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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의 주기도문

마틴 루터의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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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교수
‘복음’의 재발견
루터는 그의 수도원 생활을 통해 중세적인 구원론 때문에 고민했다. 루터는 사람의 선행을 보고 상주시고, 악행을 보고 벌하시는 식의 하나님의 의를 믿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지, 상대적인 도덕적 선행이나 덕행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시거나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민은 어거스틴 이래로 중세 수도원 전통을 통해서 내려오는 바, 하나님 존전에서 경험하는 “자기 성찰적인 양심”an introspective conscience의 고민이었다. 이것은 루터가 복음을 발견하기 전에 가졌던 “시험”Anfechtung1으로서, 그의 복음 이해로 인도하는 길잡이였다. 그래서 루터는 「신약의 서론」에서 복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 환영할만한 정보, 환호성,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 노래하게 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헬라어의 ‘유앙겔리온’이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커다란 환호성이 있었고, 무시무시한 대적이 죽었으며 자유와 평화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가슴 벅찬 소식이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졌다. 그러자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복음인 신약은 한 편의 좋은 소식이자 함성이다. 그것은 사도들에 의해서 온 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죄와 죽음과 마귀와 싸워 승리를 획득한 참된 다윗을 선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분은 죄에 묶이고 죽음에 의해 위협을 받고 마귀에게 억눌렸던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그 분은 그들을 구속하였고 의롭다 하였으며 그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줌으로써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며 하나님께로 다시 인도하셨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그들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에 확고하게 서 있기만 하면 언제나 행복할 것이다.2
‘율법과 복음’
그런데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자연인에게 죄 인식을 갖다 주는 거룩하시고 심판주 되시는 하나님의 도구다. 자연인의 가장 고상하고 훌륭한 그 어떤 성취도 율법의 심판 하에 있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오직 복음을 믿어 구원칭의을 얻는다. 그래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Law and Gospel은 그의 구원론에 입각한 성서해석의 열쇠요, 이신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규정한다. 
루터는 1531년에 출간된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성숙한 가르침을 보여줌으로써 복음에 대한 이해를 더욱 명료화시켰고, 이 맥락에서 자신의 ‘이신칭의’ 신학을 다시 한 번 철저하게 정의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율법은 무엇을 행해야 하고, 무엇을 행하지 말아야 하나를 설교한다. 율법은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했을 때 혹은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고발한다. 율법은 이런 식으로 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반대로 복음은 죄 사함과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율법의 완성을 설교한다바이마르판 루터총서, 57, 59, 18. 특히 루터는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 성령의 역사로 믿는 사람은 율법의 고발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이와 같은 심판의 경험과 불가 분리하게 ‘복음’을 경험하는 것으로 본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작용하여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하며 유죄 판결하고 처형하기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발했고 정죄했으며, 유죄 판결했고 처형했다고 역설한다. 
끝으로 루터는 율법의 두 가지 기능을 주장했다. 하나는 율법의 정치적 사용이고, 둘은 율법의 영적인 사용, 신학적인 사용 혹은 고발적인 사용이다. 전자는 국가의 정부나 인류사회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질서에 관한 것으로 대체로 실정법을 일컫는데 이는 자연법을 그 근거로 하고, 후자는 이미 언급한 율법의 고발적인 기능을 말한다. 
캘빈 신학에 있어서 ‘복음과 율법’
하지만 캘빈 역시 ‘율법과 복음’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복음과 율법’에 무게를 두고 있다. 캘빈은 십계명의 머리말을 ‘복음’으로 본다Inst. Ⅱ. ⅷ. 13. 캘빈은 ‘율법’ 이해의 대전제로서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 31:33를 언급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이 되고 모든 그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신 7:6; 14:2; 26:18~19하셨음을 강조한다. 캘빈에 의하면 십계명에서 출애굽의 ‘복음’ 혹은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루터는 율법의 제2사용까지만 주장하였으나, 캘빈은 ‘율법의 제3사용’을 주장하였다을 사는 것이 온다.
