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존스는 칼뱅주석을 무척 사랑하였다. 그의 장인이 혼인선물을 뭘 받고 싶냐고 물었을 때, 칼뱅 주석을 말하고 선물로 받았다. 여름 휴가 때는 해변에서 정장을 한 체로 파우치에 누워 칼뱅 주석을 읽을 정도였다.
그를 회중파에 웨슬리안라고 하는 말들은 참 기가막고 무지한 소리다. 물론 성령세례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전통적인 개혁파와 온도차가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들은 개혁파 안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그가 속한 교단은 웨일즈 장로교단이라 불린다. 이 교단은 휘트필트에 의해서 시작된 교단이다. 대부흥의 시대를 연 사람이 바로 휘트필트다. 그로부터 시작된 교단이다. 휘트필트가 부흥을 인도할 때, 웨슬리는 미국서 선교를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모라비아 형제들을 만났고 충격을 받은 웨슬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회심치 않은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모리비아 형제들 모임을 찾아 올더게이트 거리의 서점에 갔다가 거기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회심을 한다. 이게 그 유명한 올더게이트 회심이다. 웨슬리는 여러가지로 좌충우돌 여정이 많았다. 그는 결혼생활도 매우 순탄치 못해서 그의 아내는 기독교 삼대 악처로 불릴 정도다. 그러나 이일의 직접적인 책임은 웨슬리 자신에게 있다. 그는 신학이나 삶에서 안정감이 있지 않았다.
그런 그를 휘트필트가 불러서 부흥사경회 설교자로 세웠다. 웨슬리의 감리교회만 우리가 기억하지만 이 부흥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한 설교자가 휘트필트다. 그리고 그가 애용하던 주석이 메튜헨리다. 어떤 때는 주석의 일부를 찢어 강단에 바로 오르기도 했다.
이 시기 부흥의 출발점은 휘트필트였고 영국의 부흥이 미국으로 퍼져 에드워즈의 대각성운동으로 번진다.
이 휘트필트는 칼뱅주의자였다. 그 전통에 선 역사적 교단이 웨일즈 장로교단이다. 칼빈주의적 감리교회로도 불린다. 그러니까 이 감리교 곧 메소디즘의 출발점은 웨슬리가 아니라 휘트필트였다.
이 휘트필트는 웨슬리와 사이가 나중에 안 좋아져서 갈라선다. 신학적 차이 때문이다. 웨슬리는 에드워즈에 대한 열등감도 많아서 그의 저술을 비판하기 일쑤였다.
그에 비해, 에드워즈에 의해 시작된 영적 대각성운동은 휘트필트의 영향을 일부 받았다. 같은 칼뱅주의 신학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께서 일으키신 영적 추수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로이드존스를 회중파 웨슬리안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지한 말이다. 휘트필트로부터 시작된 감독교회 전통의 장로교회의 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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