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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구원의 신앙 1 고린도전서 15:1-8(1982. 2. 7)

구원의 신앙 1 고린도전서 15:1-8(1982. 2. 7) 

김홍전 박사

그동안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에 대하여서 생각해 왔는데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쓱 때에는 그것이 모두 ‘그 사람이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구원의 확증으로서의 믿음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하지 않고 그것을 별다른 의미로서 믿음이라는 말을 썼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주장하고 확고하니 서있는 개혁교회의 교리의 터 위에서 보통 신학상 그러한 믿음을 대별해서 네 가지로 가르쳐요. 
①첫째는 우리가 배운 대로 알기는 알고 그럴 것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거기에 확실한 구원의 사실이 동반하지 않은 믿음. 즉 구원의 사실이 동반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들이 결핍되어 있는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누가 과거 역사의 사실을 이야기할 때 ‘아, 그렇다’ 하고 승인하는 것과 같은 신앙인 까닭에 신학상 그것을 ‘역사론적인’ 혹은 역사라는 사기(史記)를 신뢰하고 승인하는 것같은 신앙이라고 해서 ‘역사신앙(歷史信仰:historical faith)이라 말한다고 그랬지요. 
이 말을 ‘역사적 신앙’이라는 말로 어떤 사람이 번역한 글을 보았는데 그 말은 대단히 오해를 일으킬 우려가 있어요. 무릇 개혁 교회의 신앙은 역사적인 신앙(historic faith)인 거요. 개혁교회의 신학이라는 것도 역사적인(historic) 신학 사상이오. 이 ‘역사적’이라는 말은 ‘역사 위에 뚜렷한,’ ‘역사를 통해 흘러 내려오는’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러기 까닭에 역사 위에 뚜렷하고 전 역사에 하나의 성격을 지워주는 큰 흐름이 되어 있는 것, 이런 걸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받은 바 역사적인 신앙의 유산이라는 말을 우리는 사용해요. 
우리들의 신앙의 유산, 그렇지만 그 말은 역사신앙(historical faith)이라는 말은 아니오. 그런 말을 쓸 때 주의하라고 그랬지요. 히스토릭(historic)할 때는 ‘역사적’이라는 말이오. 영어는 분명히 분별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히스토릭 훼이스(historic faith), 아주 역사적인 것이다. 큰 의미, 현저한 것, 위대한 것, 고귀한 것을 말할 때 히스토릭(historic)이라고 하는 거요. 그렇지만 지금 어떤 사람이 그의 신앙은 구원의 신앙이 아니면서 어떤 사실들을 승인하고 “그렇습니다” 하고 형식과 자기의 생활에 비춰서 그것이 신앙인줄 알고 따라가고 있다면 그런 것은 역사신앙(historical faith)이다, 혹은 역사론, 역사학적 사실이다. 우리가 역사학을 공부할 때 사기(史記)에 있는 사실들을 그냥 승인하고 내려가는 것과 같은 그러한 신앙 말이오. 이런 것을 주의하셔야 할거라고 그랬어요. 
알기는 아는데, 확실히 그렇다고 승인을 하는데 참으로 구원받을 요소를 거기에 포함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요. 그 예로써 예수님 당시 유대의 종교가들은 잘 몰랐지만 귀신들린 사람, 사귀(邪鬼)는 알고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와서 그 앞에 그냥 엎드러지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그랬어요. 그 때 다른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감히 어떤 사람에게 쓰지 않았어요. 그게 보통 동양(東洋)에 있어서는 천자(天子)라든지 혹은 헬라 나라에서도 있던 ‘신의 아들’이라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그것은 벌써 신성(神性)을 거기에 포함하는 말이 되는 까닭에 그건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요. 그런데 그렇게 와서 사귀들은 예수님 앞에서 그냥 몸뚱이를 내던지고서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헤서 그 사귀는 구원받은 것인가? 그것을 알고, 승인하고,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인가?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아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또한 믿고 떠느니라”(약 2:11)는 말씀같이 신앙의 이러한 상태라는 것은 자기가 반성하면서라도 그것을 구원받은 신앙으로 족하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오. 그러한 자기 신앙의 검토없이 성경을 지식의 내용으로, 지식의 원천으로만 생각하고 자꾸 흡수하려고 하는 이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에서 듣고 간다면 거기에 어떤 듣지 못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재미붙여 가지고 알아볼려고 하는 그러한 태도는 심히 미급하고 옳지 않은 태도요. 재미붙이는 걸 나쁘다고 하는 건 아니오. 그러나 거기에서 멎어 있으면서 그것을 동기로 해서 자꾸 새 사실을 전색(塡塞:메어서 막힘, 또는 막음)하고 꿰뚫어서 자꾸 캐고 나가고 싶어하는 이러한 정신이 주의해야 할 정신이라 이거요. 이게 흔히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하기 쉬운거요. 그럴 때 반성할 수 있어야 하는 거요. 내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종교지식의 원천으로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말씀이 가지고 있는 구속의 은혜로서의 그 권위,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서의 권위는 어디 갔느냐? 하고 그걸 물을 줄 알아야 바른 신앙인 거요. 
거기에 의해서 자기의 생각하는 것이나 지금 추구하고 나가는 것이 오직 지식과 혹은 신기(新奇:새롭고 이상함. 새롭고 별남)에 편중하고 나간다면 그런 것은 절대로 능력 있는 신앙 노릇을 못하는 것이라고, 또 주의시키는 것은 신앙이 어떠한 상태인 것에 대해서는 주께서는 그냥 그대로 가만두시는 것보다도 때때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혹은 큰 사회적으로 위기라는 가져다주어서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가려내는 순간들이 오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창수(漲水)가 내리고 그 집에 덮치는 수가 있으면 사상(砂上)에 세운 집 같으면 무너지는 게고 반석위에 세웠던 집 같으면 그대로 서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 신앙이라는 게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가려지는 거요. 하나님 앞에서 그런 일을 당하는 걸 주의해야 해요. 
어떤 것은 이러한 위기라는 것이 어떠한 큰 대사건으로만 오는 게 아니고 필연적인 역사의 정점 가운데 자연스럽게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돌밭에 심은 씨가 뿌리가 있어 가지고 위로만 싹이 올라가다가 해가 쬐이니까 이 해가 쬐이는 건 특별한 사건은 아닌거요. 자연히 올 사건인 거요.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고 아침이 되면 해가 쬐고 해가 쬐면 약한 건 타 죽는 것이다고. 이렇게 필연한 역사의 시련 속에서,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넘어지고 죽는 것이 있는 것이오. 
②그 다음에 배운 것이 ‘현세 신앙’(temporal faith)이라는 것이예요. 잠깐 믿다가 믿기는 믿어서 얼른 종교적인 반응은 빠르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일어나서 쓱쓱쓱 위에 싹이 나오니까 그걸 쳐다 볼 때는 ‘아, 저 사람 잘 믿는다. 저 사람은 참으로 진짜로 믿는다. 예수 믿는 도리를 받더니 그만 그대로 골골 반응이 나와 가지고 쑥쑥쑥 자라난다’고... 그런데 그 자라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뿌리가 깊지 아니해서 그 생명력이라는 것이 뿌리가 있어야 더욱 계속해서 지탱하고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일 텐데 그것이 없으니까 위로만 자라나는 거요. 당연한 현상인 것이오. 이것이 인간 생명의 당연한 현상인 것이오. 
어떤 데를 막아 놓으면 다른 방면에서 그만큼 보충이 될 수가 있어요. 그래 가지구선 점점 자라나니까 초기의 현상에 있어서 어떤 기간 동안에는 그가 다른 사람보다도 오히려 훌륭하고 똑똑하고 잘 믿는 신자같이 보이는 거요. 그러나 어떤 문제가 와서, 시험이 와서 부딪힐 때 그 시험에 넘어지고 인생 생활하면서 여러가지 종류의 시험을 다 받는 거요. 그런고로 그 시험을 받을 것 같으면 그 시험에서 그냥 넘어지는 거요. 이런 것이 ‘현세 신앙’이라 혹은 ‘임시 신앙’이라 이 두 말을 다 써요. 
보통 신학상 용어로 먼저 쓰는 것은 템포럴(temporal), 즉 현세적으로 템포럴 훼이쓰(temporal faith) 혹은 그것이 어느때는 템포러리(temporary) 임시적인 신앙이라고, 항구(恒久)하지 아니한 것이라 할 때는 템포러리(temporary), 그러나 보통 템포럴 훼이쓰(temporal faith)라고 하는 말을 써요. 이렇게 임시 신앙이라는 것, 혹은 현세적인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 그 사람이 신자라 그거요. 아무리 길어봐도 이 세상, 자기 사는 동안에 신자 노릇하고 사는데 그것으로도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고, 어려운 이야기지요? 
세상 사는 동안에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죽기까지 버린 일이 없는 사람인데 나중에 예수님 앞에 가서 알고 보니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그런 문제가 있어요, 그런 일이... 그런고로 우리들도 그 사람의 일생이 예수 믿는데서 안 떠났으니까 믿는 사람이지, 천당 갔다고 믿는 거지, 그건 아무도 얼른 분별하기 어려워요. 식별하기 어려운 문제예요.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경우라도 구원이 없을 수가 있다는 걸 이야기하는 거요. 
③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어떤 종교적인 능력과 사실을 믿어서 그로 말미암은 아주 특수한 희한한, 비상한 어떤 신적(神的)인, 종교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그 발휘하는 사실이 과연 종교적이고 정상적이다고 믿는 그러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그게 반드시 구원을 받는 믿음이 아니다고, 이런 종류의 신앙을 ‘기적 신앙’(miraculous faith)이라고 그랬어요. 기적을 믿는 믿음, 기적을 행하기에 필요한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신앙 태도, 그런 것들도 있지만 그것 반드시 ‘구원의 신앙’(the saving faith)은 아니다 그거요. 그래서 우리 주님 앞에 가보면 그것이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이오. 그런건 구원 신앙이 아니라고...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와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능력있게 일생을 종교인으로, 존경받은 종교인으로, 종교인일 뿐 아니라 종교의 지도자로서 매스콤도 그 사람을 유명자였다고 그 사람의 이름을 사방에다 퍼치고 사람들도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그러고 세상의 큰 대학도 그 사람을 훌륭한 신학자라 해서 그를 대우하고 이름을 내주고 그래요. 사람들은 많이 그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해요. 
옛날 중세기에 스콜라 철학시대에도 아벨라르(1079-1142. Abelard, Pirre:프랑스의 스콜라학파 신학자. 실념론<實念論;唯名論的 개념론>의 처지에서 이성의 존재 가치를 인정했음)같은 사람은 그 변설이 훌륭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매력이 있어서 유럽 사방에서 그가 있는 곳으로 공부하러 왔어요. 여러분 그런데 그 아벨라르가 어떤 종류의 신학을 가르쳤는지 알거요. 파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신앙은 다 파괴할 수 밖에 없고 최종적으로 의지할 것이 인간의 이성(理性)이라 하는 쪽으로 돌린 신학자요.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이름은 남아 있어요. 스콜라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유지하고 있어요. 세상은 그러는 거요. 그 사람의 진가라는게 하나님 앞에서의 위치를 보지 않고 인류 세계에, 인류의 지적인 세계에 어떤 공헌을 했는가를 가지고 따지는 거요. 이런 일도 있는 걸 여러분은 주의를 하세요. 대단히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할거요. 
그뿐 아니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다, 귀신을 쫓아냈다, 귀신을 쫓아낼려면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인 믿음이 독실히 있어서 “만일 너희가 믿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되었을 것이오 못할 것 없으리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있어요. 주를 믿는 구원의 신앙이 도저(到底)하면 그렇게 되리라는 말은 아니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구원의 신앙이 확호한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있었지만 한번도 그러한 이적을 행할 일도 없고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스스로 있다고 생각한 이도 아주 드물어요. 없어요. 
여러분은 어거스틴(Augustinus)선생이 언제 그렇게 병낫우고 다니고 기적을 행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러나 역사에 찬연(燦然)히 빛나는 위대한 지도자인 걸 다 아실거요. 참으로 구원의 도리를 그 시대에 벌써 천명(闡明)해 주신 선생인 걸 알거요. 그를 받아서 칼빈선생은 그 신학과 그의 큰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걸 조직하고 전파했던 것이오. 그러나 칼빈(Calvin)선생은 일찍이 누구에게 병낫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녔다든지, 그에게서 그러한 것이 상당히 어떤 정도 일어났다든지 하는 그런 기록은 도무지 없어요. 그런데 그런 구원의 신앙을 가져야, 기본적으로 가져야 그 사람의 병을 낫우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성경적인 말씀은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하는 말 한마디가 깨끗이 분명히 나오는 거요. 
예수님이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선언받은 그 사람이 이런 걸 잘 행했다 말이오. 행한대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런고로 이것은 구원 신앙과는 상관없이 별다른 종교의 법칙하에서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도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걸 가르쳤어요.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또 훌륭한 문명을 도입해 주고 훌륭한 사업을 하는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사람의 증거가 되느냐? 그것으로써 구원받았다는 현저한 또 안전한 증거가 아니다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해요. 
④우리가 만일 예수를 믿고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산다면 내 신앙을 검토해야 해요. 대체 내 신앙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렇게 해서 우리가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문제는 구원받은 자의 신앙, 구원의 실증으로서의 신앙, 이걸 보고 ‘구원의 신앙’(the saving faith)이라고 해요. 그 믿음을 대가(對價)로 해서 구원을 주시는게 아니라 구원이라는 사실이 단번에 하나님께로부터 그에게 임하니까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한번만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것, 뭐 오랫동안 씨름해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얻어가는게 아니고 단번에 주신거요. 어둠에서 있다가 빛으로 쑥 들어오는 거요. 회의, 방황,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상태에 있다가 ‘아, 그렇다’ 하고 들어오는 거요. 
이렇게 들어오는 정체는 분명한 것이오. 먼저 회의하고 혹시 그런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그런 것 같으다, 이런 걸 결국은 아니라는 거요. 그것 하나로 딱 그치면 아니라는 부류 가운데 짙은 것이 있고 옅은 것이 있고 있는 것 뿐이오. 거기서 이것은 요지부동하게 그것이다, 예수님은 요지부동하게 동정녀에게서 나셨다. 안 믿는다 할 것 같으면 그건 큰일 났다. 이렇게 지금까지 곧이 듣지 않고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강경(强硬)하게 주장하던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뒤집어져 가지고 전연 딴 사람, 딴 세계에 서 있는 사람같이 되는가? 이것이 유다서 3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말씀이오. 믿음이라는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되는 그것이 형태가 온전해지는 확실한 신앙, 과연 진짜 신앙이 되는 건 아니오. 
그러나 믿음이라는 것은 혹은 신학상 말하는 믿음의 씨, 쎄멘 휘데이(semen fidei)라는 말이 있어요. ‘믿음의 씨’라는 말은 그가 확실히 승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깐 그 다음에 오는 문제, 하나님 나라의 여러 경륜의 내용이나 하나님의 크신 약속이나 하나님의 크신 경영이나 이에 대해서 차례차례 자꾸 더 “아, 그렇습니다”하고 믿어가는 거라 말씀이오. 그런 의미로서 쓰는 것이지 쎄멘 휘데이(semen fidei)가 그 사람이 아직 구원받기는 부족한 것이지만 들어가 가지고, 조금 조금 커 가지고 어떤 시기가 지나니까 비로소 형체를 온전히 이루어서 그 사람에게 비로소 구원의 사실이라는게 발생했다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오. 원래 구원이라는 사실이 죽음에서 살아나는 건데, 죽은 사람이 스스로 자기 속에 있는 어떠한 것을 가지고라도 자기 생명을 회복 못하는 거고 죽은 사람에게는 외부의 능력이 들어가서, 생명으로 들어가서, 그 생명의 역사로 그 사람은 산 사람이 되는 거요. 
