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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종말론

부활 이전의 성도는 어디에 가나요?

부활 이전의 성도는 어디에 가나요?
[질문]
(1) 마지막 날 성도들이 부활을 하기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되기 이전에 거하게 되는 곳은 어디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 요한복음 6장 40,44,54절 또한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11:24) 
(2) 사울과 아들들은 어디에 갔는가요?
마지막 날 부활 전에 성도들이 머무르는 곳이 있든 없든 어쨌든 영은 이 땅을 떠나게 되는 것이 분명한데요. 그렇다면 사무엘상 28장에 사울의 요구로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드리는 장면은 귀신을 불러드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지요?
그리고 삼상28:19절 말씀대로라면 사울과 아들들(요나단 포함?)은 어디에 있게 되는 것인가요?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당신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기실 것이오. 당신과 당신의 아들들은 내일 나와 함께 있게 될 것이오.”
[답변]
성경을 벗어나지 말라.
신자가 죽은 이후와 마지막 날 부활 때 사이에 어디에서 어떤 상태로 있게 되느냐는 중간기(中間期- The intermediate state)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여럿입니다. 그런 이견(異見)들이 있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성경이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은 중간기의 실체(Reality) 자체가 없다거나 그 실체의 모습이 희미한 안개처럼 모호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인간에게 설명해주어 봐야 잘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더 혼돈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명확히 설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인간 언어가 담아낼 수 있는 차원은 인간이 항상 접해서 경험하는 물질세계와 내적으로 사고하는 정신세계에 국한됩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차원을 인간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자 불가능한 일입니다. 심지어 현미경으로 보는 바이러스나 전자망원경으로 보는 우주조차 분명 물질계임에도 말로선 도무지 설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의 진짜 실체를 본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 죄에 찌든 인간이 보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심판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은 절대적 선(善)인지라 죄악과 공존할 수는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당신을 보이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 당신의 인간을 향한 사랑을 먼저 보이시고 스스로 인간 죄악에 대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또 그런 구속의 진리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계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수준에 맞추어 당신을 스스로 낮추어 인간의 말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땅에서 이뤄졌고, 죄인의 구원도 살아 있는 동안에 이곳에서 받아야 하며, 나아가 그 구원 진리도 인간 언어로 이해하여서 주위에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 계시는 이 땅의 인간, 그것도 신자에게만 유용한 것입니다. 반면에 중간기는 이 땅을 벗어난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성경이 중간기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 여전히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비유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죽었다 부활한 이가 증거 해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활한 이가 증거할 내용은 중간기의 구체적 상태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실재(實在) 여부일 뿐인데도 그렇습니다. 
또 “선지자의 말”이란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믿지 아니하면 천국 갔다 온 이가 증언해도 그 실재조차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뜻하는 바는 둘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것만으로 죄인의 구원 진리로서 충분하기에(딤후3:15-17) 기록된 바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의 실체도 믿지 않는데 구체적 상황은 말해 주어야 이해도 못하고 혼란만 준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갔다 온 바울은 또 다른 부작용을 염려했습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드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1:6,7)
실제로 천국을 보고 온 바울 같은 자가 그것을 아무리 정확하고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고 해도 듣는 사람들이 온갖 상상과 과장을 덧붙여서 이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입신(入神)의 체험을 한 자를 비상한 능력을 가진 자로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숭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다보면 본인도 우쭐해져 자신이 아주 신령한 자로 착각해 교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이 그런 간증을 하지 못하게 사단의 가시 즉, 육신의 질병을 허락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천국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으면 신자들의 소망이 견고해지지 않을 수 있기에 하나님은 응분의 계시를 그 일을 위해 특별히 택한 사도를 통해 주었습니다. 바울과 요한은 동일하게 중간기의 구체적 양태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체험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더 확실히 깨달아 전하는 일에, 요한은 천국과 마지막 날에 대한 소망을 키우게 하는 일에 적용토록 하나님이 부르셨던 것입니다. 