신약성경적으로 말하면, 성령의 역사로 사도적 복음을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출애굽 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중적 사랑=십계명의 요약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즉 캘빈은 복음을 통해서 칭의 받은 기독교인들이 율법의 제3사용에 해당하는 성경의 요구와 명령예언자들의 목소리, 예수님의 원수 사랑을 포함한 산상수훈, 사도들의 훈령들에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와 같은 ‘율법의 제3사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전제하지만 말이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란 주제를 비판적으로 수용한 캘빈은 언약신학의 맥락 혹은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복음과 율법’이라고 하는 주제를 제시했다. 루터는 율법의 고발적인 기능에 강조점을 두었고, 캘빈은 율법의 ‘제3사용’에 무게를 두었으나 두 신학자 모두 ‘복음’을 성경의 중심으로 본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이 복음이 율법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서 루터는 율법이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캘빈은 은혜의 언약 혹은 은혜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고, 그에게만 영광 돌리는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이상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논리로 주기도문을 하나님의 명령율법=제2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루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을 하나로 묶었다으로 보았고, 캘빈은 ‘복음과 율법’의 논리에서 주기도문을 율법=하나님의 명령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루터의 ‘율법과 복음’은 주기도문기도을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했던 중세 전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으나 이와 같은 해방이 ‘기도’를 소홀이 여기게 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캘빈과 개혁교회의 ‘복음과 율법’은 루터와 루터교 전통보다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기도가 지니는 신학적인 자리와 기능과 역할을 더 강조하고 있으나 기도를 율법주의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 그리고 복음과 율법은 긴장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십계명,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
주기도문이 기도 중의 기도요, 십계명은 계명 중의 계명이라면, 사도신경은 신조 중의 신조다. 이 사도신경은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항목들을 사실의 형태로 그리고 단순한 성서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어거스틴 이래로 중세와 종교 개혁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은 기독교 메시지의 근본에 해당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신학자들은 이 셋을 하나로 묶어서 자신의 신학을 펼치곤 했다. 즉 이 셋은 우리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신앙을 지닌 다음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루터는 그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다음 1529년에 「소교리문답」과 「대교리문답」을 동시에 출판했다. 전자는 평신도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리교육 지침서였고, 후자는 목사들과 설교자들을 위한 교리교육 지침서였다. 그런데 이 교리문답에서 루터는 ‘십계명’,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을 논하였다. 이 셋은 이미 지적한 대로 어거스틴 이래로 기독교의 핵심 가치로 여겨져 왔다. 그러면 왜 루터는 이 셋을 그와 같은 순서로 논하였을까? 
우리는 앞에서 루터의 ‘복음’ 이해와 ‘율법과 복음’ 이해를 제시한 바 있는데,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는 그의 신학논리에 입각하여 ‘십계명’을 율법으로 보았고, ‘사도신경’을 복음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기도문’의 신학적인 자리와 기능은 무엇인가? 루터는 ‘율법’십계명을 통해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신학적인 논리에서 율법은 우리가 행해야 할 의무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행치 못하였는가를 고발하고 폭로시키는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고발을 받을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무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연약하여 이를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하는 뜻에서 주기도문의 필요성과 목적을 제시했다. 
루터의 다음과 같은 주기도문의 신학적인 자리와 목적과 기능은 주기도문 해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것이 ‘율법과 복음’ 논리에 있어서 ‘율법’에 속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무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고십계명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사도신경에 대해 들었다. 가장 선하고 가장 크게 복 받은 삶이란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할 차례다. 인간은 비록 그가 믿기 시작했다고 해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우리의 육체와 더불어 사탄 마귀는 그의 모든 권세로 우리의 이와 같은 노력을 저항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신앙과 십계명에 대한 순종을 주시고, 보존하시며, 증가시켜 주시고, 십계명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시도록 끊임없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와 같은 기도를 하나님의 귀가 닳도록 하나님께 올려야 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직접 아래서 논할 것처럼 그 방법과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3
그러면 이상과 같은 루터의 주기도문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캘빈 및 개혁교회장로교회의 그것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가? 이미 ‘복음과 율법’에서 본대로 캘빈은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에 따른 삶을 영위하는 것을 루터보다 더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율법의 제3사용’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논리에 있어서 주기도문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는 ‘이중적인 사랑’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잘 행할 수 있는가에 무게를 둔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기독교인들이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제3사용인 것이다.