이와 같이 구원이라는 말을 그렇게 가장 기본적인 데서부터 이야기 할 때는 죽음에서 산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거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음에서 구원이란 것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뿐이오. 하나님께서 하셔서 산 사람이 되니까 그 의식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도리를 확인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제일 먼저 받고 확신하는 도리의 중요한 것들이 있는 것이오. 다른 말로 말하면 도리의 무엇이든지 다 금방 깨달아 가지고 확신하는 건 아니오.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에코노미(economy)를 건설하셨다. 막 들어온 신자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 잘 모르는 거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든지 참으로 죽음에서 다시 산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산 사람이란 걸 증거하기 위해서는 원래 그 사람이 죽은 사람일지라도 성신께서 그 사람의 속에서 하나의 역사를 하시는 거요. 어떤 말씀이 그에게 들어가서 역사하게 하시는 거요. 그러면 그 말씀은 무엇이냐? 복음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요. 복음이 들어가야 하는 거요. 
복음이 들어가서 성신께서 그 둔감하고 무능하고 죽어 있는 사람인 까닭에 무기능하고 그걸 매취(match)할 기능이 없어요. 사람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살았다고 할 그런 생명의 활동이 아니고 인간 생명의 활동인 것 뿐이오. 어떤 인간 생명의 활동 가운데에서 성신님이 역사를 하시면 어떠한 사실에 대해 그는 알 수 있게 되는 거요. 그에게 그러나 새로운 생명이 들어가서 구원의 사실이 즉 새로운 생명이 들어갔다는 건 죽은 그 사람이 산 사람이 되자마자 그에게 들어간 그 말씀은 성신님으로 역사하는 그 말씀은 비로소 그것이 진실이다, 진리다 하고 믿고 받는 거요. 그러기 까닭에 엄격하게 말하면 이게 신학적 론(論)입니다만 그 사람이 언제 새로운 생명을 받았는가는 우리가 아무도 규정할 수가 없어요. 내가 예수 믿는 도리를, 복음의 기초를 처음으로 그에게 이야기했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이 새 생명을 받았다고 우리가 단언 못하는 것이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도 듣지 못할 사람도 많은 거요. 
복음을 전해도 다른 말 아니고 그 사람이 구원의 신앙을 실증할 그 신앙의 고백의 내용이 담긴 복음을 내가 먼저 전해도 못알아 들을 사람이 있는거요. 의식이 없는 사람은 못알아 듣는 거요. 그러면 의식 없는 사람은 다 구원받을 수 없다, 어린 아기들은 그런 까닭에 구원받을 수 없다, 절대로 그런 것 없어요. 주께서 누구든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건지시는 거요.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거기에 대해서 엄격한 규제를 했어요. 정상한 의식을 가지고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달되면 그것을 거부했는 데도 하나님이 그를 부지불식간에 언제 구원하셨다고 말 못하는 것이오. “아, 아마 구원을 하셨겠지, 하나님이 아마 천당으로 보내셨겠지” 하고 죽은 다음에는 그 사람이 평소에 그런 태도가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욕망이고, 사실은 언제든지 정상한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복음이 전달될 때 그 복음에 의한 어떤 작용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없는데도 구원받았다고 못하는 것이라고... 
이 사람의 말은 복음이 들어가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특수한 경우 뿐이오. 어린 아기들이나 아주 완전히 폐인이 된 사람들, 그것이 우리로서 복음을 이해할 아무런 의식 작용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 그래요. 즉 완전히 듣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해 가지고서는 마냥 누워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전달할 길이 없는 것이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아, 구원은 절대로 못받았다”고 우리가 단정은 않지만 그런 사람은 보통은 살아 생전에 의식이 활동하던 때가 있는 것이오. 의식 활동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항거를 했다는 건 어떻게 보자면 그 사람은 현재 일생을 마쳤다고 보는 것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의식활동이 그에게 현저하게 없을 때는, 다만 하나의 생물로 존재한다는 정도 밖에 없을 때는 그 사람이 사람다웁게 의식활동을 못한 때가 그 사람의 인생은 끝난거요. 그 때에 항거를 했으면 항거를 한 사람이오. 그 사람에게 갑자기 하나님이 의식활동이 없는 동안에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구원한다는 것을 우리가 장담하거나 주장할 근거는 없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반드시 멸망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그 신비와 하나님 사랑의 그 거룩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은 그렇고 지금 우리가 생각할 때는 특별히 우리들이 믿는 사람으로 가지고 있는 신앙을 주의해서 검토를 해야 해요. 이 생명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중생의 그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걸 이야기했는데, 씨 뿌리는 비유를 하나 예로 들어 보자면 그 씨가 들어가서 어떤 사람은 길 가, 어떤 사람은 돌밭, 어떤 사람은 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옥토, 옥토에서는 좋은 열매를 내요. 이 비유에서는 씨를 가지고, 씨가 우열이 있고 다소가 있어서 그랬다는 의미는 조금도 없어요. 다 동일한, 다 동일한 기회를 주고 동일한 정도의 씨가 들어가서 충분히 거기에 반응이 일어날 수 있게 한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시는 거요. 
또 거기서는 그 씨가 들어가서 그 꽃을 관상할려고 심지 않았던 것도 말씀에는 없지만 한 엑시옴(axiom)으로, 한 공리로 알고 있는 거요. 왜 씨를 뿌렸느냐? 그것은 열매를 거둘려고 뿌렸다. 그런고로 열매를 필연적으로 예상하는 거요. 그러면 열매맺기 위해서 필요한 씨는 들어갔으니 책임은 그걸 받아들이는 밭에, 토양에 있다는 것, 토양과 그 밭의 상태에 있다는 걸 가르쳤어요. 그러면 이런 경우에 그 씨는 무엇이냐 할 때에 그 씨에 대해 성경은 각각 세 복음이 따로 따로 이야기를 해 놨지요? 
씨에 대해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누가복음 8장 11절에는 씨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이야기했지만 또 다른 마태복음에서는 천국 말씀이라고 그랬어요.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말씀이라고만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천국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특별히 주의하세요. 성경에 있는 말, 편언척구(片言隻句)도 곧 그것이 천국 말씀이다 하면 말씀으로 하나의 의미로 구성하지 않고 단어의 개념만 전달하는 것은 부족한 것이오. 그런고로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 할 때 복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러면 복음이란 무어냐 할 때에 복음이란 예수라, 이러면 말이 성립하느냐 하면 말이 성립 안되요. 
‘예수’라는 말이 분명히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만일 히브리 말로 예슈아(העושׁי)하면 ‘구원’이라는 말이오. 그래서 그걸 헬라 말로 예수(Ίησους)라 했는데 그렇지만 혹은 또 어떠한 한 인물을 우리 주님이신 그 분을 표시하는 그의 성호다, 이름이다 하면 예수의 이름 하나만 듣는 것으로 사람에게 구원받기에 넉넉한 모든 복음의 내용이 들어갔다고 못하는 거요. 또 “예수님, 예수님” 하고 부르기만 하면 그래서 그 사람은 구원이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말을 만일 교묘하게 이용해서 다 그런 말을 써 가지고 그러면 네가 몇번을 불러라, 한 번 여기 서울에서도 사도신경을 외시오. 사도신경을 1000번을 외면 큰 은혜가 있다고 해서 그래서 매번 앉아서 사도신경을 자꾸 그냥 거의 반사적으로 외는 것을 내가 보았어요. 불교 같으면 그런 짓을 할런지 몰라요. 유교 같으면 독서 천경이면 대의 자통(讀書 千經이면 大義 自通)이라 해서 그래 가지고서는 천번 책을 자꾸 읽어서 그 책술이 다 떨어질 정도로 읽을 것만 같으면 거기서 큰 뜻은 자통하는 것이다고, 그렇지만 그런 형식적인 얘기로서 구원의 신앙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구원의 신앙이 어떤 사람의 속에 확실히 들어가서 그 신앙의 사실로서 표백이 될려면 믿는 내용이 있어야 해요. 무엇인가를 믿어야 나는 믿는다 하고 믿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자기가 그걸 믿고 사는 거요. 그 믿는 내용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오. 이렇게 해서 구원의 신앙에는 그 믿는 내용이 있어서 그것을 자기가 알고 믿고 있어야 하는 거요. 그것은 어떤 최소한도의 필요한 것들이 거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요. 이걸 가리켜서 구원의 신앙의 첫째의 중요한 요소라고 그래요. 안다는 거요. 모르고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니오. 
한국 교회에서 과거에 예수 믿고 천당에 간다는 정도로 복음 전도를 하는 일들이 있은 걸 이 사람이 잘 압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것으로 구원에 족한 좀 더 지적인 내용이 되느냐? 말하자면 구원의 신앙의 지적요소가 되느냐? 충분하냐? 하면 결함이 많고 빈곤하다, 그걸로 절대로 구원의 신앙이 되는 지적 요소가 안되는 것이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예수님 믿으면 천당 갑니다 하면 그 사람이 그 구원의 신앙을 가졌다는 그런 신앙의 고백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요. 세례문답을 할 때에 할머니, 예수님 믿으시죠?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고 해서 믿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무엇을 믿으세요?’ ‘그저 믿으면 천당 간다니까 그냥 믿습니다.’ 그래도 세례가 됩니까? 안되는 거요. 그러기 까닭에 그 할머니가 교육을 못받았다 해서 그 할머니를 무시해서 바로 안가르쳐줘서 그러는 거요. 
이와같이 교회가 자기 스스로 자학하는 태도나 스스로 자포하는 태도나 그리고 무식이라도 좋다 정성만 있으면 된다는 종교감정주의나 이런 것으로써 꾸려가겠다면 구원하고는 먼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항상 주장한 것은 성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바 논리의 형식, 사고의 형식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이성의 빛을 밝게 해서 항상 성신님을 의지하고 성신님의 비취심을 받아서 새로운 전제를 받으면 이렇게 해서 그 전제에 의해서 그 다음에 논리를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바 사고의 형식이라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어떤 중요한 진리의 사실이 하나의 전제가 될 때 거기서부터 다시 논구해 나가는 거요. 
이것을 사람은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이라. 이것을 구원받은 새사람은 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은혜주신 것이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논리성이 밝고 아무리 지적인 능력이 우수하다 하더라도 ‘그것 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거요. 그런 걸 믿고 자기의 경험에 의해서 확증하는 것만을 중요한 것으로 하고 그 나머지는 항상 희미하고 할 수 없다는, 이런 태도 취하는 것은 결코 교회의 신앙 발전에 좋지 않다 하는 주장을 해 왔어요. 
주로 이것을 주장한 사람들이 과거의 종교 개혁시대의 라틴 계통에 많은 학자들이예요. 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아주 현저한 인물이 요한 칼빈이오. 그는 라틴계사람, 불란서 사람이오. 그가 일하기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일을 했어요. 그건 그 이외에도 그의 제자로 임종할 때도 그의 곁에서 끝까지 지켜보고 그의 팔에 누워서 칼빈 선생이 임종을 했는데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ga)예요. 칼빈 선생을 제네바에 심어 놓은건 윌리엄 화렐(William Farrel)이오. 그리고 또 칼빈 선생하고는 같은 연갑 사이지만, 연배이지만 스코틀랜드에서 멀리서 찾아와 가지고 그 앞에 꾸준히 상당한 기간 공부를 하고 그이한테 배우고 가서 위대한 일을 이룬 건 요한 낙스(Johan Knox)예요. 이게 종교 개혁에 특별히 개신교의 대선배들, 지도자들인데 오늘날도 제네바에 갈 것 같으면 옛 제네바와 새 제네바, 이 제네바 대학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이게 큰 절벽과 같이 깍아 자른 돌이 있는데 돌에다가 부조들 릴리프(relief)해 놓았어요. 조각들 껍데기만 앞면만을 부조를 쭉 네 분이 서 있는 것이 부조되어 가지고 있어요. 이것을 리포메이션 마뉴먼트(Reformation monumant)라고 종교개혁 기념비다 해서 그것 그 사람들이 이룬 중요한 일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항상 종교의 중요한 문제를 자기가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한다든지 혹은 자기 스스로 어떤 신비한 능력에 의해서 자기가 말을 할 수 있다든지 마음 가운데 감정의 포화(飽和)를 얻는다든지 이러한 여러가지 주장을 해 가지고서 일을 그르치는 여러 교파라는 것이 많이 있어요. 또 무슨 이상한 것이 표현되어야 한다. 가령 말을 이상하게 해야 하고 방언을 해야하고... 그런 것 하는 속에서도 개혁교회는 꾸준하게 말씀을 바로 깨닫고 말씀의 존중성을 항상 높이고 그것이 구속의 은혜의 방도로서의 권위를 항상 제고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대한 고전으로나 경전으로나 신학의 원천으로 그냥 가두어 놓은 태도를 버리고 나가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요.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의 특성이라는 것은 항상 말씀에다 주력을 하고 그걸 잘 배우고, 배우기 위해서 성경만 자꾸 외고만 있으면 되는게 아니니까 성경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여러가지 것들을 자꾸 흡수해서 모든 지식이 결국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으로 귀결하도록 하도록 칼빈 선생 자신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귀결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늘 주장을 해 오는 대로 이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 때 첫째의 ‘지적 요소’라는 걸 절대로 소홀히 생각하지 말라 그거요. 기도로 그것이 대충되는 것이 아니고 찬송만 하고 있다고 대충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열심으로 나오고 열심으로 심방하고 종교감정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말끝마다 하나님 하나님 부른다고 그것 대충 안되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고 믿어야 할 것을 분명히 다 쥐고 있어서 그것을 떨어뜨리지도 말고 그것이 더욱 더욱 증식하도록 해야 할 것이지 빈곤한 상태에 있지 말아라 하는 것이오. 
그렇게 골치 아프게 자꾸 성경공부를 하고 그것 뭐 그런가? 하고 캐고 그래가지고 무엇을 터득하고 그것보다는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마음에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을려고 그러고 어떤 종교의 황홀경이나 삼매경(三昧境)가운데 이르겠다는 이런 인간 종교적인 추구를 용인않는 거란 말이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기가 깨달아 가지고 정상하게 점진적으로 장성하기를 마치 정상식을 먹고 늘 장성하도록 늘 요구한 것이지 갑자기 굶고 살아가다가 갑자기 어떤 잔치를 먹고서는 배가 불렀다고 이런 것 않는다. 이런 것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고... 이렇게 해서 우리 한국에서 돌아다니는 부흥이라는 걸 절대로 않는 거요. 부흥회라는 것이 별로 그렇게 유익을 끼치지 않는 걸 알고 오히려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이 된다고... 정상으로 배워라 그런거요. 마치 정상으로 밥먹고 살아가는 거와 같이 하란 말이오. 이런고로 종교의 지적 요소라는 걸 주의해라 했어요. 구원의 신앙의 이 지적요소라는 것, 이것을 특별히 존중해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구원의 요소의 지적 요소 그것만으로 전부는 아니올시다. 
먼저 개괄적으로 말하면 ‘정서적인 요소’라는 게 있어요. 이 지적요소를 학적 이름으로는 라틴말의 노티티아(notitia)라는 말을 쓰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건 어센수스(assensus), 이게 정서로서 그것을 아! 그렇다고 가서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가서 팔에 매달리듯이 매달리고 그것이 전부로 알고 딱 잡는 그런 강렬한 정서, 신성한 정서, 신앙의 정서가 움직이는 거요. 신성한 정서가... 이 신성한 정서라는 것은 여러분 이 말이 그때 있는 말이오. 일찍이 칼빈 선생이 쓴 재미있는 말이오. 그건 ‘거룩한 불만’이라는 것과 함께 늘 움직이는 것이오. 마음에 불만이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 불만족한 거요. 그런고로 그런 거룩한 불만이라는 것도 신성한 정서라는 것이오. 
