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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목회학

목회의 본질

목회의 본질


리차드 백스터


제2장 양떼들을 보살핌 (牧會)


제1부 목회의 본질


목사들이 주의할 것을 제시했으니 다음으로는 양떼들이 주의 할 것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목사가 감독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의 모든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을 그에게 돌리며 그의 교회에 영광을 돌리는 것도 우리 생활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는 직무의 가까운 목적은 우리가 맡은 양떼들을 성화하게 하고 거룩한 순종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들을 연합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며 미(美)와 힘을 보호 증거하게 하며 특별히 회중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에 주요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문제, 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문제나 양떼를 구원하는 문제입니다. 그 일은 일시적이나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하는 일은 세상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인격을 도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두 가지 점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양떼들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할 행복 또는 최선을 제시하는 것이며 
둘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올바른 수단을 양떼들에게 알려주며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도록 그들을 돕고 동시에 역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로서는 가장 첫째로 해야 할 일이며 또한 가장 위대한 일이다. 하나님의 선한 보화를 양떼들에게 제시하며, 약속하신 행복의 확실성과 우월성을 그들에게 보여주며 현생의 공허한 것과 비교하여 장차 올 생애의 완전한 축복을 보여주고, 그들의 사상과 감정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에 경멸감을 느끼게 하고 영구성 있는 보화를 찾도록 하는 것은 목사들의 행복인 것입니다. 
올바른 목적을 제시했으니 우리의 다음 할 일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올바른 수단을 양떼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릇된 방법은 배제되어야 합니다. 모든 범죄는 드러나야 하고 우리에게 임한 위험이나 상함은 발견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전파해야 할 위대한 구속의 신비를 가졌습니다. 곧 복되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전파해야 합니다. : 즉 그의 인격, 성품, 성육신, 완전성, 생명, 이적, 고난, 죽음, 장사, 부활, 승천, 영화, 통치, 중보 등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약속의 취지와 우리가 맡은 조건들과 그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사명과 그의 은총을 받고도 종국적으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에게 경고하신 영원한 불못의 형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전파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성도들이 가진 특권은 얼마나 좋은 보화인지요! 사람의 아들들에게 우리가 추천할 수 있는 거룩한 생활과 교제는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시험과 어려움과 위험이 그들을 방해하는 지요. 근절해야 할 부패와 죄 성향이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들은 전파해야 할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와 계획의 비밀을 가졌습니다. 우리들은 창조의 역사와 구속과 섭리와 칭의와 양자됨과, 성화(聖化)와 영화(榮化)를 전파해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들은 심오한 사탄의 시험과 심오한 우리들의 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사역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들이 가르쳐야 할 두권의 책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탁월하며, 얼마나 훌륭하고 신비스러운 책인가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요 학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학교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안내원들입니다. 성경은 그의 문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매일 양떼들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맡은 모든 양떼들은 우리의 목회 안에서 개별적으로 우리의 보호와 감독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맡은 양떼들을 개별적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가능한 한 충분히 양떼들의 상태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양떼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범죄가 무엇이며 어떤 책임을 등한히 하며 어떤 시험을 당하기 쉬운가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들의 성질과 병을 알지 못하면 우리들은 마치 성공할 수 없는 의사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양떼들을 안 다음에는 그들을 보호하여야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이것을 만족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심성 있는 목자는 양을 개별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좋은 선생이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좋은 의사가 병자들을 개별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좋은 지휘자가 병사들을 개별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사나 목사나 의사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책임 맡은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을 돌보셨던 위대하고 선한 목자 그리스도는 지금도 각 사람을 돌보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그는 선한 목자로써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다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가끔 개인에게 파송됩니다. 에스겔은 개인의 파수꾼으로서 "너는 분명코 죽을 것이다"라고 악한 사람에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집집마다 다니며" 양떼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그의 교훈이 특별한 가정을 위한 것을 뜻합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완전하게 되도록 모든 지혜로 모든 사람을 경고하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성경 구절은 더욱 더 양떼들을 개별적으로 돌보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옛날 회의의 많은 기록들도 명백하게 그것이 그 때 당시에도 시행되었던 것임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나는 익나티우스(Ignatius)가 말한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회합을 가끔 가지며 모든 사람의 이름을 불러 안부를 물으며 남종과 여종을 경멸하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때 당시에 가장 천한 남종과 여종일지라도 이름을 불러가며 일일이 각 사람을 돌보는 것이 목사의 의무였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모든 양떼들을 보살피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지만 우리들은 특별히, 어떤 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합니다. 따라서 나는 이 문제를 약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1. 중생하지 않은 사람을 중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한 태도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중생의 사역은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우리들의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슬프도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비참함이 얼마나 큰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큰 소리로 자비를 요청합니다. 진정으로 중생한 죄인은 실족하더라도 그가 범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며 중생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죄로 인해서 멸망할 위험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죄와 마찬가지로 양떼들의 범죄도 미워하며 그들을 하늘 나라로 이끌어 들일뿐만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영혼은 사악하게 살지 못하도록 고통을 주며 불경건한 사람들이 범죄 하는 것처럼 범죄하지 않도록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요원한 것입니다.. 그들은 곤경을 당하며 죄악의 속박에 매어 있어서 죄를 용서받는 것과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들을 위해서 해야 할 더욱 필요한 일을 가졌습니다. 곧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며, 사탄의 손에서 하나님께로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 용서함 받고 영광의 기업을 얻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과 치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치통 앓는 사람보다는 죽을 병으로 앓는 사람은 낯선 사람이고 치통 앓는 사람은 자기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그는 죽을 병 앓는 사람을 더욱 시급하게 도와 줄 것입니다. 파멸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정녕 죽어서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나는 우리들이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그들은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성 때문에 중생한 사람들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태만하게 되는 것을 고백합니다. 