이와 같은 캘빈의 주장은 16세기 독일 개혁교회의 그 유명한 교리문답서인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의 구조에서도 매우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교리문답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Ⅰ장은 “인간의 비참함과 고뇌에 대하여”, 제Ⅱ장은 “인간의 구속에 대하여”, 그리고 제Ⅲ장은 “감사에 대하여”로 되어 있다. 본 교리문답은 첫째로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에 대해 논했고, 둘째로 이와 같은 인간은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어서 사도신경을 고백해야 한다고 했으며, 셋째로 죄와 허물이 많은 죄인인 인간이지만 복음과 성령으로 구원을 받아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이중적인 사랑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연약하여 넘어지기 쉬우니 기도주기도문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으실만한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제Ⅲ장 “감사에 대하여”에서 십계명 해설과 주기도문 해설을 함께 묶어서 다루었다. 하지만 필자는 캘빈과 개혁신학이 루터의 기도의 신학을 받아들여서 발전시켰다고 보기 때문에 루터의 주기도문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다.4
주기도문 해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주기도문의 신학적인 자리와 역할과 기능을 이해하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마틴 루터의 「대교리문답」 “The Large Catechism(1929)”, in The Book of Concord, trs. and ed. Theodore G. Tappert, Philadelphia: Fortress Pres, 1959.에 나타난 루터의 주기도문 해설을 소개하려고 한다. 루터는 주기도문을 7개 항목으로 나누어서 해설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가 받아들인 새로 번역된 주기도문 본문에 따라서 7개 항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 2.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5.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 
6.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7. 악에서 구하소서.
루터는 7개 항목을 신학적으로 해설하기 전에 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신경은 ‘복음’으로, 그리고 십계명과 주기도문은 ‘율법’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로 루터가 ‘기도’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루터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제2계명이다. 제1계명과 제2계명을 하나로 묶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으로 보기 때문이요p.?420~422, 둘째로 그것이 응답된다?마 7:7~8; 시 50:15고 하는 약속 때문이요?p.423, 셋째는 주기도문의 7개 항목으로 우리의 필요를 소상히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하는 당위성?=율법 앞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루터는 ‘우리의 필요’?our needs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입에 우리가 사용해야 할 말들을 넣어 주신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얼마나 진지하게 관심하고 계시는가를 안다”p.423고 언급했다. 이제 아래에서 우리가 소개하는 주기도문의 7개 항목은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우리의 필요들이다. “우리들과 타인들 모두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필요들은 주기도문에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p.424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 중 제2계명을 따라서,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약속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밝히 보여주신 우리의 필요들을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인간의 욕심과 세상적인 양심에 따른 우리의 필요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우리의 필요들을 따라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아래에서 7개 항목들 각각에 대한 루터 자신의 해설을 요약해서 소개한 후 곧 이어서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평가를 시도하려고 한다.
