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슬퍼했고, 다니엘이 살아났을 때 왕은 자기가 부활하듯 기뻐했던 것이다.
니체는 적선이나 관용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니체는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다”라고 말한다. 네가 진짜 진리를 사랑한다면 진리를 사랑스럽게 창조하라는 것이다. 네가 정말 친구를 사랑한다면 사랑할 친구를 만들라는 것이다.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은 사랑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다니엘의 삶이 그랬다. 그래서 니체는 비너스에 생명을 불어넣은 ‘피그말리온’이야말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아고 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사랑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 이게 아주 중요하다. 하느님은 정말 세상을 사랑한 것이다. 세상을 있게 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니체의 시각에서 봤을 때, 다니엘과 예수와 사마리아인, 바울, 그리고 데리다도 정말 사랑이 뭔지 아는 혁명가일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혁명가는 세상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못할 짓을 저지르는 독재자는 세상을 정말 미워하고 사랑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환대를 위한 너머
데리다의 사상이 미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6년부터 르네 지라르의 초청으로 존스 홉킨스 대학의 학술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했고 1975년부터는 예일대학에서 1년에 몇 주씩 강의하면서부터다. 그는 예일의 폴 드만, 해롤드 블룸 등의 문학비평가들과 교류하면서 ‘예일학파’라고 불리는 해체주의 문학 운동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당시 주요 저서<글쓰기와 차이>(1967),<그라마톨로지>(1967),<입장들>(1972) 등을 펴냈다. 1980년 파리 10대학 철학과 폴 리쾨르의 후임 교수를 선발할 당시, 데리다는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쉰 살의 나이에 뒤늦게 소르본대학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지만, 리쾨르 후임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한다.
이즈음부터, 데리다는 프랑스 내 알제리 이주민의 권익을 위해 싸웠고 인종 차별주의 및 동성애자 차별 철폐에 적극 나선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구명 운동과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팔레스타인 지식인들과 교제를 나눈다. 1981년엔 프라하에서 체코의 반체제 지식인들과 비밀 회합을 갖다가 체포돼 미테랑 대통령까지 나서 구명운동을 편 끝에 추방되기도 했다. 그 후 데리다는 1983년 리오타르와 함께 ‘국제철학학교’를 창설,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1990년에는 뉴욕대학교 법대에서 정의(Justice)를 주제로 강의하면서 법 이론과 윤리학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된다. 도발적이고 난해한 그의 이론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허무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일각에서 제기됐고 프랑스의 정통 학계에서도 때론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환대론은 파시즘적 국가 행태를 해체하는<불량배들>(휴머니스트, 2003)에서 확대된다. 서구의 존재-신학적 동일성 철학의 ‘해체’에 전념했던 데리다는 ‘역사의 종말’, ‘자본주의의 완전 승리 세계화’ 담론이 극성을 부리던 1990년대부터<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을 출간한다, 이어<환대에 대하여>(1997)와<불량배들>(2003)을 내고 현실 정치를 해체한다.
데리다의 ‘불량 국가’ 담론은 미국이 일방적 외교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 이란, 시리아, 리비아, 북한 등을 ‘불량 국가’로 규정한 이래, 노엄 촘스키와 윌리엄 블룸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초법적 국제 테러 행위를 전거로 들어 미국이야말로 ‘세계 최대의 유일한 불량 국가’라고 비판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담론이다. 데리다는 현존하는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사실상 불량 국가이며 따라서 우리는 불량 국가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그에 따르면,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서구적 자유 이념에 기반을 둔 자기결정권에 따라 힘을 행사하는 것을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힘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에게 ‘불량배’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고 처벌할 수 있으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폭력(테러리즘)’과 ‘전쟁’은 그러한 논리의 귀결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그렇다고 말하는 모든 국가가 불량 국가라면, 테러리스트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미국도 마찬가지로 불량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UN 회원국이 주권으로 정한 국제 규범을 미국이 무시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예외적 주권’을 가졌다면, 테러리스트들도 미국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예외적 주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강자의 이성은 사실상 ‘정의’가 아니라 ‘법’이며, ‘법의 힘’에 의해 통치되는 현존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 ‘불량 국가’에 불과하게 된다. 데리다는 최강자의 이성이 법이 되고 정의가 되는 현존 민주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다가올 민주주의(democratie a venir)’를 역설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이상의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글을 맺으며 다시 축구를 좋아했던 데리다가 남긴 명언을 써본다. “터치라인 너머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Beyond the touchline there is nothing).”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조건적 은혜(≒조건적 환대), 무조건적 은혜(≒절대적 환대) 사이, 그 틈, 그 짬에서,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한 팀이 무한한 드리블과 패스와 태클과 슛을 하며,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야 한다고 자크 데리다는 말하고 까마득한 하늘 그라운드로 떠났다.
김응교 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