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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변종 기독교, 바리새증후군

변종 기독교, 바리새증후군

노승수 목사


1. 
진리의 말씀을 대면하고 자기를 대면하기에 실패하면 바리새증후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 엄청난 책망을 듣고도 그 미련이 벗어지지 않는데 그야말로 불치병인 셈이다. 자기만 옳다하면서 정작 자기가 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으며 상대가 자기만 옳다 주장한다며 상대를 비난하는 일에 열중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리새증후군의 결정적 문제점이며 불치의 원인이다.
2. 
분노란 원래 그 성격상 문제의 원인과 책임이 내가 아닌 타인과 상황에 있다는 정서적 이해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느 문화에서나 분노가 정당화 되는 데는 상당한 명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진리로 자신을 정당화 하려한다. 이게 자기를 대면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바리새증후군은 그래서 치열한 진리 싸움을 하는데 그 심중에는 이런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한 특징은 이처럼 진리로 포장된 분노이다. 사실은 이게 가장 큰 비극이다.
3.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8:44)
마귀의 일은 살인과 거짓이다. 살인의 원인은 미움과 분노이며 미움은 내면의 왜곡을 분노는 상황과 타인의 왜곡을 부른다. 거짓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진리로 아무리 껍떼기를 둘러 싸도 그 형국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 진리와 근거리에 있으면서도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게 바로 바리새증후군이다. 진리를 가까이 하지만 결코 진리와 섞이지 않고 진리를 사용해 자신의 옳음과 타인의 잘못을 비난하지만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하진 않는다. 거짓은 원래 그래서 진리와 원거리에 있지 않고 진리와 최단거리에 존재한다. 미움과 분노는 진리를 가장 잘못 사용하는 가장 좋은 예인 셈이다.
4. 
분노라고 해서 들끓는 용암과 같은 양상이리라 속단하는 건 오해이다. 분노는 때때로 무시. 멸시. 환멸. 지배. 등으로도 표현된다. 보다 사회적 분노로는 삐지는 것 역시 상황과 타인을 내 영향력의 지배하에 두려는 일종의 용인되는 사회적 분노이다. 바리새인이 죄인이라 여기며 무시와 멸시를 일삼는 데는 이런 내적 요인이 존재한다. 
분노와 미움은 그래서 은혜을 파괴하는 가장 직접적인 죄이다. 문제는 이것을 죄로 인식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게 바리새증후군을 불치로 만드는 직접적 이유이자 원인이다.
5.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빌3:2)
바리새증후군은 변종 바이러스처럼 생물적 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를 거듭한다. 위 본문의 손할례당은 바리새증루군의 기독교적 변종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맹렬히 비난하신 까닭에 기독교와 바리새주의는 공존과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지만 기묘한 변종. 손할례당의 모습으로 다시 교회에 침투한 바이러스이다. 이들의 특징은 신앙을 자기자랑꺼리로 삼으며 개들처럼 틈만나면 짖으며 물어뜯기에 바쁘다. 교회의 모든 분쟁에는 이 변종 바이러스의 감염과 전염이란 병리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과 은혜 백신의 주기적 사용 만이 감염을 방지 할 수 있다. 이를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은혜의 방편이라 정의했다. 기도와 말씀은 자기 대면과 겸손을 위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이다.
6.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딤후3:3)/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딤후3:4)/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3:5)/
말세의 영적 증후들에 관힌 말씀이다. 특징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사나움과 자기 중심성이다. 이 두가지는 어떤 신앙적 양상 곧 경건의 모양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불신앙임을 보여주는 영적 지표이다. 사나움은 자기 의도에 반하는 것을 제거하고 자기 의도를 관철시키는 방편이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상식(?)은 이런 때 적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나움과 자기중심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사납다면, 그것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한다. 내게는 없는지 각자 돌아봐야 할 때이다......말세인지라....
7.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15:2)/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시15:3)/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15:4)/
신앙감정에 있어서 항상 분노나 미움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망령된 것을 멸시하는 감정 역시 신앙감정의 일환이다. 대체로 사람이 가지는 분노와 미움은 자기 중심성에서 나온다. 사람의 분노를 기장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은 운전 할 때이다. 
분노는 세가지 정도의 조건 하에서 발현된다. 의도성. 사적 공간. 지위. 운전은 이 세가지가 가장 잘 드러나는 환경이다. 첫째. 분노란 의도를 가졌다 그것이 좌절 될 때 일...어난다. 의도가 없거나 충분치 않을 때 우린 쉽게 양보하고 양해한다. 
둘째. 아무리 화가나도 공적 장소에선 화를 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회화의 결과이며 학습의 산물이다. 사실 충분히 No라고 해야하는 상황에서도 착해야 한다는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받은 교육의 결과 충분히 자기 소명을 못하기도 한다. 그 결과 분노 에너지는 사적 공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가정이나 차안이 대표적이다.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는 구절은 성경에 비추어 충분히 No라고 말해야 할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패하기 때문에 삶이 황폐해진다.
셋째. 분노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종로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눈을 흘기며 직장에서 터지고 가정에서 화풀이를 해댄다. 차안이란 공간은 이 세가지의 분노 조건이 가장 잘 드러나게 힌다. 목적지라는 의도성. 독립된 공간. 지위에서 벗어난 독특한 상황. 
그리고 분노의 중심엔 자기중심성이 있다. 의도성은 이것의 반증이다. 그러나 신자가 갖는 신앙 감정으로서 망령된 것에 대한 멸시는 성경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는 것이다. 물론 바리새증후군의 자기 합리화의 여지가 여기에도 상존한다. 분별점이라면 신앙감정은 말씀이 기준임으로 상당히 유연한 반면 자기중심적 분노는 성경이 증거하는데로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정하며 상황과 감정을 왜곡하는 참소로 가득하며 진실. 특별히 자기고백적 진실을 결여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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