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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창조 이야기

사람은 자기 이미지라는 것을 갖습니다. 거울을 보면 자기인 것을 알아보죠. 몇몇 고등 동물도 거울 속 이미지가 자기인 것을 알아 봅니다.
그런데 사람만의 독특한 능력이 있습니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말한 독일 한 동굴에서 나온 사자머리를 한 인간 조각상이 그것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들, 야누비스, 세트, 호루스 등은 다 짐승 머리를 한 사람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신농신은 소머리를 한 사람의 형상이죠. 복희와 여와는 사람 몸에 하체는 뱀의 모양을 한 신이며, 블레셋의 다곤은 싸이렌으로 알려진 하체는 물고기에 상체는 사람인 신입니다.
이는 종교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복합하는 사람만의 특징입니다. 즉, 이런 이미지 복합 능력과 종교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왜 종교에는 이런 이미지 복합이 생겼을까요? 완전 종교적 관점에서 그것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렇습니다.
여호와 종교는 계명 중 하나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금지합니다. 이 이미지 복합이 하나님께는 매우 거슬리는 현상이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일에 이것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에 구약의 기술은 매우 완고하게 이것을 금지하고 큰 죄로 여깁니다.
사실 사람은 이 이미지를 통해서 서로 교류하고 소통하는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방문한 웹페이지를 빨리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쿠키 파일을 남기듯이 우리는 타인을 빨리 파악하기 위해서 이미지 파일을 뇌에 남깁니다. 이를 통해서 소통과 교류를 하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성경 계시를 통해서 그 이미지를 형성하시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최종적 형태는 하나님 형상의 원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타락은 종류대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를 허무는 복합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유다서가 보여주는 타락의 한 단면은 천사와 인간의 혼종입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_같은_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1:6-7). 여기서 6절은 태초의 사건을 7절은 소돔의 사건인데 이 둘이 같은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범죄를 동성애라고 말하고 동성애를 영어에서 sodomite라고도 하지만 실제 창세기의 기술은 롯의 집을 찾아온 천사를 상관하려는 소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롯이나 아브람, 그리고 소돔 사람들은 그들이 천사인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영화 노아에서도 나왔지만 창세기의 네피림은 유다의 여러 전승에서 바로 이 천사와 인간의 혼종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계통과 질서가 깨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셨습니다.
고대신들이 짐승과 사람이 섞여 있는 형태를 하는 것 역시 이런 범죄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에덴에서 뱀과 사람이 서로 말을 섞는 사건 역시 당시 짐승들을 오늘날 동물로 생각할 수 없는 요인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동물은 지성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최근 많은 연구에서 깨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 혼합으로서 이방 신앙은 아마도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에 그 기원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부재한 자리에 각종 짐승과의 혼합으로서 신상이 등장한 것이죠. 아마도 태초에 에덴의 짐승들은 지금과 다른 종류의 몸을 지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것은 추정입니다. 사실관계는 확인이 불가합니다. 성경에도 근거가 없으니까요. 다만 천상의 묘사에 등장하는 네 영물은 이런 상상이 가능하게 합니다.
즉, 옛 뱀은 지금의 단지 뱀이 아니라 영적 존재였던 것처럼, 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에덴의 짐승들은 물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중간 상태나 그 어디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에덴의 화염검은 사실 인격적 존재입니다. 루터가 옆 동료가 번개에 맞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은 이런 성경해석 때문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과 상이한 상태의 에덴의 상태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물도 지금 우리가 만지는 물리적 물이 아니라 형태가 주어지기 전의 질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제일질료 같은 느낌이며 고대 근동 신화 속의 "압수", 중국 도가 사상 속의 "태허" 같은 느낌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쓸 표현이 없어서 "물"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죠. 물에서 하늘도 나오고 물에서 땅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성령께서 날개로 덮는 장면(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는 그리스도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는 장면과 묘사하는 바가 같습니다. 영어에서는 hovering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새로운 아담, 또는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육신을 하시고 이제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이 바로 그의 세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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