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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동정녀 탄생의 신비

동정녀 탄생의 신비

고재수 교수

초기 기독교회의 변증 
동정녀 탄생의 기적은 신자에게 종종 당황스럽게 여겨집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이 기적을 믿는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잘못하면 비웃음을 삽니다. “허튼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으니까요.” 잘해도 그들은 거만한 미소를 띠고 거부할 뿐입니다. “당신은 아이를 22명 낳은 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요? 그 여자가 자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사진을 보고도 말이지요. 그러니 내가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이야기를 믿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회도 이미 그러한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동정녀 탄생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시도한 한 가지 변증은 고전 문학 작품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출생부터 비범한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위대한 철학자인 플라톤은 그리스의 신(神)인 아폴로에게서 났다고 합니다. 오리게네스는 그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그리스 사람에게 말할 때에 그리스의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은 신화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나 유사성을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복음을 약화시킬 뿐입니다. 실제로 유대인 트립포는 이러한 방법을 기독교의 메시지를 비방하는 데에 사용하였습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해 그리스 신화의 영웅 이야기와 비슷한 것을 지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함축적으로 그리스도가 그리스의 영웅들과 다름이 없으며, 동정녀 탄생이 근거 없는 허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변증하려는 신자는 이러한 논증을 사용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도 변증하는데, 그것은 처녀 생식(parthenogenesis)입니다. 어떤 동물들은 수컷이 없이도 새끼를 밸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변증가 락탄티우스는 그러한 식으로 비교하였습니다. “어떤 동물들이 바람이나 산들바람에 의해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무슨 일이나 원하는 대로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신에 의해 동정녀가 잉태된 사실이 왜 놀라운 일입니까?”
당시 락탄티우스가 염두에 두었던 실례들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어떤 식물이나 동물들은 수정이 없이도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되고 있습니다. 최근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는 도마뱀에게서 이런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동정녀 탄생이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어서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사실상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먼저, 처녀 생식은 특정한 생명체, 특정한 식물이나 동물에서만 발생합니다. 고등 동물에서는 관찰된 적이 없고, 사람에게서는 더더욱 없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인 사소한 일로 그려지지 않고, 성신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役事)로 제시됩니다.
사람들이 동정녀 탄생의 기적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워필드의 변증 
19세기의 위대한 변증가인 워필드도 같은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미국 신학 논문집」(American Journal of Theology) 편집자는 그에게 초자연적인 예수의 탄생 교리가 기독교에 필수적인 것인지를 답해 달라고 기고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그 도전을 받아들였지만, 동정녀 탄생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그는 동정녀 탄생이 신약 성경에 묘사된 종교에서 어떻게 필요한 것인지를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성격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탄생을 요구한다는 확신을 세 가지로 논증합니다. 
먼저, 신약 성경은 초자연적인 종교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고, 바람과 바다도 그분께 순종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무덤을 이기고 나오셨고, 하늘에 오르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수많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하신 예수님께서 보통 사람과 같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은……그분의 초자연적인 생애와 초자연적 사역에서 이미 나타났고, 예수님이 세우신 초자연적인 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시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그런 분이 현세적인 인과 관계에 의하여서 이 세상에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계에 들어오신다면, 창조적으로 들어오실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깨달을수록, “이러한 존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다른 분을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적절하다고 직관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번째로 동정녀 탄생이 필요한 이유는 ‘구속’입니다. 원죄의 교리는 아담의 자연적인 후손 모두가 죄의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인류가 관계된 이런 죄의 바깥에서 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 사역이 그의 초자연적인 탄생에 의존함을 말하는 것이다.”
워필드는 동정녀 탄생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방법임을 인상적으로 논증합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은 기독교적 지성, 즉 당연히 초자연적인 성격을 가지는 기독교적 지성에서 나오는 사실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이해를 들어 호소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에서 기독교적 지성은 인간의 보편적인 지성에도 부합한다. 초자연적인 일을 하는 초자연적인 사람은 초자연적인 근원으로부터 나와야 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언제나, 어디에서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지나친 달변으로 흐른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동정녀 탄생과 같은 하나님의 사역이 교회 밖의 사람들도 누구나 그 이면의 논리를 확신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일이겠습니까? 