그러나 그건 소극적인 면이고 적극적으로는 거기가 매달리는 이런 정서인거요. 그러니까 나의 고백의 형식으로 봐서는 그냥 그렇습니다 하지 않고 아! 과연 그렇다, 이렇게 느끼는 거요. 이 느끼는 느낌으로써 하나님을 아버님 하고만 부르지 않고 아바(ΑΒΒΑ)하는, 이런 말하자면 강렬한 자기의 애정과 거기에 그냥 꼭 매달이는, 어린아이가 매달리는 거와 같은 그러한 심정의 표현이 있는 거요.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아바라는 말이 그렇게 해서 나왔어요. 이러한 거룩한 정서라는 것이 우리가 앎에 따라서 움직이는데, 이 거룩한 정서라는 건 심리적으로 말할 때에는 인텔렉츄얼 필링(intellectual feeling)이라는 말을 쓰는데 ‘지적 감정’이다. 이 지적 감정이라는 말이 지적인 까닭에 그 지식이 변동되어 버린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만일 그것이 항구한 사실에 대한 자기의 인식이라 할 것 같으면 그 정서도 항구한 것이오. 
이렇게 해서 지적 감정이란 항상 지속적이고, 여러분 아마 다 잘 아시겠지만 이 사람이 여러번 썼으니까 그것을 뜻 정(睛)자 하고 잡을 조(操)자를 번역해서 지금 요새 한국에서 뭐라고 번역했는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런 뜻 정(睛)자, 잡을 조(操)자라 해 가지고 번역해서 쓰던 것이 있어요. ‘정조’라, 이건 곧을 정(貞)자, 잡을 조(操)의 정절(貞節)을 표시하는 말이 아니고 이 뜻 정(睛)자, 잡을 조(操)자를 가지고 영어로 말할 때 센티멘트(sentiment), 센티멘탈(sentimental)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센티멘트(sentiment) 지적인 감정이 여기는 늘 지속하는 거요. 예수님께 대한 내 사랑이라든지 내 의지라든지 든든함이라든지 또 하나님께 대해서 턱 매달리고 늘 살고 싶은 그런 심정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지속하는 것이오. 지속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오. 그것이 순정적인 것, 진짜라 그말이오 그게. 제누인(genuine)하다는 것 그것이 가짜 아니고 진짜라 그거요.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의 어떤 태도가 있는 것이오. 태도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오. 그래서 거기 정절도 있는 것이고 순결이라는 게 있어요. 하나님 앞에 늘 지속하는 것이오. 그것이 막 갑자기 요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때에 따라 우리에게 컬컬함이 있고 주님이 절실히 나에게 지금 같이 있어서 위로를 해 주셔야겠다는 감정의 결핍, 다른말로 말하면 어떤 거룩한 불만이 생길 때에 채워 주시기를 원할 때는 갑자기 가서 더 간절하게 되는 거요. 그러나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요동하지 않는, 기본적으로는 늘 바닷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거룩한 정서, 정조(睛操) 가운데에 움직이는 것이오. 이런 것이 어쎈수스(assensus)라는 것이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구원의 신앙의 상태를 우리가 분석해서 생각할 때에는 제 3의 중요한 요소가 있어요. 제 3의 중요한 요소라는 건 피두키아(fiducia)라 하는 라틴 말로 표현하는 건데 왜 이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신학상 정립된 용어가 없든지 그것이 불분명해서든지 말을 함부로 쓰던지 하는 것을 항상 바르게 잡기 위해서 우리 교회의 교우들은 만일 잘 몰라도 한마디 썼을 때에 거기는 정확하게 이걸 표시하는 것이다고 아시라는 거요. 이 사람의 말하는 것은 ‘의지적인 요소’지만 보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런 의지적인 정도에서 떠나서 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오. 그래서 피두키아(fiducia)라고 해요. 그런데 제일 중요한 명확한 그 표현이라는 것이 인생 생활 표현이라는 것이 이 피두키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쎈수스(assensus)에서 나오는 건 아니오. 어쎈수스라는 정서적인 요소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을지라도 그런다고 다른 사람 앞에 그것이 현저하게 이상한 걸로 늘 나오는 것은 아닌거요. 여전히 평상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정상적인 태도를 취하고 정상적인 의식 생활을 하는 거요. 
그러나 피두키아에 있어서는 늘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하면 그의 의지가 “이게 이 길이다. 누가 뭐라 해도 요지부동하게 나는 이 길로 간다” 하는 그 일종의 고집같은 것, 확고부동한 것, 그리고서는 타협하지 않는 이것이 나오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 집에서는 “너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 다음에 요렇게 요렇게 해서 사회에 나가서 이렇게 활동하는게 좋겠다” 해서 그 출세의 길을 생각해 가지고 거기로 가도록 하고 누가 주선해 줘서 좋은 자리 준비하고 했는데 자기 마음 가운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고 가령 무엇하나를 확신했다고 합시다 하면 “확신했어요. 내가 확신을 했지만 내가 아직은 어린 사람이니까 아마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으니까 주위에 선배들과 부모와 여러 사람들이 소원하는 데로 따라가는 것이 옳겠다” 하고 따라 갈 수가 있어요.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말이오. 
만일 어떤 사람이 참으로 구원의 신앙이 있어서 구원의 신앙 가운데 나온 지적인 요소의 작용으로 이 길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확신했으면 요지부동하게 그리로 가는 거요. 남보기에는 저렇게 갑자기 고집쓰는 사람은 처음 봤어. 아, 이렇게 다 좋다는데 왜 저렇게 부득 부득 저렇게 인생의 불행의 길로, 좁은 길로 저렇게 기어 들어간단 말이냐고 남들이 다 그 사람이 어리석은 것 우직하다시피 한 그걸 타매(唾罵)할지라도 아무 상관 않는거요. 이것이 믿음의 행동이라는 것이오. 의지적으로써 어떤 태도를 취하는 거요. 그 태도는 제일 중요하게 인생의 행로에서 먼저 결정하는 것이오. 내가 내 생명과 내 나머지 생활이라는 걸 어디다 바치느냐, 나는 이 길이라고 믿고 나가는 것, 이런 것이 있어야 구원의 신앙이 있다는 증거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이래서 야고보서는 그렇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그랬어요. 야고보서 2장 17절을 보십니다.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그랬어요. 그리고 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게 어떻게 구원의 믿음이냐 그말이오. 
만일 네가 이런 쎄이빙 훼이스(saving faith), 구원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구원의 믿음을 실증하는 그 피두키아의 구체적인 열매가 네 생활 행동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 믿음이라는 것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구원의 신앙이 되겠느냐? 그것이오. 이렇게 딱 힐문을 했어요. 마지막 구절을 볼 것 같으면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구원의 신앙은 그게 행함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라야지... 그 행함이라는 것을 오해해 가지구서 자기의 그 종교적인 절차를 밟는 것을 행함으로 생각해선 안되요. 
기도하는 것도 크게 말할 때 인간 생활의 행동이겠지만 형식적인 절차인 거요. 다른 말로 말하면 수단인 것이오. 기도라는 건 기도하는 내용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걸 받을려고 하는 방도지 그것이 최종이 아닌거요. 기도를 많이 했으니까 하나님이 듣든지 안 들으셨든지 나는 3년 동안 엎드려 기도했으니까 됐다? 요런 이상한 종교의 공로감 같은 것을 대치하는 이건 없어야 한다 말이오. 그런것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오. 여러분이 기도를 열심으로 할 때는 열심으로 안했을 때보다는 내가 열심으로 했으니 하나님이 이제 들어주시겠지 한다면 그것이 공로감이라 말이오. 속으로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듣는다? 그래 누구 이름으로 누구의 공로로 기도했느냐? 예수의 공로로 기도했지, 내 열심이라는 공로를 보시고 들어줍소서 했느냐? 하고 꾸짖어야 하는 거요. 그런것이 벌써 사람의 종교로 타락한 것이라는 말이오. 
참된 구원의 신앙이 있을 때에 행동은 필연적으로 거기에 따라가는 거요. 행동은 필연적으로 따라가는데 그 행동이란 건 절대로 이런 종교적인 어떤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태도는 좋지 않아요. 신앙과 목적을 뒤섞어 놓고서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무슨 의미를 가지나요? 열번이고 백번이고 은행에 가서 돈을 꾸려고 해도 못꾸었으면 백번 다닌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한 번 다녔어도 꾸어 내왔으면 그것 의미를 가지는 거요. 이와같이 수단이란 건, 행동이란 건 방도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거요. 효과를 안내면 의미가 없는 것이오.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하고 자선을 하고 뭘 하지만 그것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느냐? 루터 선생은 일찍이 카톨릭의 그런 인간의 공로, 인간의 고행과 자선에 대한 것을 가치로서 인정하는 그걸 맹공격했다는 걸 여러분 아실거요. 이런 걸 주의해서 항상 믿음에 있어서는 어떤 행동이 중요하다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 행동이란 먼저 자기의 생의 문제부터 바로 생각하는 것이오. 가기는 내 마음대로 가고... 이 사람이 잘 쓰는 예가 있지요. 동쪽으로 가고자하는 사람이 배는 서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 앉아서 큰 기선 150m 나 200m되는 이런 큰 긴 기선의 갑판 끝터리에서 “나는 동쪽으로 가니까 동쪽으로 갑니다” 하고 걸어가 봐도 한계가 있고 배는 서쪽으로 가고 자기도 서쪽으로 가고 만 것이다고... 그렇게 인생의 길은 자기 마음대로 놓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겁니까? 저겁니까? 하고 지엽(枝葉) 말단(末端)의 문제나 대단히 그 기본적인 문제 아닌 것 가지고선 하나님 한테 가서 은혜 주십시오, 인도해 주십시오, 보여 주십시오, 이게 무슨 짓인가 말이오. 생은 제 마음대로 거두어 놓고 생활 행동에 있어서는 불리하게 생긴 건 인간 지혜가 없으니까 지혜를 좀 보태주십시오 하는 거요. 이렇게 아주 공리적이라 말이오, 이기적이다 말이오. 그러고서 예수 믿는다고 말을 못하는 거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고 구원의 신앙을 가졌으면 자기라는 것이 없어져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오.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은 없어졌다. 이것이 그 구원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큰 요소들의 첫째입니다. 다음 시간에 우리가 그러면 지적 요소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그것부터 우리가 또한 생각해 나갑시다.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께서 저희에게 주신바 구원이 크고 큰데 구원이 항상 정순(正純)적인 것으로서 우리 안에 진짜로 늘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 위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이 참되고 능력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우리에게는 충만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늘 느끼고 살아야 할 것이고 가외의 상태나 모호한 상태 가운데에서 저희가 그렇거니! 하고 지내는 것이 바르지 아니한 것을 이제 생각하고 저희의 구원의 이 믿음이라는 것이 확호한가 여부에 대해서 스스로도 판단하며 또한 거룩한 도리가 가르치신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확증으로서의 신앙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기 위해서 이제 저희가 상고했사오니 저희 마음 문을 여시고 바로 깨달아서 이 거룩한 도리에 확호하게 서게 하시고 구원의 확실한 사실 위에, 터 위에 서서 활동하게 하시고 막연하게 종교 감정이나 종교적인 규제 가운데에서, 교조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릇됨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구원의 신앙 2 
로마서 1장 16-25절(1982. 2. 14) 
지금 우리는 이 개혁교회가 거두어 놓은 믿음의 종류를 그 전통적으로 분류하는 대로 4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나가는데 첫째는, 역사를 믿는 거와 같은 믿음, 소위 역사신앙(historical faith)이라는 것이오. 둘째는, 이 현세적인 신앙(temporal faith)이라는 것, 그런고로 항구한 것이 아니고, 구원의 확실한 증거로서 표백된 것이 아니고 어떤 종교를 표현하는 그런 신앙이올시다. 셋째는, 기적을 믿고 기적을 행할 때에 필요한 신앙(miraculous faith),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다 구원의 신앙(the saving faith)이 아니다. 역사 신앙과 같은 건 처음부터 구원의 신앙과는 대단히 먼 것이올시다. 현세 신앙이라는 것도 물론 아니고, 기적 신앙이라는 건 꼭 기적 신앙 그것 자체만 꼬집어서 말 할 때는 구원의 신앙과는 질이 다른 것이올시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기적을 행할 수도 있고 행한 예가 많이 있습니다만 구원을 알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구원의 신앙 자체를 마치 위대한 신앙의 사실로 우리가 정할 때는 기적 신앙은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표시하는, 또한 그 구원의 사실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한 증거로서 우리 안에 일으키신 단번에 주신 믿음이라는 건 어떠한 것인가? 라는 것을 지난 주일부터 우리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주일에 대략 이야기한 까닭에 반복치 않고 세 가지의 요소로서 나누어, 물론 세 가지의 요소가 유리되어 있는 건 아닐지라도 서로 합해서 활동하는 것이지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편리하게 거기에 독특한 요소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 있다 하는 것을 먼저 이야기했어요. 그 세 가지 요소는 첫째가 지적인 요소(notitia)이고, 둘째가 정서적인 요소(assensus)라 그랬고, 셋째가 의지적인 요소(fiducia)라고 그랬어요. 사람이 보통 심리학에서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고 나눌 때 혹은 지(知)라든지 정(情)이라든지 의(意)라는 것으로 나누는데 그런 세 방면으로 뚜렷한 그런 인격적인 활동을 구성하는 이 세 개의 요소가 여기 신앙이라 구원의 신앙이라 하는데도 잘 드러나 있다 그것이오. 
이것을 좀 풀어서 쉽게 한 번 생각하면 구원의 신앙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구원받은 믿음을 가졌다 하는 것이 증명이 될려면 그 사람은 어떠한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것이오. 아무 것도 없이 또 있다는 것이 대단히 빈곤하고 큰 의미를 형성하지 않은 단편적인 것, 편언척구(片言隻句)에 불과한 근거 밖에 없는 것들은 그것으로는 구원의 신앙으로서 심히 부족하다 하는 것이오. 그 다음에 그 구원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어떠한 기본적인 정서 상태, 정조(睛操)라고 그랬지요? 센티멘트(sentiment)라는 것이 있는거라고. 그것 없이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인 열정을 이 세상 사람 보기에 발휘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구원의 신앙이라고 그 종교적인 열정 때문에 평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거요. 
그리고 이 정서적인 요소라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의지가 없어서, 혼자 어쩔 줄 모르고 금방 울음이 터질듯한 아기에게 어머니가 나타날 것 같으면 어머니의 힘이 크고 적은 것을 헤아릴 것 없이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들어서 그에게 안기고 그 품에 있을 때 어머니가 마치 태산보다도 더 강한 것같이 여겨서 거기에 고요히 안식을 할 수 있는 것, 이러한 정서적인 사역 혹은 역사라는 것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또한 특별히 인생의 행보 가운데에 있는 환난이나 질고나 어려움이나 거친 역경이나 모진 비나 이런 여러가지 것을 사람이 만났을 때에 피난처를 구해 나를 감싸주는 튼튼한 산성과 같은 보루를 구할 때에 거기에 정서적으로 강한 요소가 발휘되는 것은 ‘내 주는 강한 성(城)이다’ ‘방패가 된다’ ‘병거가 된다’ 이와같은 심정이 자연히 나오는 것이다 그거요. 
