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자아의 함정

제 목소리가 저음이라 설교를 처음 들으시는 분들은 잘 안들리기는 할 겁니다. 마이크 없이 하면 더 집중하기 어렵기는 합니다. 그런데 고사양의 마이크와 앰프 시스템으로 송출할 때는 이보다 편안하고 집중되는 목소리가 없다는 평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조건에 만족스러울 수는 없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에게는 3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갖은 아양으로 아버지에게 환심을 사서 나라의 일부를 물려받지만 순수했던 막내는 내쫓기고 맙니다. 그런데 그렇게 갖은 아양을 떨던 첫째와 둘째는 왕국을 계승한 후에 아버지를 버려버리죠. 옥에 갇혀 생활한다는 소식을 듣던 막내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패전했고 리어왕은 막내 딸을 안고 오열을 하죠.

비극은 단지 슬픔을 말하지 않습니다. 비극의 구성은 인간적인 결함이 초래하는 비극이라는 특징을 지닙니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이 아이스킬로스로부터 소포클래스를 거쳐서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면서 완성한 비극 구성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리어왕은 자기중심주의의 어리석음, 혹은 이기심이라는 결함을 보여줍니다. 자기에게 잘하는 딸을 보면서 그들의 의도나 동기를 고려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취하다가 정작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을 내쫓는 어리석음을 보이죠.

우리 삶에 이런 비극은 흔히 일어납니다. 내가 가진 조건이나 내가 처한 상황이 내 판단의 준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리어왕은 이런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런 결함이 자기 자신에게 초래할 비극을 우리에게 시사해줍니다.

저의 설교 목소리와 관련한 두 가지 극단적인 평들을 떠올리면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가 처한 상황으로만 현실을 이해하는가 하는 점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저 자신도 늘하는 실수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것을 극복하지 못함으로 비극을 맞고 마는 것이죠.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 역시 이런 점을 보여줍니다. 왕에게 반역했던 오빠를 묻어주려는 안티고네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던 왕의 극단적인 대립은 결국은 도미노처럼 안티고네의 죽음과 거기서 비롯된 그를 사랑하는 왕자의 죽음, 왕자의 죽음에 고통받던 왕비의 죽음으로 결국 왕의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아마도 아테네의 시민들은 안티고네를 보면서 타협과 화합의 정치를 배웠을지도 모릅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비극이 공연되고 아고라에서 이뤄진 합리적인 토론들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철학을 발전시켰을 것입니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의 미메시스 곧 모방이 우리를 정화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미메시스는 단지 우리 삶의 모방이 아니라 그 삶의 깊은 곳에 자리한 형상 곧 이데아의 모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준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과 정치 현실들은 이런 화합을 가져다주는 메카니즘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극단적 대립과 고립주의, 자아에 함몰된 세계인식은 갈등만을 남긴 거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서사를 잃어버린 세계가 직면한 고통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의 삶은 단지 타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미메시스를 가져다주는 거울입니다. 그 중 단연 최고의 거울은 바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미메시스이죠. 이 척박하고 퍽퍽한 현실에 화합된 공동체를 가져다줄 수 있는 최고의 서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감과 직면, 복음  (0) 2020.06.11
공평과 정의  (0) 2020.06.05
부부의 세계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  (0) 2020.05.16
박해와 인구 이동  (0) 2020.05.13
율법을 대면하는 방식과 복음  (0) 20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