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자료실/신앙자료

자기 기만 (Self-Deception)

자기 기만 (Self-Deception)

송인규 교수 

계 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들어가면서 

“자기 기만”(self-deception)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을 보면 “자기 기만”이라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역설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첫째, 존재론적인 면에서의 역설입니다. 자기 기만에 있어서는 속이는 주체와 속는 대상이 하나입니다. 즉 자아가 속이는 역할도 하고 동시에 속는 역할도 합니다. 보통은 두 존재가 있어서 그 사이에서 속이고 속는 법이지만, 자기 기만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 인식론적인 면에서도 역설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자기 기만의 당사자는 자신에 관한 어떤 사항과 관련하여 자신이 믿는 바가 진실(사실)이 아님, 참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바로 그 내용이 진실(사실)이라고, 참되다고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한 인식의 주체자가 자신에 관한 어떤 사항을 믿기도 하고 또 믿지 않을 수도 있는지 인식 작용의 면에서 보더라도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만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또 아주 희귀한 현상도 아니라는 점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일 -- 즉 자기 기만 -- 도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살아남기 전략(survival strategies)으로서의 자기 기만이 있습니다. 이미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해 어느 정도 실상이 드러났습니다만, 인간에게는 각종 방어 기제들(defense mechanisms)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주위 환경을 만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는 자기가 겪는 불안 상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인 심리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처한 위험 상황의 객관적 조건은 변경시키지 못하고 (혹은 변경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에 대한 자신의 지각(perception)이나 사고 방식에 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자신의 주관적 인지 기능이 현실을 수용하게끔 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방어 기제 -- 억압(repression), 합리화(rationalization), 반동 형성(reaction formation), 투사(projection), 이지화(理智化, intellectualization), 부인(denial), 전위(轉位, displacement) 등 -- 에는 어느 정도 자기 기만의 요소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 종류의 자기 기만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우상화 작업(idolization strategies)으로서의 자기 기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것은 한 인간이 자만의 태도를 상습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자기 이상(以上)의 그 어떤 존재인 것으로 거짓되이 자기 심령에 각인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은사와 조건들이 각광을 받고 남의 부러움과 칭송의 대상이 될 때 이런 식의 심리 상태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누리는 조건들이 곧 자아 가치(self-worth)의 전부인양 착각할 뿐 아니라, 또 그러한 조건들이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물임을 망각한 채 자기 고유의 생득적 산물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기만은 자신을 그 이상의 존재와 연계시키는 상향적 동일시 작용(upward identification)임과 동시에 자아 숭배(self-worship)의 최종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자기 기만의 실례와 이에 대한 경고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 47:10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렘 49:15-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방 중에 작게 하였고 사람들 중에 멸시를 받게 하였느니라. 바위 틈에 거하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이 지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갈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약 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지금까지 필자는 자기 기만에 두 종류가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의 강좌에서는 두 번째 부류의 자기 기만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시한 요한계시록 본문이야말로 이러한 자기 기만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기만의 해부 

(1) 자기 기만의 형성 배경 
본문의 권면을 받은 대상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v. 14). 라오디게아는 로마 행정 구역인 브리기아(Phrygia) 주의 매우 부요한 도시였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우리는 부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가 이처럼 부요한 데는 세 가지 맞물린 요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라오디게아는 세 개의 간선 도로가 만나는 접합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길이 라오디게아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밀레도와 에베소까지 이르렀고, 라오디게아를 지나 쉽사리 동편의 중앙 고원 지대로 나아갈 수가 있었으며, 또 북쪽 버가모에서 내려오는 길이 라오디게아를 기점으로 하여 남쪽의 앗달리아 해안까지 이어졌습니다. 
둘째, 라오디게아는 부와 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위상이 매우 높은 중심 거점이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가 상업과 무역의 번성을 이룬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치입니다. 로마의 치세 하에서 라오디게아는 엄청날 정도로 번영하는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주후 60년 경에 지진이 발생하여 이 도시가 재난을 당했을 때, 이들은 네로 황제로부터의 원조를 마다하면서 자체의 힘으로 도시를 재건할 수 있었다니, 이 도시가 누리던 부의 수준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라오디게아는 여러 가지 업종이 골고루 발달한 고도의 산업 도시였습니다. 우선, 금융업에 있어서 대단했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여행, 무역, 상업이 활발했고 이것이 금융업의 번성을 가져왔으리라는 것은 곧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또, 모직업(毛織業) 또한 크게 발달했다고 하는데, 광택성 흑모(光澤性 黑毛)로 짠 의복이 대표적 특산품이었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라오디게아는 의료 산업에 있어서도 유명했습니다. 의술 연마를 위한 학교가 있었고, 고대에 유명한 브리기아 안약(Phrygian eye powder)을 개발하여 눈에 생기는 염증의 치료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토록 교통의 요충지요, 부와 재력의 중심지며, 산업의 진원지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속으로 뇌까리고 있습니다. 그 당시 도시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실상 하나의 단위 국가로서 -- 소위 도시 국가(city-state)라는 명칭이 이에서 생겼는데 -- 그 독자적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의 도시가 마치 하나의 국가처럼 독립적이고 자기 완비(完備)적(self-contained)인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모든 도시 국가들이 그랬거든, 하물며 교통․재력․산업의 면에서 탁월했던 라오디게아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나는 부요하니 부족함이 없다”고 자기 충족(self-sufficiency)의 거드름을 피웠던 것입니다. 