구원받지 않는 사람은 그런 때에 어디가면 살까? 하고 당황하고 혹은 신에 대해서 무슨 상념(想念)을 가졌으면 빌어도 보고 하지마는 마음에 안심하거나 의지해 버리지 못하고 다시 그 당황하고 괴로워하고 다시 어쩔 줄을 모르고 방황하고 그러는 것이오. 그런데 참으로 구원받은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직 미흡한 까닭에, 때때로 생각이 흐려져서 잠시 당황하는 일이 있더라도 만일 그의 지적인 요소가 넉넉했다 하면 정서적인 요소라는 것도 자리를 차지하고 회복하는 거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러 이러한 하나님이신데, 이러 이러한 나의 주님이신데 나를 버리실 이유도 없고 내가 그를 의지해서 실패할 리 없다’ 하고서는 전부를 맡겨버리고 의지해 버리는 것이오. 그런데 그렇게 의지했을 때의 심정, 감정이라는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꽉 부여잡는, 아기가 어머니를 그 외로운 데서 금방 울음이 터질듯한 그러한 환경에 있다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에 확 부여잡는 것과 같은, 강력하게 부여잡으면서 ‘아! 이제 살았다’는 이런 안도하는 그것이 어센수스(assensus)라는 말로 표시를 했어요. 어센수스. 
이러한 정서적인 요소만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강렬하게 움직이는 것이 의지적인 요소라는 것이오. ‘나는 이리로 간다’ ‘네가 뭐라고 해도 천하 사람이 뭐라고 해도 그래도 나는 이리로 간다’고, 본래의 자기의 길을 자기가 한 번 비췸을 받고 ‘그것이 진리다’ ‘이것이 바르다’ ‘이것이 참으로 나를 내신 본래의 본의에 합당하다’고 할 때 변동 없이 그냥 밀고 나아가는 그 마음의 강렬한 요구, 이런 의지, 그것이 그리고 ‘거기의 일은 다 주님께 맡긴다’ 앞길은 우리가 다 모르는 사람이오. 그런데 모르는 앞길을 향해 전진하니까 불안한 것이 많지만 그 불안이 없어지는 안도라는 것은 정서적인 요소지만 그 불안이 없어지게 자기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첫째, 대상에 대한 지식이 그만큼 넉넉했고 둘째, 그 대상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나 의지하는 심정이 그만큼 넉넉한 까닭에 명확하게 방향을 정하고 자기가 나아가는 것이오. 그것이 가장 현저하게 대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오. 자기가 주님께 대한 사랑이나 안도의 기쁨이나 주님 앞에서 얻는 그 평안한 안식이나 이런 건 대단히 주관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보아서 자세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마는 인생의 길을 정해서 자기가 나아가는 길은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입에 낼 수 있는 길이 아닌거요. 
자기의 일생을 거기다 던져 내버리고 나아 갈 수가 있는 것이오. 그리고 누구든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구원의 신앙을 가졌다 하는 것이라면 그 생(生)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나아가는 것으로 그 인생을 규명하지, 그것 없이 종교만 가지고 돌아다닌다고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오. 생에 대한 어떠한 태도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오. 그의 일생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 다 맡겨버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뜻을 따라갈려고 그 방향으로 딱 서서 전진하는가 물었을 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라든지를 모두 다 잘 아는 것은 아니오. 신앙의 정도가 그걸 다 잘 알만큼 성숙하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는거요.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신앙은 아니다고... 그러면 그런 경우에는 그러니까 자기의 길을 자기가 결정하고 나가도 좋으냐 하면 그런 법은 없어요. 
이럴 때에 늘 주의해야 할 것은 구원의 신앙이 있는 사람은 ‘내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내 길을 보이시는 대로만 가겠다’ 하는 강렬한 마음의 요구로 미치지 못할 때는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 하는 말을 절실하게 믿는 거요. 그런 데에 구원의 신앙이 그러한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직접 움직일 때에 필요한 신앙이고, 신뢰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까닭에 지혜를, 그의 지혜를 반드시 주신다는 이 약속을 신뢰하는 까닭에 지혜를 구하는 것이오. 지혜를 구하고 그 다음에 그 지혜에 대해서 ‘혹시 주실려는가 안주실려는가 모르겠다. 안주시면은 어떻게 할까? 안주시면 최악의 경우에는 이렇게 해야지.’ 소위 이런 리저브(reserve)라는 걸 뒤에다가 하나 두어두고 그렇게 하는 그런 신앙은 아니라는 거요. 두 마음을 품어서 정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오직 하나요. 
‘하나님이 아니주시면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는 상태에서 신앙의 자세에 있어서 기다림이라는 것도 중요한 것이오. 주께서 보여주시면... 혹은 모색하고... 모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기도하고 마음 가운데 컬컬함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기다려서 주께서 한 발 한 발을 보이시는데 이건 주님이 보여주시는 한 걸음이다는 것을 확인하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오. 그러고선 자기가 적당히 자기 리저브(reserve)로, 자기 자신의 꾀로 만들어내고 ‘아,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시는 길이다’고 구실을 붙이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이런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주님이 보여주시는 확실한 길에 대해서는 첫째, 주님께 대한 자기의 지식여하가 얼마만큼 되는가의 여하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척도를 주는 거예요. 주님께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그것 판단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맨 처음에 오는 것이 지적 요소인 것이오. 그리고 주님께 대한 자기의 지식이 즉 주께서는 어떻게 하신다. 주께서는 무슨 일을 하실 때는 어떻게 하신다는 걸 경험으로나 말씀을 배운 데에서 알면 그 아는 걸 거기다 적용을 해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자.’ 실험을 해보는 거요. 자, 여기에 맞는가?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렇게 하시는데, 주님의 뜻은 이러한데 거기에 맞는가? 이렇기 까닭에 주의 큰 뜻이라는 걸, 내게 직접 접촉되는 하나 하나의 인생 행로의 뜻을 알려거든 주님의 크신 뜻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그랬어요. 주님은 원래 이런 큰 경영과 계획과 뜻을 가지시고 우리를 대하시는 까닭에 다른 소소한 뜻, 나 개인의 개개한, 세세한 뜻은 큰 뜻에다 묶어서 항상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그걸 모르고 큰 걸 모르고 적은 것만 알고 해서는 알아질 길이 없어요. 그러기 까닭에 이렇게 해서 주의 뜻을 알면 한 걸음만 알더라도 또 대체로는 한 걸음이오. 그 한 걸음 보이시는 대로 가는 것이오. 그 다음은 주께 맡기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아주 정상적인 생활 자세인 거요. 
그 다음의 문제, 그러면 이제 개론적인 것을 지난번에 이야기하다 만 걸 다시 한 번 간단히 반복을 했는데, 다시 오늘 우리가 생각할 건 그러면 그 지식의 문제요. 구원받은 신앙에 대한 생각을 할 때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에 지적 요소, 지식이라 하는 말, 그런 말을 거기 써요. 그러면 이런 지식, 신앙의 지식에 이 구원받은 신앙의 요소로서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의 성격은 무엇이냐 할 때에 그 안다는 것이 첫째는 확실한 것이다는 거요. 첫째는 ‘글쎄요, 그런가 보다’ ‘그렇다 더라’ 이렇게 안하는 거요. ‘ 그렇지 아니하면 아니된다’‘반드시 그렇다’ 자기의 문제에 이해를 붙여 가지고서 그렇게 되기를 강력하게 바라는 의사 표시를 할 때 반드시 ‘그렇지 아니하면 아니된다’고 하는 그런 억지는 아니오. 
사람은 거기에 대한 확인도 없고 확실한 인식이 아직 발생하지 않을 때라도 가장 강력한 희망을 표시하기 위해서 ‘예,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는 말을 하기가 쉬워요. 흔히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면 그러한 말을 잘 써요.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고 믿음을 다지는데 그 진짜로 그러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 그런 사람도 있는 걸 봤어요. 그걸 알게 된 이유는 그 사람이 그 다음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에 그것이 자기의 가장 강렬한 희망의 표백이지, 확실히 아주 안도하고 거기다 맡겨버리는 신앙의 표백이 아닌 것이 차츰차츰 드러나는 경우를 보게 되는 거예요. 문답을 해 볼 때에 자꾸 물어보면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오. 이렇게 신앙의 그 지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자기의 욕심을 표백하는 건 아니고 먼저 공평한 심정하에서 그것이 과연 그럴까? 처음에는 몰랐지마는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아주 선명히 ‘그렇다’ 하고 나가는 거요. 
그런데 개괄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은 진실이 아닐 수 없다’ 하는 그런 논리의 근거에 보통 서는 것이오. 그러면 이것은 어떤 전제에서 나오느냐면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하나님에게는 일호도 거짓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소호도 믿어서 실패할 수가 없는 분이시다.’ 그러한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바른 신개념과 하나님 당신에 대한 개념만이 아니라 그 개념의 터 위에서 그를 믿는 거요. 그런고로 구원의 신앙의 확실성은 어디에서 시작하느냐 하면 ‘확실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신뢰’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요. 이 ‘확실하신 하나님’이란 내가 알지 못하면 확실 여부를 말 할 수가 없는 것이오. 이러해서 다시 구원의 신앙의 확실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 지식의 확실성에 근거를 두고서 발생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내가 알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이 중요한 거요.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이 ‘하나님은 계시니까 그걸 믿어라’ 하고 계신 사실, 존재의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주라는 말은 아니오. 하나님이 계신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아는 것이다. 오늘 읽은 로마인서 1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 불의에 대하여 진노를 하신다는 사실을 이야기 해놓고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본성의 빛 가운데에 보이는 것이다. 우리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제1장 제1항에 나오는 것이 그거지요? ‘본성의 법’이라는 말, The light of nature라는 말, 이 본성의 법이라 하는 말, “이로써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을 만드실 때에 최초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에게 비취도록 본성의 빛을 보이신 것이다 그거요. 그 다음에 20절을 보면 “창세 때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네가 못보지마는 능력 그 자체는 네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렇게 해서 능력 그 자체, 그것은 그 후에 거기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물론 누구든지 보통 쓰는 논리로 여기에 어떤 한 물건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면 정교한 걸 고안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고, 그걸 만들어 논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오. 이와같이 어떠한 한계 안에서 사람은 피조물을 보고 피조물 가운데 계시된 바 하나님 당신의 신성과 그 영원하신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거요.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걸 핑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신론을 할 때, 하나님께 대한 논(論)을 할 때 하나님은 계시다. 왜 계시냐 하는 것을 아느냐 하면 사람은 원래 그걸 알도록 만드셨고 또 모든 피조물 안에 하나님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그의 하나님이신 것 즉 신의 본성이라는 걸 알도록 그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반 계시에 의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과 연관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비록 부패하고 타락했을지라도 남아서 아직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래서 거기는 창조의 능력이 발휘되고 단순히 그림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활동과 움직임과 역사의 진전이라는 사실과 그 역사의 진전 가운데 나타나는, 전연 없다가 새로운 길이 나오는 창조의 능력의 발휘가 하나님 당신을 방불케 하는데, 그러한 것의 어떠한 방불한 능력을 인간에게 주사 정의(正義)를 사랑하고 선(善)을 추구하고 진리(眞理)를 탐구하고 또한 시간을 통해서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창작적인 활동을 하고, 이렇게 해서 새로 신선한 걸 자꾸 건설해나가는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이지 않는 형상이오. 
여러분, 어렸을 때 이미 다 초학문답 아마 배우셨겠지요. 하나님은 형상이 있느뇨? 물으니까 그 초학 문답의 대답이 ‘하나님은 신(神)이시므로 형상(形象)이 없느니라’이겠지요. 신이시니까 형상이 없어요. 여기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마치 어떤 형상이 있을 것같이 말했는데 그 형상은 시각에 호소하는 그점과 같은 것이냐? 그런 건 아니다 그거요.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 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왜냐하면 때때로 에피파니(epiphany)라고 당신 스스로가 어떤 형을 취하고 나타내시는데 그거야 하나님 형상이 원래 그렇다는 건 아니오. 
마치 사람이 형상으로 마노아에게도 나타나고, 또 사람이 형상으로 때때로 필요할 때에 위대한 지도자에게나 그런 관계자에게 나타나는 일이 있는 걸 여러분 아실거요. 그게 가령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다 사람의 형상을 취했어요. 그러나 알고 보면 둘은 천사고 하나는 여호와라고 썼어요. 여호와 앞에 아브라함이 모시고 있어요. 이렇게 이와같이 데오파니(theaphany), 즉 하나님이 나타나심이오. 그것의 한 형상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어느 편이냐 하면 그런 것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아주 신비하고 이상한 환상으로가 아니고 한 인격자로 당신을 보이시기 위해 가장 우리가 인격자로 파악하기가 쉽고 접근해 있는 것이 나 자신과 같은 인간인 것이오. 그런고로 인간의 형을 취하시고 나타나셨어요. 천사가 역시 신(神)이지마는 때때로 사람에게 나타나야 할 경우에는 한 인간적인 형식을 취해서 그도 인격자라는 걸 보이는 거요. 
그러면 이와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그 형상의 신비한 힘이 있는 것, 힘으로 역사하는 것, 또 힘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원래 히브리 말에 엘로힘(םיהלא)이라는 말이 엘(לא)이란 말, 엘로힘이란 말은 엘로아흐(הלא)에서 나왔지만, 그 ‘힘 있는’이라는 말이오. 힘, 힘이란 말이 붙어 있어요. ‘내가 너를 해할만한 힘이 내게 있지만 모시는 하나님이 그러지 말라고 해서 해하지 않는다’고 라반이 야곱을 만나서 말할 때도 그 힘이란 말 쓸 때 그 ‘엘(לא)’이라는 말을 썼어요. 여기 힘이라는 말이 하나님이라는 말로 이제 쓰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태초에 어떤 큰 힘있는 분이 ‘엘로힘’하면 이게 복합이 되니까 말이 단순한 ‘엘’이 아니지마는 가장 표면에 두드러진 건 ‘힘’이라는 말뜻인데, 요컨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신성의 나타남이라는 건 시각적인 기묘가 아니고 우리의 이성에 비취는 바 알 수 있고 터득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바 어떤 힘의 작용이라는 것이 우리의 시간적인 범주 안에서 구체적으로 늘 증시되어 나가는 것이오. 
그래서 특별히 우주 만상에서 보이는 일반계시라는게 중요하지마는 역사의 진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계시라는 건 또한 심히 중요한 것이오. 이래서 계시의 역사를 우리가 주의해 볼 때는 말씀으로써 선언하시고 설명하시지마는 그것을 보증하시느라고 행동으로써 계시를 해나가요. 어떤 행위, 힘의 사역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자꾸 진전해 나갔는데 그것이 질서가 있게 움직이는 까닭에 그냥 잡다한 힘의 작용의 흔적으로 끝나지 않고 한 역사로서 나타나는 것이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라 그거요.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 여기 몇가지 또 있어요. “하나님을 알되...” 이것이 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그 결과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않는다는 것이 그 다음의 중요한 문제요. 구원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지적 요소의 그 근원, 지식의 확실성이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는 중이오. 지식의 확실성이라는 것, 하나님의 확실성에 근거를 두고 그가 나에게 가르치시고 일러주었으니까 그건 확실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고 믿게 되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확실성이라는 건 ‘하나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으로 바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는 거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피조되었다고 그랬지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이라는 어떤 초연한 힘의 인격적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존재가 계시다 하는 걸 증명할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과거의 역사에 있지마는 효과는 그렇게 많이 없어요. 