결국 중간기에 대한 해석은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에 기록된바 이상을 넘어서 추측, 가정, 과장, 오해, 착각 등을 해선 안 됩니다. 성경이 확실하게 말하는 사실만 붙들고 천국과 마지막 날에 대한 소망을 견고케 해야 합니다. 현재의 믿음을 더욱 성숙시키어 이 땅에서 이뤄야 할 소명을 실천하는 데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천국을 대비해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예컨대 재물을 다 팔고 일도 않고 전도만 해선 안 됩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유지해야 하지만 종말주의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중간기의 상태
성경은 분명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썩어 없어져도 인간 존재가 완전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신앙상의 과제에 관해선 성경에, 그중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최종적 권위를 두고 해석의 근거로 삼아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불신 세상이 신자를 죽여도 절대 죽이지 못하는 영혼이 그 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럼 죽음 후에도 영혼은 계속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영혼이 영계에서 붕붕 떠다니느냐 일정한 곳에 가 있느냐만 문제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구원으로 얻은 영생은 “그리스도와 연합”이어야만 합니다. 그분과 떨어져 영혼이 혼자서 방황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이 주제에 관해 성경문답 사이트# 33 “하나님은 여러 천국을 지으셨는가?”와 # 32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의 글들도 참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약속했습니다. 분명히 당신과 함께 가서 거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낙원의 구체적 상태는 말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이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할 수 있지만(헬라 철학의 영혼 불멸설은 성경과 다름) 지옥에서 멸한다고 말했습니다. 지옥에 보내는 형벌을 말하는데 십자가상에서 회개치 않은 강도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도 그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더라”(6:9), 또 “목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20:4)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목이 베인 채 나머지 몸만 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순히 순교자의 영혼을 말한 것입니다. 순교를 당하지 않고 죽은 신자와 순교자의 영혼이 함께 천국에 모여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인간은 영혼과 육신 합쳐져 있어야 완전한 것이므로 죽음은 몸과 영혼의 일시적 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날 육신의 부활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부활하는 마지막 때의 대부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노라.”(고전15:42-44) 분명히 육신의 부활을, 그 구체적 양태는 신령한 몸이라고만 표현되어 있지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럼 중간기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선 일정한 곳에 성도들의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즉, 천국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혼이 그곳에서 어떤 양태로 있을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지정의적 인식과 활동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천국 성도들 간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또 고통, 슬픔, 분노, 절망 등을 불러오는 죄악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에 오직 하나님과 영원하고도 완전한 교제가 가능한 곳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신자와 불신자룰 망라하여 이미 죽은 자와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모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를 그 새로운 곳에 적합한 신령한 육신으로 부활(이미 죽은 신자)시키거나, 변모(그 때까지 생존해 있는 신자)시켜 주실 것입니다. 불신자는 사탄과 함께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질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가 죽은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 육하(六何) 원칙적으로 따져서 구체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시기, 장소, 대상, 양태, 숫자, 활동, 등에 관해 인간의 언어로 설명해주어도 정확히 이해도 되지 않을뿐더러 혼동, 오해, 이단만 불러올 뿐입니다. 예수님마저, 이 땅에서 인간의 몸을 입은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마지막 시기를 모른다고 했지 않습니까?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 되지 않으며 죽음 이후의 상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따라 둘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그 연합이 절대 깨어지지 않은 채 연속되며, 그 반대로 연합이 되어 있지 않았다면 끝까지 그 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천주교의 연옥교리나 이단들의 죽은 자를 위한 세례는 전혀 틀린 것입니다.) 
서두에서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기에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인간이 꼭 알아야 할 부분들은 전부 완전하게 보여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영화로워지는 모습도 당신께서 첫 열매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의 시공간을 초월한 신령한 영혼과 육체로 변모되지만 여전히 제자들과 교제가 가능했지 않습니까? 이 땅의 어느 것으로도 구애 받지 않으며 죄악과는 완전히 결별한 절대적 진선미의 모습을 가지면서 말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가 부활에 대해 꼭 알아야 할 사항은 전부 완전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상에 내려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악에 묶인 인간의 실체가 어떠한지, 그래서 새 생명을 받는 길과 그 생명을 받으면 이 땅에서부터 어떻게 변하는지, 죽음을 뛰어넘어 마지막 부활 때의 완성될 모습까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신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모두를 당신께서 가르치고 실천하고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을 닮아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훈련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단순히 죄의 본성을 이겨내는 성결에 관한 싸움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 대해 알고 실천하여 완성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즉, 진리를 알면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현실의 염려 고통 뿐 아니라 죄악과 사탄과 죽음 모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얼마나 풍성하고 거대한 일입니까? 천하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과 아들과 아버지의 사이가 되어서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과 같이 신령하고도 영화로운 존재로 바뀝니다. 나아가 이미 확실한 사실로 미리 보장되어 있습니다. 도무지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거대한 비전을 품고 이 땅에서부터 그분을 닮게 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로 인해 살고 죽어야 합니다. 중간기의 구체적 양태는 이런 소망과 확실하게 이뤄질 보장에 비하면 신앙적으로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유컨대 이미 왕자가 되어서 살고 있는데도 자꾸 왕자란 신분과 지위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간기가 없다면?
