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레이의 중생론 비판
그러므로 머레이가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안에 그 부르심을 효과있게 만드는 모든 유효한 효험을 지니고 있다" 라고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즉,하나님의 선택받은 죄인을 향한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은 신비하고 놀랍게도 그 죄인이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한다.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은 어떻게든 해서 본질적으로 유효한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전까지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또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이 본질적인 효력은 베드로 사도가 ‘너회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벨전 1:23)라고 말할 때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다. 또 그것은 야고보사도가 “(자기에 의한) 자기의 뜻을 쫓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8)라고 했을 때 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머레이의 견해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대지도않으면서, 그것만이 실제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며,”’ 또 중생을 포함하여 그 이후 따라 오는 다른 모든 내적으로 역사하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레이는 중생에 대하여,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안에 있는 유효한 힘 이라고 분명히 하듯하지 않고,…그것을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후에 오고 또 사람의 반응 전에 오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또 그 사역이 “그 부르심과 부르심을 받는 사람 편에서의 반응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효한 부르심은 그 자체가 중생을 별개로 하고 사람을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물론 중생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구원 얻는 은혜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결국,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엡 2:5)을 받았고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엠 2:10) 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을 포함하여(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 딤후 1:9-"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우리를 부르신 이") 다른 모든 영적 축복에도(엡 1:3) 사실이다! 선택받은 죄인은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에 의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를 효력있게 부르시는 것은 그 선택받은 죄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또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죽으셨을 때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머레이는 직접 자신의 글에서 에베소서 1장 3-4절과 일치하게 “성부께서 미리 정하실 때 구원 받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상관없이 그 궁극적인 경륜에 들어갈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셨다” 라고 썼고,또 로마서 6장 2-11 절과 에베소서 1 장 7절과 일치하게 “구원이 그들을 위해 보장된 것은 그리스도가 속전으로 그의 생명을 주고 또 그의 피로 구속했을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확언하며 썼다. 머레이가 “구속이 효력있게 적용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동참자들이 되는것이다"라고 선언한 것도 또한 확실히 옳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즉 그것이 중생의 결과들이 되기까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동참자들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그리스도안”에 있는관계에 드는 것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동참자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 즉, 선택받은 죄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어 온 것이지만,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까지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동참자가 된 것(“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계와 중생의 결과로서)은 아니다. 종합하면 만약 머레이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으로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계만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는 아니다. 선택받은 죄인은 이미 그 안에 둘러싸여 있으며, 또 영원히 그러한 가운데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 이유가 된다. 만약 그가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이란 표현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참여하는 것과 의롭다 하심처럼 주님 안에 있는 모든 구속적인 유익들을 의미한다면, 이것은 단지 중생의 한 결과인 믿음 이라는 방편을 통해서만 온다.
한편으로 이것은 성부의 유효한 부르심이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행위와 상관없이는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으로 죄인을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성부의 유효한 부르심 -이미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에 의해 얻어진 정말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적용된 구속의 유익들 가운데 단지 첫 번째- 은 하나님의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유효하게 되고, 성령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또 그 부르심과 더불어 역사하여 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는 믿음의 결과를 낸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들은 분명하게 중생을 유효한 부르심의 범위 안으로 넣는다. 머레이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정의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비판할 때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부르심을 성부 하나님의 특정적인 활동으로 언급할 때 그것은 부르심을 성령의 특정적인 행위라는 뜻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 부르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것이면 충분한 사실이다. 그러나 머레이 자신이 보는 그 신앙 고백은 성부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효력있게 부르시는 것을 기뻐한다" 고 선언한다. 그리고 소요리문답-단지 말 그대로 어린이들을 위한 소요리(간결한) 문답이므로- 은 유효한 부르심이 “하나님의(즉,성부 하나님의) 성령”에게 돌아간다고 언급함으로써 더 긴고백적인 설명을 단지 요약할뿐이다.
그러나 나는 성부께서 선택받은 자를 효력있게 부르시는 성령은 그분만의 성령이며, 또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행위에서 성자 편에서 동시발생적으로 하시는 행위는 전혀 없으시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는 않다. 그와는 달리 성경은 선택받은 이들의 유효한 부르심은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가 관여하는 행위이며, 중생케 하시는 성령은 성부의 신이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이시기도 하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롬 8:9-10을 보라;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4장 l 항을보라). 성경은 선택받은 이들 “위에 임하는” 성령의 세례(중생케하시는)사역은 그리스도에게서 유래하며(마 3:11; 막 1:8; 녹 3:16; 요 1:33), 오순절에 그의 성령을 부어주신 분은 그리스도였음(요 15:26; 행 2:33)을 증거한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오류들 중에 아마도 가장 큰 오류라면,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위해서 성부의 우편에서 지금도 중보의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제외하곤 오늘날은 비교적 비활동적이시며,성령은 지금 그리스도가 성취한 십자가 사역의 공로를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직무를 최우선으로 맡고계신 삼위 중 한분이시다 라는 인식을하고 있는점이다. 성경의 모든자료에 민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8장 8항)은 그리스도의 현재 보좌에 앉아 행하시는 사역을구속의 적용 범주 안에 포함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로버트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 90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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