동정녀 탄생의 신비 
여기에서 바울의 말씀(디모데전서 3:16)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 가운데 성육신하신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우리 종교의 신비”의 일부분이라고 합니다. (개역에서는 ‘경건의 비밀’이라고 하였음. 아래에서 저자는 ‘비밀’과 ‘신비’를 구분하여서 주해함 - 역자 주.) 
신비(mystery)는 비밀(secret)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모르는 사실을 비밀이라고 하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져 버리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비는 다릅니다. 알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신비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두고 신비라고 합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신비, 역주]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9). 바울이 널리 알리는 복음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므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신비라고 부릅니다(골 2:2-3).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하기에 그것은 신비입니다.
‘신비’의 이러한 의미는 디모데전서 3:16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우리 종교의 신비”의 일부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방식은 디모데와 그 교회가 잘 알고 있었으며, 바울은 이전에 교회에서 그에 관해 설교하고, 서신서에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롬 1:3, 갈 4:4). 그렇지만 그것은 여전히 신비이며, 우리 이해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깊이를 재거나 논리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워필드가 ‘믿을 수 없는’ 동정녀 탄생의 사실을 그 시대의 신학계에서 변호한 것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뒤로 물러서거나 그 교리를 약화시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워필드의 주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초자연적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은 원죄를 가지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동정녀 탄생의 본래적인 필수성을 논증해 낼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동정녀 탄생의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으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완벽한 답으로 논리적으로 추론해 낼 수 없습니다. 설사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해도, 우리의 논리력으로는 동정녀 탄생을 합리적인 것이거나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습니다. 우리는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신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 구원 경륜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위에 계시고, 하나님의 길은 우리 길보다 높습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우리에게 계시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신비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말할 수 있습니다.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께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의 광대함을 반영하며, 하나님의 길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음을 보여 주며,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동정녀 탄생의 신비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봅니다. 우리의 변증을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동정녀 탄생을 믿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1) Origen, Contra Celsum, I, 37 (SC 132;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67) 178쪽 이하. 
2) Justin, “Dialogue with Trypho” in E.J. Goodspeed, Die ältesten Apologeten (Göttingen: Vandenhoeck&Ruprecht, repr. 1984), 174쪽. 
3) Lactantius, The Divine Institutes, IV, XII, 다음의 역본을 참고하였다. A. Roberts, J. Donaldson, eds. The Ante-Nicene Fathers (repr. Grand Rapids: Eerdmans, n.d.) vol. VII, 110쪽. 이 현상은 락탄티우스의 편저자에 의해 인용된 버질의 시에서 말에 적용되었고,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를 독수리에 적용하였다. Tertullian Adversus Valentianos, 10 (SC. 280;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80, 103). 오리게네스도 같은 논증을 사용한다. Origen, Contra Celsum, I, 37. 
4) 백과사전의 항목을 참고하라. 예를 들어 G. Barendrecht의 설명은 Winkler Prins Encyclopaedie vol. 15 (6. ed.; Amsterdam: Elzevier, 1952) 187쪽 이하 참조. 처녀 생식에 관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기사는 1995년 9월 호에 나오며, 거기에서는 도마뱀의 처녀 생식에 관해 다루었다. 
5) 예를 들어 J. Gresham Machen, The Virgin Birth of Christ (2. ed.; repr. Grand Rapids: Baker, 1985) 217쪽 참조. 
6) 이 글은 Christology and Criticism (The Works of Benjamin B. Warfield, vol. 3; repr. Grand Rapids: Baker, 1981)에 다시 실렸다. 447-58쪽. 
7) Christology and Criticism, 451쪽. 
8) Christology and Criticism, 454쪽. 
9) Christology and Criticism, 456쪽. 
10) Christology and Criticism, 452쪽. 
11) RSV와 NIV에는 “God”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으며, 두 번째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He was manifested in the flesh.” 사본상의 증거는 KJV의 번역에 더 가깝다: “God was manifest in the flesh.” 이러한 번역상의 차이가 우리의 논의에 실질적인 차이를 내지는 않으나, KJV의 번역이 더 명확하다. 
12) “신비”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으로 다음을 참고하라. 디모데전서 3:9에 대한 칼빈의 주석. 
13) 원문 출처: Clarion, 45권 (1996) 561-562쪽. 번역: 이경훈(안양: 강변교회 교인). 이 원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을 받았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