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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박해와 인구 이동

바돌로매 축일에 위그노들을 학살한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시집을 프랑스로 왔다. 메디치 가문과 관련한 특이점은 마키아 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가문이 이 집안이라는 것이다. 호치민이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끼고 읽었듯이 까드린느는 항상 군주론을 끼고 읽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왕가의 왕위 계승의 대가 끊어지자 다음 왕위 계승권자가 앙리 부르봉이었다. 이 부르봉은 칼뱅이 피하여 지냈던 나바르 공국의 왕이었고 당연히 칼뱅파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카드린느의 딸 마고와 앙리의 결혼은 가톨릭과 칼뱅파의 결혼이었다. 이 결혼식이 있던 축일에 수많은 칼뱅파 교도들이 학살되어 죽었다.

이 일을 계기로 프랑스의 중산층 기술 및 상공업에 종사하던 위그노들은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등으로 빠져나갔다. 이 일로 프랑스는 국력이 쇠퇴했다. 스페인은 유대인을 쫓아냈는데 유대인의 경제적 파워는 막강했고 스페인 역시 국력이 쇠퇴 했다. 이 때 스페인을 떠난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 정착했고 칼뱅파 후예 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다.

후에 네덜란드의 오렌지 공이 영국의 왕위 계승권자가 되면서 수많은 위그노들과 유대인들이 영국으로 이주했고 이것은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었다. 물론 영국이 설탕 무역과 노예 무역을 통해 형성한 막대한 부가 이 동력이 되었다. 16세기부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유럽을 잇는 삼각 무역은 유럽과 영국에 막대한 자본을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자본주의적인 욕망은 제국주의의 옷을 입었고 선교는 이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이뤄졌다. 현대 개신교가 반성해야 할 역사의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