(2) 자기 기만의 근본 원인 
그런데 왜 인간은 -- 그리스도인을 포함하여 --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하나의 인식적 주체 안에서 속이고 젠체하고 농간을 부리는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이에 대한 답변이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 과거에도 그랬고 -- 우리의 심리 상태와 내면적 처지에 비추어 볼 때, 자기 기만이 발생하는 이유만큼은 어느 정도 정확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기만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또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에도) 자신과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자랑스러운 조건들 -- 부, 유명세, 실적, 관록 등 --을 수없이 끼워 넣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의 예를 든다면, 그들은 부, 모직 산업, 의약품 등 자랑스러운 조건들을 늘 자신의 일부로 붙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예 마음의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심지어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에도 이런 것들을 앞세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사회적 신분, 외적 조건, 높은 직책과 호칭 등을 그대로 질질 끌고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간 그 존재는 실로 자기의 공로, 업적, 관록, 활동 경력 등으로 자신을 두텁게 포장한 그런 모습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것인지 한 번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에 내려와 살펴 봅시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습니까? 우리는 본래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의 연합을 누리게 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나 어떤 자격과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 우리가 연합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시는” 고로 -- 우리를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할 바가 있다면 그저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는” 것 말고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거기 어디에 사회적 신분이나 자랑스러운 조건이나 높은 직책이 끼어들 틈이 있겠습니까? 거기 무슨 업적, 공로, 자랑거리가 머리를 디밀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목사, 사장, 교수, 박사, 전문가, 유명 인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런 신분을 빙자하여 사람들 앞에 젠체하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더니 이제는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까지도 치졸한 게임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면서 된 체하는 교만․위선․위장된 자아의 모습, 곧 자기 기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업적, 관록, 경험, 학식, 공로, 선행, 희생적 활동 등을 전면에 깔고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가 경건의 훈련을 충실히 한 것, 몇 번씩이나 단기 선교에 참여한 것, 내가 양육한 이들이 굴지의 리더로 두각을 나타낸 것, 짧은 시간에 교회를 부흥시킨 것 … 등등 우리가 휘감고 다니는 자랑거리들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자기 기만의 수위 또한 드높아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개인적 자랑거리(개인의 은사, 관록, 재능, 업적 등)와 집합적 프라이드의 소재(자기가 소속한 학교, 교단, 단체, 교회 등에 대한 자부심)를 부여잡고 있는 한, 그런 조건들은 우리를 자기 기만으로 옭아매는 저주의 사슬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어찌 가공(可恐)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3) 자기 기만의 영적 실상 
눅 18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자기가 의롭다고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듯이(9, 14절),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을 가리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지만 이보다 더 실상으로부터 먼 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실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묘사하셨는데, “곤고한 것,” “가련한 것,”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곤고한 것”(wretched/miserable)은 불행한 형편을 의미하고 “가련한 것”(pitiable)은 남의 동정을 살만한 처지를 뜻합니다. 이 두 가지 어구는 동일한 상태에 대한 보완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 다음에 나타나는 세 가지 사항입니다. “가난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것”은 앞에서 소개한 “곤고한 것” (혹은 “가련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곤고한 형편, 불쌍한 처지는 “가난함,” “눈멈,” “벌거벗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상 가난했고 (“부요”와는 거리가 멈), 눈이 멀었으며 (“안약”이 무색하게도), 벌거벗고 (“모직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구들이 일종의 아이러니(irony)인 것은, 라오디게아가 원래 보유하고 있는 -- 또는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이 자부심을 느끼는 -- 훌륭한 조건들에 역행하는 표현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실상이 이렇게 참담한데도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7절). 자기 기만 때문에 영적 인식이 흐려져 자신들의 영적 실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나아갈 때에도 자신들의 금융업, 의료업, 의술, 모직업 등을 끌어 안은 채, 부자로서 치료가로서 기업가로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들이 부를 앞세우고 브리기아 안약을 자랑하고 광택성 흑모로 만든 모직물로 몸을 감쌌지만,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할수록 영적 처지는 더욱 비참해져서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상태만이 드러날 뿐이었습니다. 그들을 제외한 온 세계가 이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만큼은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모른 채 부요를 노래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자기 기만자들이 드러내는 이러한 영적 비참성이 어디 라오디게야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발견되는 모습이겠습니까? 그들이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듯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직업에서의 안정과 신앙 공동체에서의 왕성한 활약으로 부요한 마음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판촉 경쟁에서 튀는 아이디어와 창의적 발상으로, 또 침체한 교회 사역에 활기를 불어 넣는 비법을 깨달은 것으로 선견지명을 자랑하지만, 오히려 마음의 눈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들이 때로는 시큐리티 시스템과 위기 대처술로, 때로는 화려한 세공 장식과 최신 유행의 의상으로 몸을 아름답게 감쌌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어리석은 임금님처럼 벌거벗은 채 수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들이 속으로 “나는 풍성하다. 나는 안목이 있다. 나는 든든하다” 라고 수없이 뇌까리는 동안 지독한 결핍과 맹점과 적신(赤身)의 상태가 그들을 비웃고 있습니다. 