그런 것을 이제 반복할 것 없으나 적어도 스콜라 철학 시대에 그러한 노력들이 많이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때에 소위 ‘존재론’(ontology) 혹은 ‘본체론’이라고도 하는 존재론적인 논증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역사라는 그 존재의 양상이 시간적으로 어떤 연관된 질서 있는 힘의 작용을 일으켜 놓은 사실 때문에 역사, ‘역사론적인(historical) 논증’이 있고 또한 사람이 자기의 시야를 가령 높여서 우주 만상을 자기가 보이는 세계만을 바라보더라도 밤에 별을 바라보더라도 거기에 너무나 크고 위대한 사실들이 있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고, 이렇게 해서 그 우주의 문제를 이야기하여 가면서 우주를 찬연히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우주론적인(cosmological) 논증’을 하는 경우는 있어요. 그뿐더러 모든 어떤 발생한 사실들의 추이(推移)와 귀결(歸結)을 볼 때 어떤 일정한 목적하에서 어떤 의지하에서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에 소위 ‘목적론적인(teleological) 논증’이라는 것도 있어요. 이런 것 아마 철학을 배운 이들은 이미 잘 알거요. 헬라철학 시대에 어떻게 이런 소위 온톨로지컬(ontological)<존재론적인>혹은 히스토리컬(historical)<역사론적인>, 또 코스모로지컬(cosmological)<우주론적인>, 그 다음에는 텔리어로지컬(teleological)<목적론적인>논증들이 항상 열렬하게 많은 이론을 베풀었던가, 그러나 칸트에 와서 특별히 제고되었던 것은 (그전에 없었던 게 아니고 그전부터 벌써 있었던 게지만)<도덕론적>이오. 
이런 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 할 때 이걸 가장 강한 논고로 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려고 했지마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것 알아두어서 큰 손해는 볼 것이 없지마는, 그런 것들을 중요히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 되,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갖되 결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그릇되이 갖거나 빈온하게 가지고서는 신앙이, 구원의 신앙이 강하게 확립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거요. 이걸 아주 주의하시라 그거요. 
이러기 까닭에 칼빈 선생도 말한 바와같이 모든 지식은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으로 귀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어요. 무얼 우리가 안다, 과학도 하고 그 여타의 여러가지 것을 우리가 많이 알아도 그것들이 그냥 잡다하게 거기에 대한 인식으로 끝나고 만다면 별 의미가 없으나, 그것들이 합쳐져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어떤 분이냐?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바른 지식으로 들어가 거기에 근거를 두고서 우리에게 주신 바 여러가지 약속과 그 말씀, 특별히 그 중에도 구속의 큰 경영과 이루신 그 일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안다는 이것이 참 중요한 것이오. 
이렇게 말을 할 때 흔히 우리에게 있는 많은 공허한 점, 허점을 발견해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빈곤하다는 걸 느끼기 되는거요.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게 근면하게 알려고 별로 하지를 안했다는 것이 거기 있어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구원의, 구속의 크신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하는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요청이 또한 있는 것이오.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해요. 성신님의 역사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성 삼위의 각각 그 크신 독특한 역사와 속성의 활동을 우리가 잘 알면 아는 만큼 자기의 구원의 신앙의 내용, 그 내용에 대한 우리의 신뢰도 명백하고 든든해지는게고 이렇게 해서 생활이, 신자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깊고 튼튼해져 가는 거요. 
이런 것 없이 기도만 하고 예배당만 열심으로 좇아 다니면 신앙이 붙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참으로 주의하셔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가 요구하는 건 그냥 종교감정이 아니고, 기적신앙이 아니고 역사신앙이 아니고 구원의 신앙인데 구원의 신앙이 풍부할려면 구원의 신앙의 내용의 지식이 증가해야 하는게고 확실해져야 하는 거요. 그것이 희미하거나 그것이 개괄적에 불과하고 모호하거나 이런 건 안된다 그것이오. 이렇게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명백하게 풍부해서 많이 알아야만 구원의 신앙이 비로소 생긴다는 말은 아니오. 그러나 구원의 신앙에 필요한 어떤 기본적인 지식이 처음에 시작을 했으며는 그 다음에는 그것이 자꾸 풍부해져야 한다 그거요. 이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꾸자꾸 장성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과 같이 장성을 요하는 소이인 거요. 장성을 해가는데 따라서 지식도 그 정서도 그 사람의 의지적인 활동도 훨씬 더 어른답게 튼튼해져 가는 것이다 그말이오. 하나님께 대한 이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마는 어떤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에 대한 즉 신개념의 풍부라는 것은 배워야 하는 것이지 안배워도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니오. 안배우고는 몰라요. 
여러분, 안믿는 사람에게 최초 전도할 때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 대한 최소한도의 기본적인 개념이 없이는 전도를 못하는 것이오. 그 사람이 그걸 받아들일 재주가 없는 거요. 예를 들면 ‘당신은 죄인입니다.’‘누가 날보고 죄인이래요?’ 그러니까 ‘아니 당신은 세상 사람 앞에 죄가 없지마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벌써 그에게 보여야 하는 거요. 그게 중요한 거요. 내가 옛날에 평양에서 거리에 서서 전도를 하는데 한 사람이 지나가는데 나하고 같이 갔던 친구가 그 사람한테 전도를 할 때 “여보시요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시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말씀하시우?” 그러구선 지나간다 말이오. 그러고 지나가니까 “아, 말씀하시고 말구요.” “나는 한번도 못들어 봤오.” “그래 좀 들어보시오” 하구서는 뒤쫓아가서는 전도를 해요. “당신 말이지 그게 하나님 말이오?” 하고선 그냥 가버리는 거요. 
이와같이 하나님께 대한 개념이라는 것이 전적 부인은 아닐지라도 현실상 실천상 부인을 하는 것, 이건 신자에게도 많은 거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약속이 있고, 우리에 대한 경영이 있고 우리와의 어떤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사실려고 하는데 문제에 부닥쳤을 때는 그 관계가 필요없이 나하고 돈과, 나하고 세력과, 나하고 이 세상 권세와의 관계를 첫째로 하고 어떻게 하면 살까 하고 나아가는 이것은 현실상, 실천상 소위 프렉티컬 에이티이즘(practical atheism)이라는 거요. 실천상 무신론인 거요. 신자에게도 많이 있는 일이오. 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알지를 않는다. 여기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으로 알아서 영광스럽게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는 거요.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이 바로 서고 그것이 풍부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거요. 한꺼번에 우리가 다는 몰라요. 
전도할 때 또 하나는 ‘당신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죄인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기 심판하시는 하나님 그 절대 의(義)의 하나님을 또 보여야 하는거요. 이러고서야 예수님의 그 구속을 전하는 것이오. 먼저 나오는 건 그런 신론인 것이오. 내가 신론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이론을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안하고는 구속을 못 전하는 것이고, 그러면 평안을 얻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는 말도 할 수 없는 것이오. 이 세상 악마구리같은 속에서 참으로 애매하게 희생을 당하고 고통스럽게 지내시겠습니다만 예수를 믿으십시요, 이렇게 말하는 게 전도입니까? 무엇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아첨을 하고 그런 소리를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 전도가 아닌 것이오. 절대로 예수를 그렇게 해서 소개해가지고, 뭐요? 구속의 예수를 전하지 않고 사람 죄인에게 죄에 대한 문제는 아무것도 터취(touch)를 하지 않고 그냥 평안을 얻으라? 행복을 얻으라? 그 공리주의(功利主義)의 어떤 신(神)이지 어떻게 그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의 구속에 들어갈려면 먼저 ‘네가 구속을 받아야 할 소지(素地)에 있다. 그건 네 죄다. 세상의 죄가 아니라 네 죄다’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오. 자기 죄를 느껴야만 구속은 있는 것이오. 왜냐하면 구속은 이 세상이 한꺼번에 구속받는데 덤으로 내가 가는게 아니라 하나 하나의 영혼이 구속받는게고, 하나 하나의 영혼이 도덕적 책임자고, 책임자인 까닭에 죄가 있으면 죄를 회개해야 하는 것이오. 그런데 그걸 말 않고 세상이 허무하니까, 세상이 괴로우니까, 세상의 죄악 속에서 암담하니까 이 속에서 예수를 믿고 믿은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빛을 비취어야겠다? 그 세상을 생각하는 마음은 굉장하지만 기독교는 아닌 것을 아셔야 해요. 그리고 그와같은 일을 전도를 한답시고 많이 하는 걸 오늘날 귀가 따갑게 아마 들을 거예요. 자주 정신을 차려야 해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전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처지에 서 있는 우리로서 먼저 하나님 당신께 대한 나의 상념(想念)이 넉넉해야 하고, 빈곤하지 아니해야 한다 그것이오. 여기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볼지라도 구원의 믿음의 용사들을 이야기할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첫째는 ‘그가 계신 것’과 현실상 무신론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거요. 관념상 신 존재를 승인을 했든지 부인을 했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과연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거요. 다이즘(deism)으로 팔짱끼고 앉아서 초연한 신으로 앉아계시는 그게 아니오. 소위 이신론적인 초연신(超然神)이 아니라, 인격신(人格神)으로서 직접 관계하시는 그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둘째는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 자기를 찾는 자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이다. 그들은 모색을 하고 나가지만 결국은 찾고 나오는 사람에게 응답을 주시고 후히 갚아주신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는 찾아지게 할 것이오. 하나님께 대한 상(想)과 개념(改念)은 풍부해야 하고, 바르게 잡혀야 하고,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알아서 영광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상념은 자꾸자꾸 증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거요. 이렇게 하는 데에서 그가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한 신뢰도 점점 확립되어가는 것이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 대해서 아무 상(想)도 정립이 안된 사람이 성경만은 진리라고 믿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되지 않은 이야기요. 그건 수긍할 수 없는 이야기요. 성경이 왜 진리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진리다 그러는 거요. 이와같은 전통적이고 역사적이고 또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신앙 내용을 파괴할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 안계시다 해도 안되겠고 다음에는 그 여타의 다른 것으로 이야기해도 안되겠으니까 어떤 틈을 타느냐?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 하나님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위대하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지만 그 진실하시고 위대하시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그의 의사(意思)가 사람에게 알려야 할 여러가지 것들이 왜 하필 성경이라는 것으로 나왔느냐? 그거 안된다. 그거 고대(古代)에나 사람들에게 그러한 식으로 화법을 써서 전달해야지 현대(現代)에도 그런 식으로 화법(話法)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인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래서 그 말을 곧이 듣는 거요. 고대인은 신화를 가지고 사람을 설득을 했고 그래서 소위 이게 볼트만이 말하는 식이오. 그 신화라는 것은 사람을 설득을 해서 제 1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라는 것을 그 때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가지고 있는 신비성과 위대성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신화적인 여러가지 내용을 삽입해서 신화와 비신화가 뒤섞이게 다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천재적인 작품으로 위대한 성공을 했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기독교는 완전히 신비하고 위대한 사실로서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고 자부를 하고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고 이런 기막힌 소리를 하는 것을 오늘날은 큰 신학이나 해가지고 쫓아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그런데서 나오는 소리올시다. 
이렇게 세상은 이상하게 자꾸 변하고 있어요. 그러고서 오늘날 와서는 그 신화가 더 이상 필요없다. 우리는 역사의 자취에서 많은 논증을 가지니까 제 1세기 같이 아직 역사가 지어지기 이전에 어떻게든지 바른 프리젠테이션(presentation)을 하기 위해서 쓴 그런 신화라는 걸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것은 비신화화 해야 한다. 이것은 신화 아닌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의미와 그것이 기도했던 바를, 의도했던 바를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이러기 까닭에 신화가 오늘날 많이 섞여있는 성경이라는 책은 오히려 비신화화 하는데 주력을 할 대상이지 그걸 곧이 곧대로 오늘날도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고 종교적인 의미를 거의 상실하는 것이다고... 
이렇게 해서 마귀는 ‘성경이 하나님의 그 신실성에서 나온 신실한 약속이요 또한 신실한 은사요 거져주시는 것이오 또한 신실한 명령이라고 하는 그리고 전부가 그렇다, 거기에 이적도 틀림이 없다’는 이것을 부인을 한다 그말이오, 이러고 이런 부인을 귀담아서 듣고 그런데에 물을 먹고 감염된 사람들이 교회를 조직하고 그것을 전파하고 나아가는 이런 수가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아시는 데로 압도적이오. 오히려 그러지 않고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신앙을 그대로 간직해서 믿고 나아갈려고 하는 수가 적다 말이오. 그걸 믿는다고 하는 사람마다 다같이 역사적인 신앙을 유지하는 건 아니예요. 그걸 믿는다 할 때는 그건 밖에서는 배우지 못해서 믿는다 말을 하고 그 밖에는 그것을 그럼 믿었으면 믿는 사람답게 구원의 신앙의 지적요소를 바로 함유하도록 항상 주의했어야 할 텐데 그런 주의가 자기의 종교를 거기다 가미해 버리는 것이오. 너희는 그 말에 더하지 말라고 잠언에 말씀했지요? 하나님이 너를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실까 두렵다. 그 말에 그렇게 함부로 더하지 말라. 그러나 그런 이상한 종교가 거기 붙어다니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자기가 나아가는 그 하나님은 계시다” 그거요. 하나님께 나아갈려면 나아갈 수 있는 대상인 까닭에 구체적이라야 해요. 구름과 같이 막연하고 바람과 같이 막연하면 어디로 나갈지 알지를 못하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 자체는 네가 어떤 대상으로 이 길로 나아가야겠다고 알고 그러고 나갔다면은 그러한 하나님이 계신걸 먼저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러한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모르고 네가 하나님을 근본적인 신론(神論)에서는 부인을 하지 않을지라도 네 현실 생활에서는 그 하나님이 네게 소용이 없고 하나님은 초연히 위에 계셔서 팔짱끼고 앉아계신다면 네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것이오. 
이렇게 하나님은 계시다. 내가 나가는 대상으로 나의 목표지점으로 거기 계시고, 나는 그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무엇을 구하고 그에게 무엇을 받겠다. 나와 상대해주시는 그 하나님이시다. 그가 그렇게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찾는 사람에게 대해서 응답해 주시는, 적극적으로 인격적으로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신걸 믿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먼저 그 구원의 신앙의 기초가 그러한 하나님이신걸 믿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체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오. 그런데 그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체적으로 믿는 근거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하는 그 터 위에서 그런고로 그의 하신 말씀이 다 신실하시다 하는 것을 믿는거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사실들은 한마디로 두루칠 때는 복음 사실인데, 혹은 복음의 내용인데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바 인간이 어떻게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하는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이오. 처음에 전도할 때 안 믿는 사람에게도 ‘당신은 죄인입니다’ 하는게 부패와 타락의 구체적인 사실을 꼬집어서 하는 말인거요. 구원의 신앙을 받아서 그렇게 믿고 나왔으면 ‘나는 죄인입니다’ 그 한마디로 족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오. 자기는 근본적으로 타락해 있구나, 죄를 이길 힘도 없다, 죄로 오염되어 있다. 나의 생활 가운데는 속속들이 여기도 부패가 끼고 저기도 부패가 끼어서 전적으로 부패, 이런 전적 부패, 타락, 토탈 디프레브티(total depravity), 전적으로 오염되어서 부패해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믿는, 그러한 지식이 거기 필요한 것이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이러한 전적인 부패의 사실에서 죄도 나오는 것이고 또 그속에는 원죄(原罪)가 있는 것이고, 그러고 항상 범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떻게 나로서는 할 수가 없고, 이거예요. 
이러한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은, 나는 죄의 저주아래서 죄책을 짊어져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도 다 할 수 없는 그런 위치 그러한 죄책 가운데에 있는데 그것을 대신 다 받아서 전부 소멸해 주셨다’는 것과 다시 ‘이 죄의 노예된 상태에서 나를 건져주심으로 죄가 다시는 나의 위에서 왕노릇을 못하게 하셨다’ 이것이 구속의 사실이라는 것이오. 그 단편적인 한마디가 아닌거요. 이 구속의 사실을 또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어야 하는거요. 