1.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가 이미 거룩한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그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들이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p.425라며,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은바 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마치 자녀들이 언행과 삶을 통해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 역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주기도문의 지금 이 항목을, 십계명의 제2계명“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다음의 인용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말과 행동으로 망령되게 하는 예에 해당한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은 말이나 행동에 의하여 더럽혀진다. 우리가 지상에서 하는 모든 일은 말 혹은 행동으로 분류된다. 첫째로 사람들이 거짓을 덮고 받아들일 만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되고 속임수가 있는 그 무엇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가장 나쁜 더럽힘이요 불명예다. 그리고 맹세하기, 저주하기, 마술 걸기 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잘못 사용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공개적으로 악랄하고 사악한 행동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경우인데, 기독교인들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음행한 자들이요 술 취한 자들이요 욕심쟁이들이요 질투의 사람들이요 비방하는 사람들일 때를 말한다. 이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들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모독되어짐에 틀림없다.p.425
평가 
루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하여는 해설하지 않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사역 덕분에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과 사도들과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하늘’이란 물리학적인 하늘sky이 아니라 천사들의 찬양과 섬김을 받으면서 영광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거처로서 피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p.381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이곳에서 아들과 성령을 이 땅 위에 파송하셨고, 아들은 부활승천하시어 아버지 우편에서 전권을 가지시고 인류와 우주만물을 성령을 통해 다스리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장차 이 하늘로부터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다시 오실 것이고,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실현될 것이다. 새로 지음 받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 하늘이 땅으로 내려와 새로 지음 받은 땅과 땅의 모든 것과 연합을 이룬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다름 아닌 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에 해당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 그 자체가 거룩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또한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는 칼 바르트와 더불어 이미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드라마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은 것이고, 이것을 근거로 그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장차 온 창조세계가 인류와 더불어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성령의 권능으로 인간과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아들과 성령을 영화롭게 하셨고, 아들은 타락한 인간과 창조세계를 구속하심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고, 성령께서는 그의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사역으로 아들과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다. 거룩하게 함의 극치는 영화롭게 함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루터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 자체에 있어서 거룩하지만 우리가 그것이 우리들 사이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기도가 없이 스스로 임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p.426는 역설적인 진리를 주장했다. 인간의 이성은 두 가지 상반된 명제가 동시에 타당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인간의 유한성과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나타내신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들과 더불어 압도적이 되도록 기도해야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가 꽃 피어나는 무리들 가운데 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p.426. 그러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루터는 복음을 성령의 역사에 의해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들이 사도신경에서 배운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악마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시고 구출해 내사 자신에게 가져가시며 죄와 죽음과 악한 양심에 대적하여 의와 생명과 구원의 왕으로서 우리들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위해 그의 성령을 주셨으니,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 그의 거룩한 말씀His holy Word을 통해 그것을 가르치시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들을 신앙으로 조명하시고 강하게 하신다.p.427
그래서 루터는 이 모든 것이 우리들 안에서 실현되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 자신의 거룩한 말씀과 우리의 기독교적인 삶을 통해 찬양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계속해서 신앙 가운데 머물러 있고 매일 같이 성장하며, 나아가서 그것이 온 세상에 있는 불신자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특히 루터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불신의 사람들이 이 은총의 나라로 들어 올 수 있게 해야 한다p.427고 주장한다. 
루터는 이상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들에게 도래한다고 본다. 첫째는 시간 속에서 그의 말씀과 우리의 신앙을 통해 도래하고, 둘째는 마지막 계시혹은 그리스도의 재림를 통해 영원 속으로 도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역시 두 가지로서 하나는 아직 하나님 나라 안에 있지 아니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도래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둘은 그것을 이미 얻은 우리들에게 그것이 시간 속에서와 영생에 있어서 모두 매일매일 성장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사탄 마귀와 지옥의 권세가 완전히 멸절되고 우리들이 완전한 의와 복락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을 희망하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들 사이에서 압도적이 되도록 기도할 것을 힘주어 말한다. 루터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은 기도다. 즉 ‘사랑하는 아버지, 우리가 당신께 기도합니다. 우리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주시어 복음이 온 세상에 진지하게 설교되고 그것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며 우리들 안에서 역사하고 살아있게 하시옵소서. 그런즉 우리는 사단 마귀의 나라가 전복되어 더 이상 우리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사탄 마귀의 나라가 전적으로 파멸되고 죄와 죽음과 지옥이 박멸되어 우리들이 영원토록 완전한 의와 복락 가운데 살 수 있게 하시옵소서.p.427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빵 한 조각이나 이 세상의 썩어질 그 무엇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한없이 고귀한 보물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루터는 예화를 하나 들고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권력을 누리는 한 황제가 한 거지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했을 때, 이 거지가 그에게 빵 한 조각만을 간구했다면 그가 얼마나 바보인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루터는 우리에게 배를 만족시키는 것이나 이 세상의 썩어질 그 무엇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간구하라마 6:33고 당부하고 있다. 