그런데도 중간기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는 이유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설명에 조금 상이한 점들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사자(死者)의 영역인 음부(陰府-스올)라는 표현이 마치 죽음 이후에 인간 존재가 종식되거나 마지막 때까지 잠만 자는 것 같아서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음부라는 말 자체가 죽은 자가 가는 별도 영역이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 구체적인 양태는 몰라도 말입니다. 그럼 사후에도 인간은 그 영역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죠지 앨돈 래드라는 신학자는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방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by Eerdmans, 1974 p194)
구약적 표현이란 설명한 방식만 신약과 다르지 그 가리키는 내용은 실질적으로 같다는 뜻입니다.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그래서 그 뜻을 밝힌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 즉, 구약성경에선 계시는 포괄적으로 희미하게 시작되어서 점진적으로 구체적이고도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다른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구약의 서술은 당시의 관습, 문화, 사람들의 사고 수준에 맞춘 것일 뿐입니다. 최종 해석의 근거는 성경 전체에 드러나는 일관된 뜻과 신약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구약 내용이 전혀 다른 데도 억지로 기독교 교리에 끼워 맞추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신구약 간에 뜻이 다르지 않으며 무엇보다 구약은 신약의 온전한 계시로 나아가는 중간단계임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스올’이라는 표현도 KJV 성경에선 무덤(grave 31회), 지옥(hell 31회), 구덩이(pit 3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ASV와 RSV에선 ‘스올’이라는 단어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별해서 “죽은 자가 가있는 영역”, “불경건한 자들이 심판을 받은 지옥”, “단순히 육신적 죽음”의 의미를 갖습니다. 요컨대 이 땅에서의 존재방식이 끝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중간기가 없다는 즉, 인간 존재가 멸절되거나 계속 잠만 잔다는 명확한 의미는 없습니다. 
반면에 구약 성경은 육체의 부활 사상도 곳곳에 드러나며 무엇보다 악한 자와 경건한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 사후에는 서로 다르다는 확신이 점차적으로 나타납니다. 한 마디로 구약에서도 히브리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9:27)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49:14,15) 
재물을 의지하는 악인의 운명은 음부 즉, 지옥에 둔다고 합니다. 저희가 세상에서 뽐내고 형통했던 ‘아름다움’만 그곳에서 소멸되지 그 존재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경건한 자는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한다고 했습니다. 영혼이 천국에서 중간기를 보낼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선 에녹의 예가 생생하지 않습니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하나님이 그를 완전히 멸절, 마취, 숙면, 냉동시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당신이 계신 다른 차원으로 데리고 갔다는 뜻 아닙니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5) 본문의 일차적 의미는 신자의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지만 예언적 의미로 사후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보고 만족하는 지정의적 활동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73:24) 이 시편의 주제는 악인과 선인의 영원한 운명을 대조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광’은 바로 사후에 즉, 중간기와 마지막 심판 때에 누릴 영광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중간기에 그 영혼이 신자는 천국에, 불신자는 지옥에 간다는 것이 부인되면 신학적으로 결정적 하자가 나타납니다. 동양사상 식으로 구천에 떠돌든지, 그래서 이 땅의 영역으로 들락날락하든지, 언제일지 모르는 마지막 때까지 잠만 잔다든지, 선인과 악인의 구분 없이 한 곳에 가있다든지, 또 죽음으로 모든 것이 멸절되어 끝나버린다면 기독교 신앙은 전혀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천국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질 필요 없이 이 땅에서 그냥 먹고 마시는 것에 전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합니다. 
영혼이 완전히 없어졌거나 계속 잠을 자고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이 땅과 비교해 더 아름답고 풍성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 따져서 천국과 지옥이 꼭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천국이 존재하기에, 그것도 갔다와본 바울인지라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기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니 이는 그것이 더욱 좋기 때문이니라.”(빌1:21-23)라고 자신의 간절한 소망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헬라 원어에는 하나의 관사가 ‘떠난다’와 ‘있게 된다’는 단어를 같이 수식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동전의 양면처럼 떠나서 죽는 순간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또 그 상태가 지금보다 훨씬 좋다고 합니다. 영혼이 수면 상태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중간기의 구체적 상황에 대해선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실재와 좋다는 것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중간기에도 지정의적 인식은 분명 있습니다. 손(인간의)으로 짓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에서 그 집에 적합한 형태의 존재양식을 갖고 그분과 완전한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육체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죽기 전의 육체로 다시 입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신령한 육체로 바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는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 이미 영원한 부활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후의 존재양식은 당연히 영화롭고 신비로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간기 동안에 마지막 부활을 위한 사전 준비, 공적, 조건, 자질 등이 전혀 요구되지 않습니다. 죽는 즉시 하나님이 지은 집을 소유하고 거하게 됩니다. 지구의 삶에 맞는 육신에 거했던 존재가 그 육신을 떠난 상태에 적합하며 그리스도와 온전하고도 영원토록 동행할 수 있는 존재 양식으로 바뀝니다. 