우리는 그러므로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확실해야 하고 그 대상이 은혜로서 사역하시는 그 사역들에 대한 지식이 확실해야 하는 것이오. 이게 개론적으로만 말 할 때에 그런거요. 구원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확실한거다. 만일 신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불확실하다면 세상의 다른 아무것이 확실하더라도 가장 근본적인 것이 없어졌다. 왜? 영원한 문제와 가장 중요한 인간의 생명의 문제, 신령한 문제에 대한 지식인데 그것이 불확실하다면 다른 무엇이 확실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거요. 세상에 무엇이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확실해야 한다 그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구원의 신앙의 확실성이라는 건 다른 어떤 지식의 확실성 보다도 우수하게 확실해야 한다’ 그말이오. 이것이 필요한 거요. 
여러분 각각이 예수께 대해서, 하나님께 대해서, 구속에 대해서 확실하게 생각하는가? 그렇게 말을 했으니까 그렇다더라 하는 정도로 지내는 건가? 돌아가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여러번 배웠으니까 구속이란 건 그동안 여기 기초도리를 이야기할 때 여러번 했으니까 벌써 다 아실거요. 죄책에 대해서, 죄의 세력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가 그거요. 죄의 책에 대해서 어떻게 면제하셨는가? 죄의 세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노예시장에서 나를 사와서 자유를 주신건가?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실인 것이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성삼위 하나님이신 것이오. 성삼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구속의 크신 뜻과 자비, 동시에 죄를 추호도 거져보내시는 일이 없는 그 엄위, 로마인서 11장 22절과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엄위와 인자를 보라’고 그랬지 덮어놓고 하나님은 사랑, 사랑이라고 하나님을 사랑이시라고만 않는거요. 하나님은 또한 엄위로우신 분이오.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거요.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이 아주 중요한 사실인 까닭에 그러고 너무나 소홀히 하는 일이 많고, 소홀히 하고도 종교만 가지고 종교 형식만 취하고 종교적인 행사만하고 또 종교감정을 주로 가지면서 야단내면 믿음도 많아지고 훌륭해지고 기도도 많이 하면 믿음도 저절로 생기고 하는 줄 아는 이 큰 오해를 우리가 명확하게 분별하기 위해서 이 구원의 신앙 요소에 대해서는 여러분, 좀 분명히 아시고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기 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알고 깨닫고 믿고 바라고 의지하고 살게 하셨사옵는데 이런 것이 저희가 저절로 가만히 앉아서 믿는게 아니고 저희에게 주신 영혼의 기능과 주신 힘에 의해서 주신 기능과 힘은 정당하게 발휘하고 사용해서 주님께 대해서 마음에 중생과 거룩하신 은혜로 불러주신 이래로는 바로 더 깨닫고 알도록 더욱 노력하고 더욱 장성해야 할 것이옵고 이리하여서 저희는 저희의 구원의 신앙이 확실한 것으로서 저희 안에서 터를 잡고 있으며 저희의 인생의 행보에 있어서 확실히 그것이 저희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기 위하여서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가 있고 오늘날 교회에 많은 잘못된 교훈과 빈곤한 이야기와 너무나 많이 발휘하는 종교가 거기에 한 몫 성행하고 있는 속에서 조용히 확실하게 주님께서 주신 바 구원의 사실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신뢰와 신앙과 우러러 봄과 기대는 무엇이겠는가를 깨달아 알도록 은혜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저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참으로 능력 있게 역사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의 신앙 3 
마태복음 20장 17-28절(1982. 2. 21) 
여러 종류의 믿음이 성경에 기록되었지만, 그 각 종류가 다 반드시 구원을 증명하는, 혹은 구원을 표시하는 믿음이 아니고, 구원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 즉 구원의 사실,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히 나타내는 믿음이라는 것은 분명히 거기에 중요한 몇 가지 요소가 있어요. 그 요소란 첫째는 지적인 요소(notitia), 둘째는 그 정서에 있어서 어떠한 것이 나타난다든지(assensus), 셋째는 그 의지의 움직임이란 것이 어떻다(fiducia)는 이 세 가지가 현저하게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로 거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중에 그 지적인 요소라 하는 것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느냐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신실성으로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므로 그 사실은 그 믿는다는 사실은 희미하지 않고, 무리하게 자기가 조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실성에 터를 두고 하신 말씀을 믿는 까닭에 그 믿음이라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 그러면 믿음이 확실하다는 말, 믿는 내용에 있어서 그 지식이 희미하거나 모호하거나 반신반의하지 않고 요지부동하게 그 알고 있는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 그것이오. 즉 지적인 요소, 지적인 것, 마땅히 지식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사실들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계속해서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겠는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이 중요한 지적인 요소라는 것이 첫째로 무엇을 알아야 하느냐, 얼마만큼 알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늘 오는데, 예를 들면 “예수 믿고 천당 갑니다, 예수 믿으시오!” 하는 그 내용이 그 말을 그대로 곧이듣고 믿었다고 하면 구원받기에 넉넉하냐 하면 그것은 구원의 넉넉한 신앙이 아니다는 것이오. 그러면 종교적인 여러가지 행사와 제도와 규칙들을 잘 아는 것이 구원의 믿음의 지적인 내용으로 필요하고 또 충분하냐 할 때 그런 것들이 구원의 신앙의 지적 요소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이오. 즉 많이 기도를 해야 한다든지, 또한 예배당에서는 어떻게 한다든지, 종교적 행사는 어떻게 해야 한다든지, 하나의 조직적인 사회적인 활동의 내용과 절차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신앙의 지적인 내용에는 큰 관계가 없는 일이다 하는 것이오. 
그러나 구원의 신앙의 그 지적 내용은 분명히 어떤 중요한 사실들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째로 알아야 할 문제는 두 말할 것 없이 신앙의 대상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첫째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해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그냥 덮어놓고 막연하고 모호해서는 아니되고 그 지식이 분명해야 하지마는, 그 중에 제일 중요하게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구원의 신앙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대로 확실히 믿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엇과 관련되는고 하면, 우리의 죄와 관련되어서 그러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은 건져야 할 상태, 건지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받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 멸망받을 상태에 있는 그것은 죄책으로 말미암은 것이오. 죄를 지음으로써 죄를 지은 자가 죄의 책임을 지게 되니까 당연히 거기에 상당한 형벌을 받게 되고 그 형벌은 어떤 죄에든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오. 이러기 까닭에 이런 영원의 멸망의 상태에서 건져내려면 지금 그가 지고 있는 바 죄의 책임이라는 것을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이오. 그러기 까닭에 죄책에서 면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절대의 의에 의해서 처리해 주셔야 하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사사로운 정 혹은 감정에 치우친다든지 덮어놓고 사랑이라는 말 한 마디로 그냥 내가 불문에 붙이겠다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철두철미 나타내시기 위해서는 죄를 추호도 용인하실 수가 없고 그냥 보아 넘기실 수가 없는 동시에 그러한 죄에 대한 면제라는 것, 책임의 면제라는 것은 그 죄값을 별달리 받으셔야 하는 것이오. 이렇게 해서 철저히 죄값을 받으시고 그래서 죄책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는 면제된 것이고 하나님께로서는 죄책, 죄책에 대한 값을 받으셔서 그것을 소멸시키시는 것이오. 이와같은 문제는 먼저 당연히 우리의 죄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거요. 우리의 죄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에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토죄하신다는 하나님을 믿고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오. 
구원의 신앙의 지적 요소의 첫째는 먼저 그가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것이오. 하나님을 알되 영광스럽게도 아니한다고 하는 죄인들의 불의의 상태에서부터 건져내사 하나님을 정당하게 하나님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오. 대저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해서 하나님을 반드시 부인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당하게 인식하지 못하도록 별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않고 별달리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마귀의 한 교묘한 일도 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암매란 것이 지어 나가는 일이올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알지 않는다고 할 때는 성경에서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보이신 바 참 하나님의 거룩한 자태와 속성과 여러가지 내용을 정당하게 인식해 가라는 이야기이지 덮어놓고 그냥 하나님이란 이름만 믿으면 된다는 건 아니올시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해서 한꺼번에 다 알 길이 없어요. 그러나 맨 먼저 천지의 대주재가 계신다, 창조주가 계신다, 지극히 높으신 이가 계신다 하는 이런 관념은 희미하든지 분명하든지 간에 사람들에게 기본적으로 다 있는 것이라고 성경은 그렇게 시작을 해요. 결코 성경은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니까 계시다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따져서 가르치지 않아요. ‘사람은 그 하나님의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 보이지 못하는 이런 것들을 지으신 바 만물로 알 것이니 그러므로 사람들이 핑계할 수 없느니라.’ 핑계할 수 없이 사람에게 다 그것을 심어 주신 것이오. 이러기 까닭에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어떤 막연한 존재들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오. 
히브리서 11장에 있는 말씀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은 안 계시다 하는 말에 대한 부정인 것보다도 내가 말하는 하나님, 성경이 지금까지 이야기해 오는 그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그 말이오. 요컨대 하나님이라는 말이 더 중요히 먼저 앞서 왔어요. 하나님이란 뭐냐? 그 정의가 뭔가? 혹은 적어도 그 개념의 내용은 뭔가 할 때에 사람이 제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 말고 성경이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어야 한다 그거요. 이것은 말하자면 신론을 바르게 해라. 하나님이 계시다는 일반 존재론, 본체론은 누구에게든지 기본적으로 마음에 있는 것이지마는,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좀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희미하게 알고 별다른 것으로 환치해서 알고 있는 것이오. 이렇기 까닭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그것이 반드시 정확하게 바른 하나님으로 안다고는 못하는 것이오. 
그러면 요컨대 예를 들면 지고(至高)의 실재라든지 제일의 원리(first cause)라든지 하는 말로 철학자들도 이야기하지만, 전체 우주의 어떤 근원이 계시고, 가장 높으신 분이 계시고, 전체를 통활하시는 분이 계시다 하는 생각이 반드시 각 사람에게 명확한 한 인격자로서 자기에게 와 닿고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오. 막연한 경우가 많아요. 가령 그 인격신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인격에서 필연히 추출되어야 할 하나님의 여러가지 경륜의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안 믿는 이가 많은 것이오. 그것이 예수를 오랫동안 믿었다고 하는 사람에게서도 자꾸 따져 볼 것 같으면 그런 경향이 많이 있어요. 그 쉬운 예를 말씀드렸지만, 초연의 신이란 것은 성경이 가르치신 하나님은 아닌 것이오. 초연한 분, 우주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이 잘 운행되도록 하시는 그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른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마는 그러나 그것은 초연신론에서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이 한 인격신으로서 우리와 더불어 매일 관계하시고 날마다 일에 있어서 친히 다스리시고 친히 경영하신다 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에는 초연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그럴 이유가 있느냐? 한번 법을 냈으면 법이 제대로 자동적으로 움직여 가는데 왜 자동 기계를 다 만들어 놓고 그놈을 일일이 손으로 또 돌려야 할 이유가 있느냐?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주 만상의 은혜의 법칙을 다 만드신 다음에는 그것이 제대로 잘 운행되도록 하신 까닭에 운행이 되는 것을 보시고 계시는 것은 좋지만 와서 일일이 간섭하시는 일이 없다. 이게 초연신론(超然神論)이오. 이신론(理神論)이라는 것, 이게 다이즘(deism)이라는 것이오. 이렇게 하나님을 성경이 가르친 그 하나님으로 바로 아느냐 하면 바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거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 예수를 믿고 사는데 급한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은 초연히 위에 계셔서 나를 돌아보시고, 위에 계셔서 나를 돌아다시니시면서 이런 일을 도와주실 수는 있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서 직접 운행하신다는 것은 아마 안 할 일일런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이것을 운행을 하고 하나님 보고는 도와 달라고 하자. 이런 식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희소한 것은 아니올시다. 여러분 다 경험해 보셨죠? 우리들 자신도 급한 문제가 있을 때 갈림길에 서는 수도 있는 것이오. 그 갈림길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보여 주셔서 우리가 해명해 가지고 터득한 그 법칙에 의해서 이 일을 이루어 가실 것이니까 아무런 걱정할 것도 없이 거기에다 맡기고 ‘내 길을 가자’ 해야 할 경우에 그렇게 해야 할 것과, 아니 그렇지마는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 혹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했으니 사람이 할 일은 다 하고 천명(天命)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해서 성경의 말씀과 약속이 아니라 어떻게 엉뚱하게 유교에서 나오는 문자에 의해서 자기의 행방(行方)을 결정하는 거요.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이 할 일이란 건 뭔가? 사람이 할 일이란 건 내가 손으로써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고, 내가 주의할 것은 주의하고, 내가 비치할 건 비치하고 이렇게 해서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절대로 하나님의 뜻만이 여기서 나타내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장면에 있어서도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제게 그 뜻을 안보이시고 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면 최종은 어떻게 할 것이 없으니까 그 때에는 이거라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는 그 무엇 하나를 뒤에다가 남겨 놓는 수가 흔히 있는 것이오. 그래서 지난번 야고보서 1장에 있는 그 말씀은 해석할 때에도 뒤에다가 남겨 놓고 기도하고서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고,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것 같아서 信과 不信사이로 항상 요동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어서 정함이 없는 사람이라 아무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것을 생각지도 말라 그렇게 말씀했어요. 이런 것이 뭐냐 하면 소위 프렉티컬 다이즘(practical deism)이라는 것이오. 실천상 초연신론이라는 것이오. 
말로는 하나님 아버지 어떻고 다 이야기하지만 그게 아주 먼 이야기요. 현실 문제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집안의 자녀로서 그 권속으로서 권고를 받는다 할 때는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자녀의 일로서 돌아보신다 하는 걸 확실히 믿는 터 위에서 비로소 생각을 해야 할 터인데 과연 그것은 그렇지만 그건 관념상 문제고, 그건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고, 직접 생활에 있어서는 내 돈과 내 세력과 내 주선과 내 노력 그것이 결국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아주 강력한 현실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이오. 이런 것들은 구원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크게 그 신앙이 손해되는 일, 해치는 일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이 구원의 신앙의 첫째의 지적요소는 그 대상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서 섬겨야 하는 것과 믿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믿지 않고 또 그것이 또 가장 중요한 첫째 요소인데 그것 그러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이름은 부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원래 성경에서 내신 그 신론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올시다. 여러분 다 잘 아시지요? 한국말이오. 헬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어떤 신 가운데 주신(主神), 제일 중요한 주인이 되는 신 이름을 데오스(θεος)라고 불렀던 것이오. 그런 말을 제우스(Zeus)라고 혹은 쥬피터(Jupiter)라고, 그러나 좌우간 데오스는 데오스라고 혹은 그런 식 생각을 가졌던 것이오. 
그러면 히브리말의 엘로힘(םיהלא)은 얼마나 참된 하나님을 다 나타내는 그런 말이 되느냐? 이것도 따져 놓고 보면 고대의 히브리말의 그 어원으로 올라갈 것 같으면 옛날의 바벨론에서 내려온 말인 것이오. 거기 역시 그건 하나의 힘을 상징하고 어떤 힘있는 이, 힘있는 세력의 활동을 생각해서 힘이 있으니까 이런가 보지, 원래 엘로힘이라는 말이 엘로아(הולא)라는 말의 복수인데 엘(לא)이란 말이 힘이란 말이오. 능력, 어떤 능력 있는 분이다. 그러니까 한 인격적인 것을 상상하게 그 말을 썼던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말보다는 그 말이 가장 근사하니까 그 말을 갖다 썼지마는 성경 구약에도 반드시 엘로힘이 하나님만을 표시하는 건 아니고 엘이라는 말이 어느 때는 재판장을 표시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직접 자기의 힘을 물리력 혹은 권세 이런 걸 표시할 때도 쓰는 말인 것이오. 이렇게 해서 그 어원을 가지고 따지는 게 아니오. 