자기 기만의 치유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렇듯 집요한 자기 기만의 마수로부터 놓일 수 있을까요? 또 어떠한 예방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우리의 심령이 자기 기만의 비참한 희생물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필자는 먼저 온당하지 않은 치유법부터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기만의 치유나 예방을 위해서는 그들의 심령에 영향을 준 근본적 원인 -- 부, 안약, 모직물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융업, 의술, 직물 산업 -- 의 제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가급적이면 이런 항목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또 꼭 필요하지 않으면 직업 활동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합니다. 물론 이들의 견해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어떤 특정 그리스도인의 영적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는 이러한 항목들 및 소위 “세상 일”을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멀리하는 것이 해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시적으로는 해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해결책이라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삶을 멀리하고 (그럴 수도 없지만 논의의 진행을 위해 그럴 수 있다고 합시다) 믿음의 공동체에만 착념한다고 해도, 역시 거기에서도 자기 기만을 야기할 수 있는 사역의 성과와 신앙적 업적 등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만이 더욱 치명적 피해를 주는 것은 어쩌면 오히려 종교적 영역에서의 사안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각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 (딤전 4:4).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이 만들어서 누리게 하시는 자연 세계와 각종 문화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대상에 대해 견지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에 있습니다. 이것을 라오디게아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와 연관시킨다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재물, 약품, 모직물, 금융업, 의술, 모직 산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항목들 자체는 죄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느냐에 따라 우리의 활동과 직업적 노력의 정당성 여부가 결정됩니다.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이런 것들을 활용한다면 전기한 항목들은 의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인이 되어 탐욕스런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좌지우지하고자 한다면 이런 항목들은 죄악의 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아직도 의문을 표할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바울 사도의 간증에 의거해 볼 때 그의 의문은 더 정당화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빌 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이상의 표현을 보면 분명 바울 사도는 과거에 자신이 자랑하던 사회적․종교적 조건들을 이제는 해와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모든 것들 -- 세상에서의 활동과 직업적 노력에 연관되는 조건들 --을 버려야 마땅치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바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A]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현하는 일[B]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적․신앙적 조건이 A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기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B의 경우에는 오히려 우리의 재능․조건․은사를 통해서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A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각도에서 필요합니다. B는 우리가 신앙 공동체와 이 세상에서의 활동과 연관해서 필요한 바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기만은 주로 A와 연관되어 발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신앙적 조건이 사역 및 활동과 관련하여서 꼭 필요한 수단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드러내는 수단인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는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조건들을 내세우면 오히려 자기 기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그런 조건들로부터 분리시킨 채 그저 가난하고 어두컴컴하며 벌거벗은 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제 원래의 문제로 돌아갑시다. 어떻게 하면 자기 기만을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을까요? 조금 전의 설명에 의하면, A에 있어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 힌트가 계 3:18에 나타나 있습니다. 18절 처음에 보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라고 되어 있어, 주께서 자기 기만의 문제와 관련하여 모종의 권면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세 가지 방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해야” 합니다. 재화와 부와 금융업 때문에 부요함을 누리는 것처럼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재물 대신 오히려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것만이 진정한 영적 부요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음의 교훈을 기억합시다. 

눅 12:4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약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모직물과 직물 산업이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됨됨이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께서 주시는 흰 옷을 입어야 합니다. 아니 사실 그리스도 자신으로 옷입어야 합니다. 역시 다음의 내용을 보십시요. 

롬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을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 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 합니다. 브루기아 안약과 의술이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리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원래부터 영적 소경임을 인정하고 오히려 빛이신 예수께서 그 눈멂을 고쳐주십사 간원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 늘 주님을 밝히 볼 수 있고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되어야 합니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엡 1:18-19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렇게 주께서 베푸시는 금, 흰 옷, 안약을 취하고 입고 바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자기 기만의 치졸한 작태를 그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베푸시는 신령한 수단들로 인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부요하고, 정결하며, 선명한 시각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이 자기 기만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선물들을 부지런히 활용하여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오직 주께서 주시는 부요와 의복과 안약만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