평가 필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핵심을 ‘복음의 재발견’이라고 했다. 위의 본문에서 루터는 이 ‘복음’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믿음으로 우리들에게 경험될 때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와 지옥의 권세는 물러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와 복락으로 우리들을 다스리신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이 성령을 통해 시간 속에서 신앙으로 시작되어 성장하며 영원의 차원에서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처럼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했다. 확실히 루터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속에서 시발될 수 없고, 성장될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하지만 루터는 이상과 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장을 그의 ‘두 왕국론’을 전제로 논했다. 즉 그는 세상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왕국’?the Kingdom of Christ과 사탄 마귀와 죄와 죽음과 지옥에 의해 통치를 받고 있는 ‘세상 왕국’?the Kingdom of the World을 이원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특히 루터에게 전자는 ‘복음’이 다스리는 나라요, 후자는 ‘율법’이 다스리는 나라다. 이처럼 루터는 교회와 세상을 이원화하여 하나님 나라를 믿는 사람들의 심령 혹은 교회 안에 가두어 놓는 경향으로 기울어진 나머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도록 하는 측면에서는 매우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루터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과 근본주의 교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의 신학을 외면하게 만들었다. 
또한 루터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서 부족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편적·객관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 위에 도래했고, 장차 그것이 완성될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다. 다분히 루터는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수용믿음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집중했다. 때문에 성령강림 이후 화해된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이 땅 위에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도외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된 교회 공동체는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인류 및 창조세계와의 화해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통해 성령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의와 샬롬을 미리 맛본 기독교인들은 보편사 속에서 진행되는 정의와 평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보편사와 창조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루터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포함되고,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그의 모든 보물들과 함께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p.428고 하면서, 우리는 이 둘 안에 머물러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복음, 신앙, 성령과 같은 가장 핵심적인 가치들을 위하여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사탄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속함을 입은 우리들을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p.428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실현될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보물들을 확고히 붙들고 있으려면 처음 두 가지 간구의 성취를 방해하고 전복시키려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온갖 공격들과 침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p.428 즉 우리는 앞의 두 가지 간구에 나타난 하나님의 불변의 뜻이 사탄 마귀의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이 땅 위에 실현될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 나라를 공격해 오는 사탄 마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고, 받아들여지거나 믿어지며, 열매를 맺을 때에 거룩한 십자가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p.429이라고 했다. 그는 “소유, 명예, 집과 가정, 부인과 자녀들”까지도 “우리의 육체와 옛 아담”을 근심케 하여 사탄 마귀에게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시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박해하고 억압하거나 당신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탄 마귀 혹은 우리의 원수들 혹은 그와 같은 사람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소서.”p.429 그리고 루터는 우리의 기도가 없이도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그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처럼 “복음을 대적하고 전복시키려는 사탄 마귀의 온갖 간계와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실현될 것이다”p.429라고 한다. 