그렇다면 이 한국말의 하나님이란 말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던 어떤 신을, 어떤 개념을 표시하던 말인 거요. 대표적으로 자꾸 고전으로 올라갈 것 같으면 한국에 어떤 유명한 사학자는 연구한 결과 한국 사람의 하나님은 저 태양이라고, 우리가 잘 아는 육당 최남선 선생이 그런 얘기를 한 일이 있어요. 그런 논문을 내가 읽어 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되었든지 그 하나님이란 말이 어디에서부터 나왔겠는가? 할 때 어학자들이 앉아서 큰 울타리, 그래서 한울님이다. 그 울타리라는 걸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라고... 거기서 나왔다고 그러고 어떤 사람은 그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겠다. 단일(單一)이라는 말. 어떤 사람은 ‘한’이라는 아주 크다는 거기에서 나왔겠다고, 그 어디서 나왔든지 문제는 그런 님이예요. 그러한 한 분. 천군(天君)이란 말이오. 그런 분을 섬긴다고 할 때 그게 성경에서 가르친 바로 그 하나님이냐 하면 그건 아니예요. 
그런데 여러분 전도를 할 때 하나님을 믿느냐고 하면 ‘예, 하나님은 계시지요’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안 믿는 사람에게 전도를 해 보면, 그리고 ‘하나님이 이와 같이 죄를 벌하십니다’ 하면 고만한 정도... 그건 불교에서도 신이라는게 상선벌악(賞善罰惡)을 하는 것이라고 해서 선을 상 주고 악을 벌하는 것이라고 하는 고만한 정도의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그만한 정도에서 신론을 먼저하지 않고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오. 죄를 이야기해 가지고서 죄를 형벌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한 다음에는 죄를 건져 주시려고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공로 이야기를 그 다음에 해야 해요. 이렇게 돼서 그 사람이 구주로 그리스도를 받고 교회로 들어왔으며는 그 다음에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신님에 대해서 비교적 고루고루 좀 더 바르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줘야 해요.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거요.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 사람이 어디서 배울 데 없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정당한 신론을 가르쳐 주지를 않아요. 그렇게 하고 예수 믿는 도리가 그 다음에는 주로 그 무슨 생활에 관한 문제, 도덕적인 문제, 죄를 짓지 말아라, 악을 행치 말아라 하는 이런 이야기, 그 다음에는 교회의 제도상 문제, 종교에 관한 문제를 자꾸 이야기하기가 쉬운 것이오. 이런 데서 자라나면 항상 해도 건강하고 풍요한, 충분한 신론을 못 가진다 그말이오.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생각이라는 것이 불충분하다 말이오. 하나님, 예수 혹은 예수 그리스도, 이 분에 관한 생각이 항상 불충분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도 항상 어디다가 주력을 하느냐 하면 생생하게 살아 있던, 요즈음 말을 빌리자면 역사상의 그리스도, 역사상의 예수, 역사적인 예수를 자꾸 이야기하지 영원하신 예수, 중보자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빈곤하다... 이러한 것들이 무엇을 일으키느냐 하면 예수에 대해서의 믿는 내용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가르치지 않는 이상 중보자의 그 임무로 말미암은 우리와의 관계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말이오. 그리고 예수님이 몇 살에, 어디 열 두살에 예루살렘 성전에 갔고 몇 살에 무엇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고 말하자면 전기 이야기가 많고 그러고서는 옛날에 있던 어떤 훌륭한 그분으로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많아요. 오늘날 지금 예수님은 살아계시사 뭐 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생생하게 현실로 자기의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다 그 말이오. 이런 것들이 다 구원의 신앙으로는 너무나 빈곤한 것이오. 그러면서도 그냥 방치하고 그냥 지나가는 건 교인들이 구원의 신앙을 명확하게 잡고 살도록 하지 않는 소위(所爲)가 되는 것이오. 
그런고로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구원의 신앙의 내용이 첫째 믿음의 대상 즉 한마디로 하나님 즉 성부요 성자요 성신님의 그 우리와의 관계, 구원의 사실과의 관계를 먼저 명확하게 아는 것이 심히 중요하다 그것이오. 이렇게 자기의 구원의 그 신앙의 대상, 믿는 그 분, 믿는 대상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희미한 즉 무슨 폐단이 또 하나 발생하느냐 하면 현대인들에게 많은 폐단이올시다. 구원의 신앙의 내용으로서의 첫째 중요한 지적 요소인 자기의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지 않더라도 차라리 자기의 종교의 요구에 기여하는 무엇이 있을 때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오. 예수를 믿고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중요히 취하려는 건 자기의 종교적 요구 혹은 종교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혹은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든지 평안이라든지 혹은 행복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지 자기에게 보탬이 되는 것 또 자기의 이 세상의 고난이라든지 괴로움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것, 마음이 아픈 것과 죄에 대한 때때로의 자책 같은 것을 조금 유화해 줄 수 있는 무슨 진통제 같은 것, 그런 유화하는 약 같은 것, 해독제 같은 것, 이런 것을 종교 안에서 구하고 나가는 거요.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지식이 명료하지 않더라도 첫째 중요한 것은 이 종교 안에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내 이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달래 줄 수 있느냐? 내 마음 가운데 있는 이 자책 이것을 어떻게 쓸어 덮어 줄 수 있느냐? 내 속에 있는 이 어떤 강렬한 열정을 어떻게 대답을 해 줘서 나를 이끌고 가서 계속적인 도취, 법열,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 행복감 그 속에서 살게 해 주느냐? 제일 중요한 건 그런 유데모니즘(eudaemonism)이오. 행복이라는 거요. 정신적인 것. 그걸 가르쳐 자기는 양식이라고 그리고 생명의 양식은 그런 것인 줄로 생각하는 거요. 그런 것을 계속해서 얻어 가려고 하는 그러한 경향이 많다 그 말이오. 종교에 들어가서 그걸 먹으면 된다.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이 있지요. 종교에 들어가서 내가 잡아야 할 꿩을 잡아야겠다. 이 신앙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라는 지적 요소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서 자기에게 오지를 않는 것이오. 중요한 것은 그 종교에 가서 어떻게 하면 나는 위로를 받느냐?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 있어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느냐? 어떻게 내가 무엇을 얻느냐? 이것이 중요해요. 이렇게 자꾸 나아가는 거요. 
이런 것은 구원을 참으로 받은 사람의 신앙의 정당한 상태가 아니올시다. 이러한 것들이 역사적으로 개혁 교회가 항상 주의시킨 것이오. 다같이 그리스도의 교회 이름을 가지면서 무엇이 다르냐 할 때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 말이오. 내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지금 문제가 아니다. 나를 구원하셔서 깨달음을 주셨으니 그 깨달음의 첫째는 그 구원하신 구주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겠다. 즉 구주 되시는 하나님께 대해서 내가 바로 알아야겠다. 그리고 과거에 가지고 있던 희미하고 모호하고 이교적이고 잡다했던 이런 신관이나 신 개념 그것을 고쳐야겠다 이렇게 나가야 할 거요. 그런데 이런 것을 하지 않는 현대인적인 이상한 종교공리론, 공리주의적인 종교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은 대단히 비기독교적인 것이올시다. 
물론 우리가 신앙의 그 전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들 신앙의 전체라는 것이 결코 지식만을 가지고 되는 건 아니예요. 그러나 지금 여기서 강조하는 건 지식없이 되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거요. 몰라도 잘 믿으면 된다. 세상에 그런 일은 없는 것이오. 여러분, 믿음이라는 말은 그런 종합적인 용어요. 거기에 지적인 요소가 붙어다녀야 믿음이라는 것이 비로소 제 본자리를 얻고 의미를 가지는 거요. 아무 것도 모르는데 가장 편언척구 한마디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하는 이것 하나만 믿고 그 다음엔 지성을 드린다고 열심으로 정성을 드리고 다니면 된다? 세상에 그런 일없는 것이오. 알기만 하고 만일 그 사람의 정서에 변화도 없고 의지의 행동의 변화도 없다면 그것도 믿는 것 아닌 거요. 그것 아는 것 뿐이지 믿는 것 아닌 거요. 그러나 아는 것은 믿는다는 사실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일이올시다. 무릇 신앙의 대상에 관한 지식이 됐든지 구원의 도리에 관한 지식이 됐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여러가지 진리는 그것이 단순한 지적인 수용, 지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것만으로는 절대로 신앙을 형성하지 않는 것이다 하는 걸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해요. 
죄인의 심정에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흡수와 통찰인 것이오. 그 깊이에 대해서 그걸 받아들여서 자기가 가뭄에 비를 구하듯이 구해서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이런 영적인 통찰, 이 스피리츄얼 인싸이트(spiritual insight)라는 것, 이것을 우리가 얻으면 그로 말미암아 깨달음이 생기는 것이오. 이 깨달음이라는 것이 심히 중요한 것이오. 그렇다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 혹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님 그분들께 대한 이 삼위의 하나님, 이 삼위라고 할 때는 하나 하나의 별다른 인격이오. 그러나 일체인 거요. 한 분이신 거요. 그러니까 복수로도 쓰고 단수로도 써요. 이사야에게 이사야 6장에서 사명을 주신 때도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며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르쳐서 말할 때에 우리라고 쓴 데가 많이 있어요. 이렇게 복수형을 표시하는 그런 말씀도 있어요. 그러나 단수형을 또 써요. 복수와 단수를... 그래서 ‘내가’라 하는 말을... 이렇게 해서 이 신앙에 대한 그 자기의 이해라는 것이 보편적이고 넓고 풍부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의 신앙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건 지나친 말인 것이오. 
그러면 아직 어린아이와 같아서 많은 지식을 갖지 못하고 미미하게나마라도 가장 요소적인 몇 가지만을 안다고 해서 구원의 신앙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독단인 것이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오. 그러나 자기의 믿는 내용을 아는 것 같은데 보면 ‘예, 그렇습니다. 그렇거니...’하는 정도로, 단순히 그것을 그렇다고 수긍만 하는 정도면 구원의 신앙의 내용으로 족하다? 하는 것도 심히 부족한 태도인 것이오.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원의 신앙의 지적인 요소가 되려면 첫째는 그것을 인지해야 해요. “아, 그렇구나! 그런 사실이 거기 있구나!” 둘째는 그것이 내 것이 되어야 해요. 이 말은 ‘아, 과연 그렇습니다’ 하고 전심을 들여 그것을 잡고 그렇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그런 심정의 움직임이란 것이 발생해야 하는 것이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할 때 성경에서 깨닫는다는 말로써 표현했어요.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깨닫지 못할 때, 해서 깨달음이 좌우를 하는 경우를 이야기하는 때가 거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도 있어요. 그런고로 먼저 이런 깨달음이라는 것, 깊이 마음 가운데 과연 그렇다하고 그것이 결국은 자기의 생명의 문제, 자기의 행보의 문제를 인도하게 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지식 내용이 되는 것이오. 이런 것이 또한 거기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하는 것이오. 
다음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이 신앙의, 구원의 신앙의 지식의 성격이라고 할 때는 그것은 그 진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들은 하나님의 신실성에서 온 것인 까닭에 진리니라 하고 받아들이는 그런 태도, 그건 성신의 것이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그가 가지고 있는 지적 요소의 성격이라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그 진실성에서 나에게 말씀을 주신 그것은 내가 조금치라도 아니라든지, 이유 붙인다든지, 없다든지, 의심한다든지 않고 그것이 진실합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오. 다만 거기에 그 전체의 의미를 잘 모를 때에는 거룩한 불만이라는 것이 거기에 존재하는 거요. 내가 이것을 잘 모르겠는데 무엇인가 하고... 그래서 명확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좋은 태도다 그 말씀이오. 
그런데 그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기본적으로 주의해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것을 바로 아는 동시에 하나님의 그 말씀 가운데서 나에게 대하여서 가르치신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해요. 그런고로 하나님께 대해서 먼저 의로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또한 죄를 추호도 그대로 용인하시는 법이 없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인간들을 이 죄책과 죄의 권세하에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 인간을 건져내시려고 모든 은혜로 그 거룩한 도리를, 거룩한 길을 마련하신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믿는 동시에 나는 무엇이냐 할 때는 나는 완전히 죄 있고 부패하고 사악하고 스스로 거기서 건져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을 절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오. 알고 느껴야 해요. 그리고 그러한 나는 그대로는 절대로 소망이 없지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바 구속, 속죄의 사실 때문에 그 속죄의 사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났다면 구속의 내용이 이해되어야 하는 거라 말씀이오. 
그러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이렇게 근본적으로 신앙의 요소가 되는 이런 지식은 얼마만한 내용을 알아야 하겠느냐 할 때에 그것을 요만큼이면 넉넉하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구원의 은혜, 구원으로 말미암은 그 사람의 은혜의 사실이라는 것은 그 지식이 더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것이 자양과 같이, 그것이 양분과 같이 그에게 들어가서 그가 더 튼튼해지고 건강해지고 견실해지고 자꾸 자라는 것이오. 그러니까 얼마만큼 있으면 너는 족하다 그런 것 없어요. 계속적으로 그는 먹고 계속적으로 장성해 가야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데 최소한도로 얼마만큼 그럼 있지 않으면 영양이 실조되어 버리고 그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된다 하는 보통 일반의 법칙에 우리가 준해서 볼 것 같으면 어떤 꼭 있어야 할 절실한 것들은 거기 있는 것이오. 
우선 신자에게 신앙의 대상에 관한 넉넉한 어떤 내용을, 지식을 줄 만한 것이 먼저 있어야겠다고 지금까지 이야기했죠. 즉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야겠다 그 말이오. 그것이 꼭 필요해요. 참으로 구원을 받은 신앙에게는 적어도 신앙의 대상에 대한 내용과 그것이 나와의 관계를 알아야 하겠는데 이것을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서 먼저 이야기할 때는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는다 하는 이 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어요.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 1,2절을 볼 것 같으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다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바요 그 안에 너희가 굳게 선 것이라 너희가 내가 전해 준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내가 전해 준 그것, 이 복음을 너희가 이미 받고 섰지마는 굳게 지키고, 너희의 믿음이 공허한 딴 데 있지 않고 그릇되게 되어 있지 않고, 허신(虛信)이 아니고 복음에 대한 정신(正信)일 것 같으면 이로 말미암아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래 놓고 그 다음에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했다. 내놓고 복음의 대지들을 이야기를 했어요. 바울 선생이 고린도교회에 이 말을 할 때에는 복음의 대지만을 이야기한 것이지 복음의 상세한 내용을 거기다가 다 한 것이 아니오. 
그런데 거기다가 무어라고 했는고 하니 3절,4절 여기 볼 것 같으면 복음의 대지를 이야기할 때에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즉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그 다음에 둘째번 이야기는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보이셨는데 첫째는 “게바에게 보이시고” 둘째는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12인조요, 열 두 제자라고 가룟유다에게도 보이셨다는 말은 아니고 12인조라는 그 때에 아주 붙어다니는 말이 되었어요. 그들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는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는데 그중에 태반이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어 있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그의 모든 사도에게 보이시고 그 다음에 여섯번째는 “맨 나중에는 만삭되지 못해서 난 자 같은 내게도” 즉 바울에게도 보이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사실과 장사지낸 바 되신 사실과 그 다음에는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라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이와같이 바울 선생이 무엇보다도 너희가 그것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다, 혹은 원문대로 하면 구원을 받아 가지고 그것을 견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을 했어요. 이 복음의 대지를 바울 선생이 말할 때에 그 복음 사실들을 대지로 말 할 때에도 ‘성경대로’라고 했어요. 성경대로, 성경이 이에 참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오. 성경이 우리에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우리에게 이미 알도록 자세히 여러가지 모양으로 가르쳤는데 나는 복음에 대해서 쓸 때에 그것을 추려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다음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 그 말로 딱 그것을 요약해 버린 것이오.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흘만에 살아나서 그 다음에는 누구에게 누구에게 이렇게 다 보였다 하는 말씀이고 사실을 역사의 현실로서 구체적으로 증시를 했다 그 말이오. 이렇게 ‘성경대로’라는 말이 중요해요. 
