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다소의 사울이 겪은 회심과 같은 순간적인 회심들은 없는가? 회심이란 그 성격상 순간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회심을 사람이 중생하고 믿을 때 그 시간에 일어나는 방향의 명확한 전환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는 과정 그리고 회심에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부르심 가운데 존재하는 단계가 있고, 회심으로부터 야기되는 성숙하게 하는 성화를 갖는 과정에 있어서 여러 단계가 있다. 예를 들어 다소의 사울의 경우를 보라. 어느 순간 분명히 그는 교회를 멸절시키러 달려가던 그리스도의 적이었다. 그 다음 순간에는 예수를 “주”로 부르고 그에게 복종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 성경의 기록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순간적인 회심에로 이끄는 어떤 깨달음의 과정 가운데 명확한 단계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후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스데반의 증거를 통해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적어도 사도행전22:20에 기록된 그의 말에서 유추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박해 아래에서 고통을 겪을 때 이들의 영웅적 행위가 그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이 사건을 기록한 내용으로부터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곧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9:5,26:14)는 성경이 분명히 암시하여 준다. 사울은 빈무덤에 갖다 온 자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고, 거기서 시체는 사라지고 그 육체가 입고 누었던 그 옷만 남겨져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울의 강력한 박해는 그의 마음이 투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심리학적 증거이다. 가시채를 뒷발질한다는 것은 증거에 맞서 싸우고 깨닫게 되는 것에 저항하는 유죄성을 느끼는 정신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소의 사울의 회심처럼 그러한 갑작스러운 회심의 경우에 있어서 전후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인 부모와 기독교 사역자들은 그들이 인내하고 신실하게 노력을 기울인 거으로 인해 고무될 것이다. "
(4) 과정의 가시성
"구원받은 자들과 멸망당하는 자들 사이의 차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에게 위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이의 차이, 중생한 상태와 중생하지 못한 상태 사이의 차이는 절대적인 차이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해 힘을 받는 구원하는 믿음의 행동은 순간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져야 한다. 아니면 만일 순간적인 그러한 행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정확한 순간에 그것을 얻게 하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하는 행동은 확신과 효과적인 부르심의 과정이 이끄는 행동이고, 은혜와 지식, 성화 가운데 성장하는 과정을 만들어 내는 행동이다.
목회자, 교사, 선교사, 그리고 전도인으로서의 우리는 결코 멸망 받을 죄인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할 때 그 정확한 순간을 볼 수는 없다. 우리의 할 일은 확신을 가져다 주고 멸망 받을 사람을 이끌어 내어 다음의 말씀을 통해 요구되는 적극적 위탁의 행위를 하도록 하게 하는 성령이 발휘하는 모든 영향과 환경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요3:16도 참조). 중요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땅에 심은 씨와 비교하고, 중생의 과정은 발아한 것과 씨가 뿌리내리는 것에 비유한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흔히 발아와 뿌리내리는 과정인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의 어떤 국면을 받아들이게 하는 경험을 갖게 하지 못하고, 오로지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자신이 유죄선고를 받은 이유와 동시에 자기를 깨닫게 된 사실 모두를 잊어버렸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목사는 어떤 자인가? 확실한 회심의 문제에서조차도 그러하다. 목사는 대단한 인내심과 끈기를 필요로 한다. 씨는 심겨져야 하고 물을 먹어야 하며, 양육되고 보호받으며 영적인 음식으로 영양을 공급받아야 한다."
올리버 버스웰, 조직신학2권, 28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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