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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신약설교

요셉과 동정녀 탄생

요셉과 동정녀 탄생 

고재수 교수

동정녀 탄생을 기록한 신약의 두 구절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1장의 이야기를 비교하면 각각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마리아의 눈을 통해 이 사건을 묘사합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합니다(눅 1:31). 반면에 마태는 이 사건을 요셉이 경험한 대로 묘사합니다.
천사가 꿈에서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지시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출생도 요셉의 관점으로 묘사합니다.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25). 
마태가 요셉을 주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요셉이 믿음의 영웅으로, 기독교인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일까요? 이 점이 이 이야기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에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이 믿음의 영웅으로 그려진다면, 우리는 요셉을 모범으로 삼아서 주목하고, 요셉이 자기의 상황에서 그러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상황에서 신실하여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은 요셉을 믿음의 영웅으로 그리려는 것이 마태의 목적이 아니라면, 왜 마태는 요셉을 주목하는 것일까요? 마태는 심지어 요셉의 생각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 사건에서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는 것을 잘 알기 위해 마태의 묘사를 자세히 따라가 봅시다. 
요셉이 배제됨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요셉과 마리아가 당시에 이미 혼인한 상태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개정표준역(RSV)에서 사용된 ‘정혼’(betrothed)이라는 표현은, 신국제역(NIV)에서 ‘약혼’(pledged to be married)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오늘날에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여기에서 이 둘이 이미 혼인한 상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요셉을 ‘그녀의 남편’(1:19)이라고 하고, 마리아를 ‘그의 아내’(1:20,24)라고 합니다. 요셉이 이혼을 고려하였다는 사실은 요셉과 마리아가 이미 남편과 아내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냅니다(1:19). 
여기에서 그려진 상황은 이스라엘에서 일반적이었지만, 오늘날 우리 서구 사회에는 생소합니다. 양가(兩家)가 혼인 계약(marriage contract)을 하면 그 소년과 소녀는 법적으로 혼인한 사이로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계약은 여자가 어릴 때, 12세가 채 되지 않아서 작성될 수도 있었습니다. 법적인 남편이 아내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 때까지 몇 년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혼인 문서를 작성한 시점부터 이들은 이미 남편과 아내로 여겨집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18에 묘사된 요셉과 마리아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이 분명해진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마태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신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 구절을 언뜻 보면, 다른 사람들이 마리아의 임신을 알아차리게 되었다는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다고 해도, 성신의 사역을 통하여 임신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임신 사실을 알 뿐 아니라, 그것이 성신의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오직 한 명, 마리아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마리아 자신이나 그 곤경에 주목하지 않고 요셉을 강조합니다. 마태는 마리아가 요셉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을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그녀는 그 임신이 성신의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라는 것도 말했을까요? 그랬을 것이라는 증거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요셉이 혼인 관계를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부정을 행했으리라고 요셉이 생각했다면, 가만히 끊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혼인 관계를 실제로 끊으려고 했지만, 마리아에게 수치를 주는 방법으로는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무언가 불명예스러운 일을 하였다고 요셉이 생각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둘째로,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를 데려오도록 촉구할 때 다음과 같은 특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요셉은 마리아에게 화가 났거나 실망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에 요셉은 특별한 아이를 잉태하는 중요한 일에 성신께서 마리아를 요구하셨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자기의 혼인 상의 권리를 감히 주장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신께서 하시는 일을 위해 자기의 혼인 권리를 포기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요셉은 이 일을 명예롭게 해결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근거로 재판관들에게 가서 공식적인 이혼을 승인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으로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혹은 요셉이 마리아에게 개인적으로 이혼 증서를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결백하지만, 요셉은 어린 아내를 버렸다고 비난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셉이 마리아를 떠났고 마리아는 요셉에게서 놓였다는 증거를 마리아만 가지게 될 것입니다. 
최종 결과는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잃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러한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위해 마리아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이 강한 믿음을 나타냈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히 이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을 기꺼이 하려 했습니다. 설사 중매결혼이었다 해도 요셉이 마리아를 사랑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요셉이 생각한 이혼 방식은 아내를 버렸다는 수치를 스스로 감수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이를 행하여 마리아를 놓아주려 했습니다. 요셉의 강한 믿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가 요셉을 믿음의 영웅으로 그리고 있습니까? 