성경이 이미 참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사실들을 가르쳤다 했지만 왜 이 말을 강조하느냐 하면, 여기는 고린도 이야기지만, 이 성경을 과거에 읽은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과연 그것을 잘 알았느냐? 성경을 쥐고 앉아서 그걸 자기네가 할 것같이 생각하고 있던 히브리의 종교가들과 서기관들이 성경의 내용에 대하여 외기는 열심히 외고 경문을 차고 돌아다니고 하지만 그것을 알았는가? 그것을 몰랐기에 참으로 그 메시아가 오시니까 그냥 죽여 버렸다 그 말이오. 메시아에 대한 대망이 없은 것은 아니지마는 성경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욕심대로, 자기의 주문대로, 자기의 원하는 대로 이렇게 되어야겠다. 이런데서 그 사람들은 성경을 보지만 마치 눈을 훤히 뜨고 앉아서 못 보는 사람과 같이 성경이 그렇게 명확하게 증시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실들을 그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 말씀이오. 그것은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사 비춰주고 또한 보여주시는 그걸로 말미암은 깨달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오. 이와같이 구원의 지적인 요소라는 것도 이러한 확실한 지식의 터 위에 서 있어요. 하나님의 확실성의 터는 그 증거를 믿는 믿음에서 그 말씀이 확실해야 하는 거요. 그 확실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 줘도 우리는 그걸 모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거요. 
여러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상당히 되었어요. 벌써 1세기가 다 되어 가요. 1885년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가 들어와서 성경을 개방해서 모두 읽게 했으면 그때 이래로 지금 앞으로 1985년이 되면 만100년이 되는 거요. 그 이전에 엘렌(Allen)의사가 온 것이 1884년이면 1984년이면 아마 꼭 1세기가 되는 해가 돼요. 성경을 그동안 봤어요.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여러가지 은혜에 대해서 바르게 받고 명확하게 바르게 교회를 운전해 나가도록 하시는 주님의 뜻을 따랐는가 그렇지 않은가 할 때 항상 이런 문제는, 히브리 사람들은 그런 청맹과니같이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이오. 이런 것은 오늘날도 자꾸 발생하는 것이다 그거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태도나, 꼭 알고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신앙을 형성한다는 이런 진지성과 거기에 절실히 붙어 있는 정신이 같으면 항상 이런 이상한 문제가 그대로 다시 반복이 될 것이예요. 
그러면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얼마만큼이나 우리가 알아야 하겠느냐 할 때 복음의 사실을 알아야겠다 그거요. 복음의 사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혹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대로 여러가지로 가르쳐 줄지라도 제대로 알지를 못하고 제 마음대로 가는 수가 많이 있어요. 이렇게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런 사실들, 그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일반에게 다 뻗어 있는 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까지도 마찬가지로 있었어요. 성경이 그에게 증명하는 사실에 의해서 믿고 신앙을 얻어야 할 텐데 사람은 성경이 증명해 주는 사실을 믿고 신앙을 얻는 그 대신, 자기가 보고 만지고 이 현상 세계에서 발생하는 현상 자체를, 현상 뒤에 있는 실재의 세계에서 내리는 하나님의 증거보다 더 중요히 여기는 역도된 현상에 빠져있는 거요. 이것이 흔히 발생하는 일인 거요.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우리가 직접 말을 하고 그랬으면 진리라고 믿을 거예요. 미국에서 어떤 교회에서 북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목사가 되는데 목사 되는 사람에게 그 몇가지 기본적인 서약을 시키려고 하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 있는데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니까 그 사람이 “나는 그걸 안 믿습니다.” “아, 부활을 안 믿습니까?” “예, 난 그걸 지금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 왜 그렇습니까?” “내가 그때 거기 안 있어서 부활하는 걸 못 보았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대답을 했다고 그래요. 그것이 목사되려고 한 사람의 대답이올시다. 그 얘기를 내가 들었을 때 참 이상하게 느꼈지마는 그러나 그 사람이 목사가 안 될 것인데 그래도 안수 받고 목사가 되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자기의 이 시각, 자기의 촉각, 자기의 청각 이러한 자기의 감각 작용에 의한 어떤 현상을 흡수하는 것을 하나님의 실재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영원한 증거보다도 더 중요히 여기는 큰 본말전도의 상태 가운데 빠지는 것이오. 
여러분, 칸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상이라는 것이 어떻게 실재와는 반드시 병행하지 않을 것을 아시지요? 어떤 빨간 꽃을 내다 놓으면 그게 빨간 꽃이라고 해서 이 꽃은 붉다 하지마는 밤중에 깜깜한 속에서 보면 이게 붉은지, 그것이 남색인지, 그것이 검은 것인지 알 길이 없어요. 다 시커멓게 보이지... 그와같이 어떤 일정한 조건, 환경의 조건, 광선의 조건, 하나의 변경에 있어서 그것이 그렇게도 뵈고 이렇게도 뵈는 거요. 그건 깜깜해서 그러지 그냥 붉은 것이라고 얼른 말하기 어려워요. 붉다는 것은 요컨대 우리의 감각에 비취어 우리가 판단한 것인 까닭에 우리의 감각에 빛이 안 비취면 그걸 붉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요. 논리적으로 우리가 자꾸 따질 때는. 이렇게 해서 이 현상의 세계라는 것은 여러가지 조건하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지 비로소 그 조건하에서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하신 증거로서 직접 우리에게 내시해 준 사실보다 중요히 믿는다는 것은 참된 신앙을 일으키는 도리가 아니다 그거요. 
참 신앙을 일으키는 도리라는 것은 그러한 물리적인, 물질적인 사실에서 최종의 증거를 취하지 않고 말씀에서 최종의 증거를 취해야 하는 것이오. 이 점이 우리 교회가 혹은 개혁교회가 역사적으로 늘 강조해 오는 또한 중요한 점이올시다. 말씀에서 최종의 증거를 구하고 나아가거라.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현상의 사실이라는 게 거기 있을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으로 요지부동하는 실재의 사실로 그걸 확언하거나 단정하기 전에 적어도 구원에 관한 일,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에 관한 일, 하나님의 보이신 사실이 더 중요한 것인 걸 알아야 할 것이오. 
이렇게 해서 제자들도 예수님께 대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기의 눈으로 무엇으로 다 보았어요. 보고서는 신(神)을 봤는가? 지금 영을 봤는가 하니까 너희는 날 보고 영 본 줄 알지 말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네가 나를 보는 대로 다 있지 않느냐? 말하자면 실증을, 말하자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바의 차원으로 내리셔서 현상의 세계에서 하나의 현상을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현상에 불과한 건 아니오. 그건 영원한 사실인 것이고 영화의 사실인 거요. 그 영화라는 말뜻은 찬란하다는 그 말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재의 세계의 사실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보여 주시는 사실인 거요. 그걸 보여 주시면서 너희의 빈곤한 감각이지만 이것을 여기서 이제는 간취해라 하는 거요. 
그러시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하실 때는 그것이 최종이 아니었고 거룩한 법칙을 따라서 성경대로 가르치기 시작한 거요. 부활한 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쫓아갔어요. 그 무덤안의 광경을 보고서 그걸 8절 보면 보고 믿었다고 그랬어요. 광경을 보니까 예수님은 부활했구나, 아, 이건 사람들이 도적해 간 것도 아니고 그리고 사람이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가사 상태에 있다가 살아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어떤 신비한 부활을 했다. 그 얘기 그전에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이렇게 리닌을 가지고 전부 세마포로써 발로부터 목까지 다 감고 머리는 머리대로 이제 다 감아 놓는다고. 만일 사람이 가져갔으면 다 들어 갔을게고, 만일 가사 상태에 있다가 빠져 나왔으면 빠져 나오느라고 그것이 새가지고 어디가 터졌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아주 질서가 없어졌을게고 그렇지만 단 유일의 길은 만일 무덤에서 조용히 영화로운 몸으로 빠져 나왔다면 머리에 이렇게 감았던 띠는 그대로 살포시 가라앉았을 게고 몸을 감았던 것도 아무 손댄 흔적없이 고요히 가라앉았을 것뿐이라 그말이오. 가만히 가라앉았을 거요. 긴, 중단하지 아니한 세마포 가지고 이렇게 감아 버렸으니까 그걸 쳐다 보았어요. 요한은, 그 인싸이트(insight)가 강한 요한은 여기 쳐다보고 믿었다고...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을 볼 것 같으면 저들은 아직 성경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리라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더라. 그렇게 가르친 것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성경에 근거를 두고 믿을 게 아니라 자기의 눈으로 보이는 것 가지고 믿은 것이오. 그날 저녁에 제자들은 비로소 성경에 그것을 가르치신 참 뜻을 주께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날 저녁 부활하신 날 저녁부터 제자들은 비로소 성경과 그 거룩한 증거가 구원의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도 아마 실험했을 거요. 
예를들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있었는데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그게 있어요. 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를 보면 엠마오로 갈 때 어떤 나그네가 같이 가시다가 나중에는 그들의 얘기를 다 듣고서 하는 말씀이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 미련하다고 했어요. 나를 쳐다보고 안 믿느냐? 그 얘기가 아니고 누구인지 모르니까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다. 성경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메시아가 이런 고난을 받고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토라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그래서 토라(הרות), 느비딤(םיאיבנ), 케두빔(םיבותכ) 그 때에 있는 성경을 그대로 여기 썼어요. 거기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렇게 엠마오 집에서 예수님께서 같이 떡을 떼실 때 홀연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 바로 그 두 사람은 하는 말이 저희가 서로 말하되, 아,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주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곧 일어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갔다고 그랬어요. 
마음이 뜨거웠다. 성경을 풀어 주실 때 그냥 흥흥하고 그냥 간게 아니라 그 마음 가운데는 그런 간절한 흡수하는 요구 가운데 마치 단비가 내리는 것같이 내리니까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그랬어요. 그 다음에 누가복음 24장에 그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 거기에 가신 일이 있어요. 그리고 모두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딱 닫고 있는데 거기에 나타나셔서 혼령을 본 줄 아니까 그걸 책망하시고 그 다음에는 “여기 먹을,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니까 구운 생선 한 도막을 드리니까 그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걸 잡수셨다 그 말씀이오. 어떠한 영화로운 몸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이오. 그리고 또 하시는 말씀이 이 때에 사람 수는 열 제자가 있었고 그 다음에 그들과 같이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어요. 왜냐하면 엠마오 두 사람은 그때 그들과 같이 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어요. 엠마오 두 사람이 거기에 왔을 때 열 한 제자가 있는 델 갔다고 그랬고 그 다음에 실지 기록은 실지 나중에 계산하면 열 제자밖에 없었다. 
그러면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지마는 왜냐하면 도마는 이 때 없었으니까 그건 그런 것 아니고 이 엠마오의 글로바와 또 한 사람이 갔을 때는 열 한 제자가 다 같이 있었고 또 그와 함께 있는 다른 이들도 함께 있었지마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실 때 쯤에는 그 중에 도마가 무슨 일로인지 없어졌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열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어요. 도마는 나중에 온 다음에 예수님을 우리가 만났다고 하니까 난 안 믿는다 하고서는 인제 실증이 없으면 안 믿겠다고 그랬어요. 거기 그런 것이 있으니까 그런 것보다 가서 성경이 틀렸다고 얼른 속단하지 말라구요. 또 이르시되, 이 열 제자와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토라와 선지자의 글과 느비딤과 시편에 케투빔의 아주 대표적인 책이오. 그 케투빔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그 말이 이것이니라 하시고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주신거요.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고 하는 이 말씀을 거기서 했어요. 이렇게 해서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서 가르쳤다 하는 말이 여기 썩 나타나요. 그러면 이와 같이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시므로 그들은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는 거요. 여기서 언제든지 중요한 것은, 마음이 지식만을 가지고서 신앙을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거요. 
이렇게 사도 바울 선생의 경우를 우리가 보더라도 사도 바울 선생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알고 그랬지마는 다메섹까지 가는 도중에 아직도 절대로 이 복음 사실에 대해서 직접 접촉을 못했다 그 말이오. 그러다가 다메섹 가까이 갔던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비로소 자기가 깨달아서 아라비아에 가서 3년 있으면서 주로 생각한 것이 과거에 읽었던 그 여러가지 말뜻이 결국은 이 분에게 이렇게 실증돼서 이렇게 이룬다는 걸 아는 것이다 말이오. 그리고 사도행전 16:14을 보더라도 바울 선생이 빌립보에 갔을 때 거기에 몇 사람들이 앉아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유대교도들이 있는데 그중에 두아디라 성에서 비단 장사를 하고 있는 성사람으로서 여자로서 비단 장사를 하고 있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어서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여기도 마음을 열어 주신다고 그랬어요.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듣고 따라가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 그랬어요. 이렇게 중요한 것은 항상 듣고 그 마음문을 열어 주시면 듣고서 깨닫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요. 그러므로 ‘저희 마음을 열어’라고 아까 누가복음 24:45에도 말씀을 했고 또 ‘마음이 뜨거웠다’고 32절에도 말씀을 했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그것을 듣고 ‘깨닫도록 가르치셨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듣고 깨닫는 바가 없이 덮어놓고 그냥 마음으로 그렇거니 그냥 인정이나 하고 지나는 정도라면 그것이 구원의 신앙으로서 발전 않는거요. 여기 45절에 보면 ‘저희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서 깨닫게 하셔야 하는 거요. 구원의 신앙의 지적 요소라는 건 이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터를 두고, 하나님의 내리신 그 증거에 터를 두고 성신님이 역사하시어 그 사람의 속에서 마음을 열어서 들은 다음에 깨닫게 하시면 비로소 청종한다 즉 따라가는 것이라 말이오. 그대로 따라간다. 이런 요소가 있어서 즉 구원의 신앙의 확실한 자태를 나타내는 것이오. 그런 줄 아시고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의 신앙의 지식, 무엇보다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 첫째는 복음의 내용인데 이 복음의 내용을 바울 선생이 말한 그 대지 한 가지만 알면 된다는 게 아니라 내용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말이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무얼 의미하는가를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쳤다고 그랬어요. 유대사람은 보아도 무엇인지 몰랐었지마는 오늘날 그걸 보고도 거기에서 깊은 걸 깨달으려고 않지마는 그러나 주의해서 우리가 보고 성신님을 의지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랄 때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터득해 나갈 것이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도 
거룩하신 주님이여, 주께서 저희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사 그 말씀을 주시고 말씀을 상고할 수 있게 하시고 상고 할 때에 제힘으로 될 수 없는 것도 알려주시며 그러므로 저희들은 당연히 성신님을 의지해서 이것을 듣고 깨닫도록 하시는데 저희 마음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여 간절히 구하고 이 갈구하는 심정에서 말씀에서 가르치신 그 거룩한 도리를 흡수하고 성경께서 마음문을 열어 주시사 깨닫게 하시는 대로 그 깨닫는 사실은 요지부동한 진리로서 저희 안에 있어서 그것이 구원의 신앙의 지적 요소로서 확연히 서 있어야 하겠사옵니다. 주님이여, 불쌍히 보시고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암매를 제거하시고 그리스도의 그 복음 사실에 더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친 그 풍요한 내용들을 그걸 다 수락하게 아무렇게라도 생각하지 말고 저희들의 구원의 사실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하시고 확실한 터 위에서 구원의 신앙을 받은 자로서의 생활이 있게 하시고 이리하여 그것이 필연적으로 우리의 전체의 생활, 의지의 생활에 표현되어서 생활과 행동과 또한 우리의 행보를 정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