2. 우리는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온 사람들에게 충고해 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말했던 경우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목사는 공적인 석상에서 설교할 뿐만 아니라 변호사가 계산을 위해서 상담하며 의사가 신체를 위해서 상담하는 것처럼 목사는 양떼들의 영혼을 위해서 유명한 상담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회의와 곤경에 빠진 양떼들이 목사에게 그들의 문제를 가지고 와서 해결을 얻을 것입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찾아온 것처럼 그리고 "제사장들의 입술에는 지식이 있으며 그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율법을 묻기 위하여" 사람들이 제사장에게 보통으로 찾아가는 것과 같이 여러분에게 찾아갈 것입니다. 
양떼들이 목사의 이런 직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자랐으며 그들 자신의 필요성과 의무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로 양떼들과 사귀며 그들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충고를 받으며 오도록 공적으로 권고하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고통을 기꺼이 생각해야 할뿐만 아니라 양떼들을 초대함으로 고통을 이끌어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양떼들이 이렇게만 할 수 있게 만든다면 얼마나 많은 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심할 것 없이 우리의 의무를 다한다면 많은 일을 그 안에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목사들이 이런 일을 하도록 양떼에게 진심으로 권장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 상처를 입고 있으며, 위험한 자리에 처해 있는데도 목사들이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지 않으며 그들을 깨워 주지도 않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만약 양떼들이 이 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잘 인식만 한다면 여러분은 더욱 자주 양떼들이 여러분의 문을 두드리게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슬픈 호소와 여러분의 충고를 간청하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장래를 위해서 양떼들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길 바랍니다. 
양떼들이 여러분의 도움을 요청할 때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그 일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참 은총의 성질을 잘 알아야만 하며 우리들은 양떼들의 상태를 연구하며 영생과 사망에 관련된 주요한 문제를 해결함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적절하게 표현하면 목사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총명한 충고는 많은 설교가 이룰 수 없는 좋은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솔로몬은 말하기를 "때(경우)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