평가 우리는 ‘하늘’ 개념에 대해 일별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그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천사들의 순종과 섬김과 찬양으로 이미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영광과 의와 샬롬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그러데 루터는 이와 같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중세 교회가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흔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계몽주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하늘 개념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뜻’을 다만 처음 ‘두 간구’에 국한시킨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두 가지 간구 안에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성육신과 지상의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구현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에 근거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전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하며, 신·구약성경이 요구하는 모든 하나님의 뜻을 구현시켜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인 삶’, ‘복음전도’, ‘하나님의 선교’, ‘말씀설교’, ‘예배예전’, ‘코이노니아’, ‘기독교 교육’, ‘섬김의 삶’ 등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 
이미 본문에서 이 글이 주장한 캘빈의 ‘율법의 제3사용’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감사에 관하여”십계명과 주기도문 해설가 주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루터는 힘주어서 언급했어야 할 것이다. 즉 교회 안에서 발견되는 복음과 신앙과 성령에 대한 간구뿐만 아니라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과 같은 인류 보편사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사회적인 덕목들의 실현 같은 것들도 하나님의 뜻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언자들의 목소리, 원수 사랑을 비롯한 산상수훈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의 도?a discipleship, 그리고 사도들의 훈령들이 이 땅 위에서 구현될 것을 위해 우리는 간구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와 사회와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나라에 무한히 근접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루터는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라고 하는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내용 속에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루터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모든 종류의 먹거리들을 생산하는 넓은 전답田畓과 전全국토”가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곡식을 밭에서 자라게 하시고 축복하시며 보존하시지 않으신다면”p.430 우리는 밥과 만찬을 먹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서 루터는 ‘일용할 양식’이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삶 전체”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가정의 일과 시민적인 혹은 정치적인 일들”을 총괄한다고 본다. 그는 사탄 마귀가 이와 같은 두 가지를 방해하고 망가트릴 경우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얻기가 힘들다고 하면서 특히 “시민적 권위 질서들과 정부”를 위해 기도할 것을 힘주어 주장한다. 루터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진실로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시민적 권위 질서들과 정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는 주로 그것들을 통해 우리들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안락함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풍성히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안정되고 평화로운 정부를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것들 가운데 그 무엇도 지탱할 수 없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사탄 마귀로 인해 알력과 분쟁과 전쟁이 있을 경우에 우리의 일용한 양식은 빼앗기거나 적어도 감소될 것이다. p.430
그리고 루터는 ‘일용한 양식’을 위한 간구야말로 다음과 같이 무척 많은 구체적인 간구들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하나님께 먹을 것과 마실 것, 의류, 집과 가정, 그리고 건강한 몸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밭의 곡식과 열매들이 성장하고 소출이 풍성하도록 기도하고, 집안 살림살이를 잘하고 좋은 부인과 자녀들과 종들을 달라고 기도하며, 일·수공업 혹은 직업이 번성하고 성공하도록 기도하며, 신실한 이웃들과 좋은 친구들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황제들과 왕들과 영주들과 우리의 모든 공직자들이 지혜와 능력과 나라를 잘 다스리고 터키족들과 모든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치도록 기도해야 하고, 신민들과 백성들 전체가 순종과 화평과 조화 가운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을 우리의 몸을 상하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의 삶을 망치는 모든 폭풍과 우박과 화재와 홍수로부터, 폐해와 페스트와 짐승 역병으로부터, 전쟁과 피 흘림으로부터, 그리고 기근과 못된 짐승들과 사악한 사람들로부터 지켜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p.431
끝으로 루터는 위에서 나열한 모든 좋은 것들을 방해하는 것을 사탄 마귀로 보았다.p.431 
평가 루터의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의 해설은 참으로 놀랍다. 만약에 우리가 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처음 돌비에 적힌 다섯 계명을 하나님 사랑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돌비에 적힌 다섯 계명을 이웃사랑에 대한 것으로 본다면 주기도문의 처음 셋은 ‘하나님’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그 자신을 뜻한다과 ‘그의 나라’와 ‘그의 뜻’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 셋은 우리들 자신과 이웃사랑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십계명과 주기도문의 구조적인 상응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앞에서 아버지의 나라에 대해 논하면서 루터의 ‘두 왕국론’이 이 세상에 대한 교회와 기독인들의 책임을 소홀이 여기게 한다고 언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 부분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이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H. R.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루터교의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 유형을 ‘역설적인 관계’a paradoxical relation에 속하는 것으로 본 것과 마찬가지다. 즉 루터는 복음·신앙·성령·하나님 나라 등에 관한 한 문화와 무관하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후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동시에 이 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두 왕국론”은 정의, 평화, 창조세계 보전 등 인류의 보편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구현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5.