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스의 삼위일체론
본질과 위격의 구분
350년대 말엽의 ‘상이본질파’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른바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pneymatomachoi)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상황 속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질과 위격을 구별하고 삼위의 하나 됨과 셋 됨을 분명하게 규정함으로써 4세기 삼위일체 논쟁 해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실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에서는 본질과 위격이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고백에서 본질과 위격이 다른 것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니케아 공의회 교부들) 위격과 본질이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단어들이 동일한 한 뜻을 표현했다면 왜 두 단어가 모두 필요했겠는가? ......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펼칠 때, 아들이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비롯된다고 선언했지만, ‘위격으로부터’라는 단어는 덧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지만, 그들이 명백히 가르친 대로 아버지는 자기 고유한 위격 안에 있고, 아들도 그러하며 성령도 그러하다고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Basilius, Epistulae 125.1)
그러면서 그는 본질과 위격을 공통된 것과 고유한 것의 관점에서 정의한다. 본질은 선함과 신성과 같이 공통적이라면, 위격은 아버지 됨, 아들 됨, 거룩하게 하는 능력과 같이 각자에게 고유한 특성을 말한다.
“ 본질과 위격의 관계는 공통된 것(to koinon)과 고유한 것(to idion)의 관계와 같다. 우리 각자는 본질이란 공동 용어에 의한 존재(tou einai)에 참여하며,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러저러한 자이다. 마찬가지로 본질이란 용어가 선, 신성 또는 유사한 속성과 같이 공통적이라면, 위격은 아버지 됨, 아들 됨 또는 거룩하게 하는 능력의 고유한 특징 안에서 직관된다.”(Basilius, Epistulae 214.4)
바실리오스는 스토아 철학의 인식론을 활용하여 베드로, 바울은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모두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고, 개별자를 특징짓는 고유한 특지오가 종을 나타내기 위한 공통된 이름을 구분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이름은 본질(ousia)을 나타내지 않고 고유한 특징(idomata)을 보여준다. 신성은 공통적인 것이지만, 아버지 됨과 아들 됨은 고유한 특징이다. 그러면서 바실리오스는 위격이 단수로 사용될 때에는 본질과 같은 뜻을 지닌다고 보았던 것 같고, 위격이 복수로 사용될 때 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삼위 각자는 고유하며(idion), 나머지 둘과 구별되는 고유성(idoteta)을 지니고 있다.
376년 경 이코니온의 암필로키오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본질과 위격에 대한 바실리오스의 사상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처럼 ‘공통적인 것’(to koinon)과 ‘개별적인 것’(to kath’ ekaston)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존재’(to einai)란 말을 본질이란 의미로 쓴다. 하지만 바실리오스에 따르면 본질은 단순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신적 본질로서 구체적인 실체인 위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는 본질과 위격을 함께 결합해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 신적인 성령이라고 고백해야 우리의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바실리오스는 ‘인격’(prosopon)이란 말에 대해서는 보다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주었다. “성령론”에서는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되었으며, 위격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편지에서는 위격과 인격이 엄격히 구분된다. 왜냐하면 인격은 일차적으로 가면, 얼굴을 뜻하며, 연극에서 등장인물의 역할, 배역을 나타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바실리오스는 아버지 됨, 아들 됨, 거룩하게 하는 능력을 삼위의 고유한 특징으로 보고 위격의 구별을 강조했지만, 이렇게 세 위격을 인정하는 것이 단일통치원리(monarchia)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신 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단일통치원리를 설명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이신 아들을 통해 알려지며, 아버지의 형상은 성령의 조명하는 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를 알 수 없고(마 11:27), 성령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신 인식의 길은 한 성령으로부터 한 아들을 통해 한 아버지에게로 이른다. 또한 본성적인 선, 본성에 따른 거룩함, 왕적인 영광은 아버지로부터 홀로 나신 분을 통해 아버지에게로 도달한다. 이와 같이 위격들이 고백되지만, 단일통치원리의 경건한 가르침은 무너지지 않는다.”(Basilius, De Spiritu Sancto XVIII. 47)
['동방교부들의 삼위일체론(서원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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