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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목회학

성직자의 자아성찰(自我省察)

성직자의 자아성찰(自我省察)


리차드 백스터


경애하는 형제들이여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했던 권고는 자신을 그들의 감독자로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종인 우리들은 그런 결론에는 구애받지 않고 바울과 똑같은 권고를 여러분에게 하고자 합니다. 마치 관리들이 주안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 같이 양떼들을 가르치지만 우리들은 형제로서 직무를 수행하며 믿음 안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책임 맡은 양떼들이 서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권고하기를 매일 매일 계속한다면, 우리들도 우열의 다툼 없이 서로 서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양떼들과 똑같이 영혼을 죽이는 죄를 지니고 있으며, 똑 같이 영혼을 살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떼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하며 더 큰 어려움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양떼들처럼 가르침을 받지 않는 고로 경성하여 깨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직자 수양회와 같은 모임을 더욱 자주 가여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가장 진지한 사람들이 양떼들과 사귀는 것처럼 우리들도 솔직하고 밀접하게 서로 사귀어야 하겠습니다. 성직자들은 예리한 훈계와 견책을 받음으로써 그들의 신앙이 건전하고 생생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 장로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며 심장을 격동시켰던 바울의 권고입니다. 바울의 권고는 짧은 것이었지만 그렇게 쉽게 체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그들의 시간을 드려 많이 독서하지 못하더라도 이 짧은 바울의 권고를 배워서 양떼들을 세상에서 잘 돕는다면 교회와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될는지요. 
나는 바울을 연설자로 에베소 장로들을 청중으로 생각하면서 다음 것을 본문에 다루려고 합니다. 
1. 이중적 의무(二重的義務)
2. 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사중동기(四重動機)
첫째 의무는 성직자인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이며, 둘째 의무는 모든 양떼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들을 위하여 조심스럽게 해야 할 주요한 일은 그들을 먹일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목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관련된 동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성직자들의 책임과 양떼들과의 관계는 그들이 양떼들의 감독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직자들의 직무입니다. 
2. 성직자들이 그런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권위 있고 탁월한 성령이 그들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3. 성직자들이 책임 맡은 대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존경할 만한 모임인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4.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교회를 피로 값주고 사셨고 교회를 친절히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감독(Episkopous)은 교회들을 가르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도록 임명된 책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같은 위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지 못합니다. 동사(Eteto)는 장로들이나 감독들의 자격과 특히 해야 할 임무를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을 쓸데없이 그들의 자격이나 임무를 제한하거나 제외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양떼들의 감독자로 세웠습니다. 
1. 장로나 감독이 그 직무에 적합하도록 적당한 은사를 주셔서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2. 장로나 감독을 세운 사람들의 마음을 인도하셨습니다. 
3.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장로들과, 장로들을 세운 사람들과, 양떼들을 주관하사 교회에 부속시켰습니다. 
우리는 교훈과 적용을 시도하기 전에 바울이 권고했던 장로들의 신분은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런 경우 설명을 하지 않고 지나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올 모든 적용은 설명에 많이 의존되기 때문에 번거롭지만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책임 맡고 있는 양떼들에게 아무런 권고도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권고를 하지 않고 지나쳐 버리거나, 방관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며,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이 실천하도록 하기 위해 제시한 모든 것을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본문은 목사들을 깨워서 그들의 의무 수행을 고조하는 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태만에 대해서는 높은 지위에 있는 감독들 곧 우리가 고위 성직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만 제한해서 이 본문에 말했습니다. 또한 다른 성경 본문도 고위 성직자 외에 다른 교회 장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장로들은 성경시대에는 없었습니다. 
(백스터는 이레네우스를 반대하여 모든 장로들이 에베소의 단일 교회에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제 성경에서 '감독'이나 '장로'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임명권과 재판권을 가졌습니다. 또한 이들은 여러 교회의 감독이 아니고 한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교구 목사처럼 수많은 특별한 교회를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도들이 설립한 방법대로 시행하는 것을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이제 우월한 감독 정치를 비난하기 전에 의무 수행을 명령한 사람들에게 복종하여 충성스럽고 평화스럽게 우리들의 의무를 감당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나는 늘 다스림을 받는 것이 다스리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 안에서 어떤 사람에게도 순종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이 철저히 행해지기만 한다면 나는 누가 그 일을 했느냐하는 우열 다툼에서 제일 뒷자리에 서겠습니다. 그러나 유능하고 신실한 사람을 감독자로 삼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법칙으로 하여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도록 하십시다. 나는 결코 우월의 문제로 다투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감독자들이 나에게 순종을 요구한다면 정당한 일에 있어서는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만약 감독자들이 인간의 역경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충족하면 나는 그들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또한 그들이 다른 경전이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고 복음의 단순성에 만족하고 베드로와 바울이 소유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나는 명령이나 직위에 따라 움직이는 감독을 만족할 수 없으므로 또한 그런 감독에겐 순종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