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루터는 이 간구야말로 이미 복음을 믿어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하였으나 아직도 죄 가운데서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삶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p,432 루터는 이미 하나님께서 “용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혹은 우리의 기도가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지만 “관건은 이와 같이 복음에 주어진 용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p,432이라며, 우리가 이것을 일상생활에서 해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기독교인들의 연약성과 죄성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육체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믿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악한 욕망들과 꼼수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 그 결과 우리는 매일 같이 하나님이 행하라고 명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행하지 말라고 명하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불순종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양심은 불안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기뻐하시지 않음을 두려워하며, 결국 복음의 위로와 확신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을 회복할 위로를 위한 이 간구로 끊임없이 돌아갈 필요가 있다.p,432
그리고 루터는 교만한 기독교인들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간구를 기독교인들에게 주셨다고 한다. 하나님 존전에서는 모든 기독교인들 역시 불신자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이상과 같은 주장에서 본 간구의 의도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조건으로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 셈이다. 그는 오직 하나님 존전에서 복음을 통해, 그리고 이 복음을 믿고 신뢰함으로써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루터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를 해석하고 있다. 루터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미 복음을 통해 용서함을 얻었고, “매일 같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은혜를 통해 용서함을 받고 있으나 우리는 항상 우리들에게 손해와 폭력과 부정의를 저지른 우리의 이웃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된다”p.433고 할 때 이 구절은 이미 용서함을 얻은 기독교인들이 좀 더 힘을 얻고 확신에 찬 삶을 살도록 하는 삶의 징표로 이해되고 있다 하겠다. 루터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에 당신이 이웃의 죄를 용서한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이 하늘에서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위로와 확신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부터 무상無償으로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이웃에 대한 죄 용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복음이 가르쳐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부터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확신 있게 하시려고 이 조건條件을 하나의 징표로 주셨다. 그리고 이 조건과 함께 본本 간구와 일치하는 약속눅 6:37: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을 주신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주기도문 직후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 6:14라고 반복하신 것이다.p.433
평가 
본 간구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그 이유는 본 간구의 앞부분이 조건이 되어서 뒷부분의 간구가 응답된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루터 신학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 인간 상호 간 용서하는 ‘행위의 의’works-righteousness가 하나님의 복음을 통한 용서의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걸림돌을 매우 훌륭하게 피해가고 있다. 우선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밑에 깔고, 복음을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기독교인들’?the justified coram Deo through the grace of the Gospel by faith 역시 일평생 살아가면서 항상 넘어지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의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신학적인 주제에 걸맞은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완벽한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 존전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루터는 기독교인들의 실존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용서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는 징표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이것을 통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좀 더 강화되고 확신에 찬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하는 뜻에서 본 간구의 앞부분을 해석하고 있다. 역시 루터의 죄 용서는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경향이다. 
6.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루터는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들을 받았을지라도 우리는 육체와 세상과 사탄 마귀의 유혹과 시험으로 오늘 서 있다가 내일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여섯 번째 항목의 기도를 해야 한다고 했다. 현재 우리가 죄의 용서와 편안한 양심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시험으로 인해 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루터는 세 가지가 우리를 시험에 빠트린다고 본다. 루터는 이 셋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첫째로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살고 있다. 옛 아담이 귀찮게 우리의 목둘레에 착 달라붙어 있다. 이 옛 아담은 우리를 매일매일 음란, 게으름, 폭음과 폭식, 욕심과 속임으로 꼬이고, 우리의 이웃을 속이는 행동으로 인도한다. 짧게 말하면 본성상 우리에게 착 달라 붙어있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우리가 듣고 보는 것에 의해 자극을 받는 그와 같은 온갖 종류의 욕정들로 유혹한다. 이 모든 것은 심지어 매우 무고하고 순진한 사람까지 상처를 입히고 손상을 준다.p.434
둘째로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분노와 성급함으로 몰고 가는 이 세상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 안에는 증오와 질투, 적대감, 폭력과 부정의, 불신, 앙갚음, 저주하기, 욕설하기, 비방하기, 오만함, 그리고 교만이 있고, 사치와 명예와 영예, 그리고 권력에 대한 선호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가장 작은 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나가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자 한다.p.434 
셋째로 사방팔방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유혹하는 사탄 마귀가 있다. 이 사탄 마귀는 특히 양심과 영적인 문제들이 걸려 있을 때 힘을 쓴다. 그의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신앙과 소망과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며, 우리들을 불신앙, 거짓 안전, 그리고 고집으로 인도하거나 반대로 우리를 절망, 무신론, 신성모독, 그리고 수많은 가증할 만한 죄들로 인도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올무요 그물들이다. 진실로 그와 같은 것들은 혈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탄 마귀에 의하여 우리의 심장을 뚫고 들어와 독으로 물들게 하는 ‘악한 자의 모든 화전’엡 6:16이다.p.434
루터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의 공격을 받아 시험에 빠질 경우에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고 매순간 기도해야 한다”p.434라고 했다. 