본문을 정직하게 읽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마태는 1:20을 ‘요셉이 이를 고민하였다’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가졌음 직한 감정은 전혀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실망감, 장래에 대한 걱정, 혼인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혼인이 파기되는 것에 대한 슬픔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셉 자신이나 그의 경험이나 감정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처지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태의 기록은 시작부터 다른 사람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마태는 요셉이 어떻게 믿음의 시험을 받고 그것을 이겨냈는가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셨지만, 마리아의 법적인 남편인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을 통해서도, 심지어 의로운 요셉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구주이신 예수님은 신적인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신의 특별한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셉이 믿음의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이 이야기에서 배제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주님이 필요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 이 땅에 오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의 구원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구주님은 성신을 통해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여기, 곧 구주님 생애의 맨 처음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1:19)까지도 배제되어야 했습니다. 요셉이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의 한 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실한 요셉도 동정녀 탄생에서 배제된 것은 우리가 우리 구원에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가 됩니다. 
요셉이 관련됨 
요셉이 조용히 혼인 관계를 끊고자 할 때, 하나님의 천사가 꿈에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떠나지 말고 집으로 데려오라고 분부합니다. 혼인의 첫 번째 법적인 단계에서 두 번째 개인적인 단계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모의 집을 떠나 남편인 요셉의 집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아이는 요셉의 집에서 출생할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아이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지만, 요셉의 장자의 지위를 얻어야 합니다. 
천사는 요셉이 수행하여야 하는 임무를 하나 더 말합니다. 요셉은 아이를 “예수”라 이름 지어야 합니다. 천사가 그 이름의 중요성을 말하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그 이름의 의미를 파고들 필요는 없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이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아이를 자기의 아이로 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합니다.
요셉은 천사가 지시한 두 가지 사항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아내를 집으로 데려왔으나, 동침하지는 않았습니다(1:24). 동침하지 않은 것은 천사가 명시적으로 지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았을 때, 이름을 예수라 지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요셉이 자신을 믿음의 영웅으로 나타내려 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요셉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행동에서 영웅적인 요소를 얼마나 찾을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요셉이 천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을까요, 아니면 마리아와 혼인하게 되어 하여튼 기뻤을까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요? 성경이 요셉의 고뇌와 승리를 언급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와는 다른, 훨씬 사실적인 측면에 주목합니다. 
이것은 천사가 요셉을 “다윗의 자손”(1:20)이라고 부르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마태복음 시작 부분의 계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1:1)로 소개합니다. 다음에는 다윗을 ‘다윗 왕’이라 부릅니다(1:6). 예수님은 요셉의 양자로서 법적으로 왕족에 속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집에 약속된 위대한 왕이십니다(사 9장). 
그러나 다윗 왕가는 얼마 못 가서 쇠락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자손들은 바빌론 유수(幽囚) 시절에 잊혀지고 미미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왕가는 새로운 왕을 내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약속된 왕이 다윗에게서 날 수 없다는 사실의 최종적인 증거는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요셉의 양자 삼음을 통해서만 구주님은 다윗 왕가의 법적인 자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요셉이 믿음으로 행동하여야 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점은 요셉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에 위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역사는 다윗의 왕가가 이러한 약속을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기억하시고 다윗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인 요셉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 마리아를 집으로 데려 오게 하시고, 마리아의 아들을 양자로 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모두 실현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의 이야기는 참으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신앙 영웅의 좋은 예로 제시하여서 우리를 격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가 요셉의 고뇌와 승리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으므로, 요셉의 모범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참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동정녀 탄생의 일에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오늘날 우리 안에서 주님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더욱 배울 수 있습니다.
1. 예를 들어 J. Van Bruggen의 주석, Matteus; het evangelie voor Israel (Kampen: Kok, 1990) 34를 보라. 
2.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Davies와 Allison은 “성신으로”라는 말을 편집자의 첨언(editorial comment)으로 이해한다. 그들에 따르면, 마태는 마리아는 잘못이 없고 성신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이해하도록 일찌감치 여기에 이 말을 덧붙인 것이다. W. D. Davies, D. C. Allis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ICC; Edinburgh: T.&T. Clark, 1988) 200을 보라. 
3. 예를 들어 D. A. Hagner, Matthew 1-13 (WORD, Dallas: Word Books, 1993) 21을 보라. 
4. 원문 출처: Clarion, 46권 (1997). 번역: 이경훈(안양: 강변교회 교인). 이 원문의 한국어 번역에 대하여 저자의 서면 허락을 받았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