평가 
루터는 다섯 항목의 간구를 응답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모범된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매순간 위에서 지적한 3가지 유혹자들로부터 공격과 유혹을 받아 시험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터는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도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복음을 믿어 하나님 존전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the justified이라도 항상 하나님 존전?coram Deo에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고 하는 그의 신학적인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악에서 구 하소서”
루터는 이 간구에서 ‘악’이 희랍어로 남성명사도 되고 중성명사도 된다며, 우선 그것을 “모든 악의 총체”인 사탄 마귀남성명사로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모든 간구의 전 실체는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를 방해하고 가로막는 바로 이 사탄 마귀에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시에 루터는 이 ‘악’중성명사을 사탄 마귀의 나라에서 우리가 당하는 구체적인 죄악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가난, 창피, 죽음, 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비극적인 비참과 심장을 찢는 듯한 비탄”과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 그의 나라, 그리고 그의 뜻’에 대한 간구가 이 땅 위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탄 마귀와 그의 모든 행동들로부터 공격과 유혹을 받지 않도록 우리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해야 한다며, 아래와 같이 사탄 마귀의 활동들을 묘사했다. 
사탄 마귀는 단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살인자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의 생명을 찾고 있고 우리들의 몸에 사고와 손상을 입힘으로써 그의 분노를 토해낸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짓밟고 또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그는 어떤 사람들을 익사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몰고 가며 기타 다른 역경들 속으로 몰아넣는다.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가장 철천지원수인 사탄 마귀에 대항하여 꾸준하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탱해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사탄 마귀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p.435
끝으로 루터는 ‘아멘’에 대해 해설한다. 루터는 ‘아멘’이란 이상과 같은 간구들이 “확실히 하나님께 들렸고, 응답되었다”p.436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쪽에서 지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믿음의 긍정”p.436이라고 주장한다. 
평가 루터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에서 본 대로 결국 마지막 때에 사탄 마귀가 진멸될 것을 알고 있으나p.427 역사의 지평 속에서는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는 것처럼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공격한다고 말한다. 대체로 칼 바르트와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D-Day 이미 이 사탄 마귀가 완전히 패배했고, 주님 재림하실 날V-Day에 완전히 제압될 것으로 본다. 루터와 몰트만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사탄 마귀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서 그 머리가 치명적으로 상했으나창 3:15 그 꼬리가 계속하여 사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전자는 ‘이미’를, 후자는 ‘아직 아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둘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가 항상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루터는 주기도문의 끝 부분에 있는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에 대해서는 전혀 해설을 하지 않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1절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오는데 전자에는 이 구절이 있고, 후자에는 이 구절이 없다. 어떤 학자들은 본디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이 없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으나 훗날에 마태 기자가 초기 교회 공동체를 통해 전해지는 것을 첨가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 구절은 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주기도문의 7가지 항목을 완결시켜 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전권을 맡아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아버지 하나님께 양도하는 그 날에고전 15:23, 즉 우리 성도들의 기도?주기도가 전부 응답되는 그 날에 오직 모든 나라와 권능과 영광은 아버지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다?고전 15:28. 
1. Bernhard Lohse, 「루터연구입문」, 이형기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6~51. 로제는 루터가 수도원에 들어간 동기와 복음을 발견하게 된 과정에서 그의 “영적 시험”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보면서, 이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다. 
2. John Dillenberger, 「루터 저작선」, 이형기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52.
3. Martin Luther, The Book of Concord, trs. and ed. Theodore G. Tapper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59), 420. 
4. 참고, 최윤배, “칼뱅의 기도이해”, 「칼빈연구」 제6집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9), 61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