물론 중간기는 마지막 날을 기대하는 잠정적인 시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신자의 죽음, 천국, 중간기, 육체부활, 마지막 심판, 새 하늘 새 땅 등을 세분해서 알려 하거나 각각 다른 기대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부활은 죽는 순간에 완성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얻는 순간 완전한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기에 완성을 향한 단일한 기대와 소망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겐 점괘가 나오지 않는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나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려 올렸나이다.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삼상28:15,19) 
블레셋과 대적할 사울이 영육 간에 완전히 곤비해져서 신접(神接)하는 여자 무당을 찾아가서 자문을 얻고자 사무엘의 혼백을 불려 올라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구대로 사무엘의 신이 땅에서 올라와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기록의 문자적 의미로만 따지면 그러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일관된 사후 심판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아주 이해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성경에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여러 장르가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fact)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역사에 해당됩니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최초로 이런 기사를 쓰게 된 출처와 경위가 어떠했겠습니까? 분명 사울과 함께 간 신하들과 무당에게서 이야기가 흘러 나왔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자도 당연히 그날 그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기가 들었던 그대로 서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 당사자들이 이 일을 두고 기도하면서 율법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 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한들 제대로 알 수 있는 영적 수준도 전혀 안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에게는 사무엘의 혼이 올라온 것으로 보이고 들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올라왔다는 기록은 오히려 이 사건의 진실성을 더 확실히 해주는 셈입니다. 
바꿔 말해 그 혼이 정말 사무엘의 혼이었는지, 또 그렇게 올라온 것이 성경 원리로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앞뒤 문맥에 드러난 당시 상황에 비추어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판단의 정당성 여부도 신구약 성경 전체에 드러난 일관된 원리로 검증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애매한 부분에는 그 문맥 안에, 혹은 그 책 안에,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힌트가 반드시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것은 28:3입니다.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사울은 분명히 사무엘의 명에 따라 그가 죽은 후 혹은 그 이전에 전국적인 종교 숙정행위를 단행했습니다. 성경이 사무엘의 죽음과 숙정을 함께 묶어서 기술한 것을 보면 사울 스스로 행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이 쳐들어오자 불안에 떨며 무당을 찾았습니다. 평소에도 사울이 그랬다는 반증이며 그래서 사무엘은 더더욱 사울더러 숙정하라고 강권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무당이라면 치를 떠는 사무엘이 일개 여자 무당이 초혼(招魂) 한다고 나타날 리는 만무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신접한 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다 하나님과 직접 교통한 이스라엘 최초의 선지자가 무당과 협력할 수는 절대 없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모든 인간은 죽은 이후에 천국과 지옥의 심판으로 나뉘며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올 수도 없습니다. 변화산상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의 경우는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했기에 이 경우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신자가 무당이나 박수 앞에 가면 점괘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하면 점쟁이들이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가 신령해서가 아니라 신자 안에 보배로 함께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 앞에 무당에게 있는 사단의 영이 일절 꼼짝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또한 무당과의 협력 자체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더 결정적인 힌트는 28:14입니다.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무당과 사울이 사무엘의 정확한 형상을 본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인줄 알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겉옷을” 입었으므로 라고 해서, 실체를 못 알아볼 가능성이 높았다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겉옷만 사무엘의 것을 입었지 그가 아니었다는 의미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쨌든 혼백의 형체가 나타나니까 모두 기겁을 하고 당연히 사무엘이라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요컨대 악령이 영매(靈媒)인 접신녀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말처럼 정확하게 예언한 것은 발람 선지자를 통해 발락 왕에게, 또 나귀의 입을 통해 발람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듯이(민22-24장) 하나님이 역사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사단이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아서 사울을 비롯해 모두에게 겁을 주려고 정확히 예언했고, 하나님은 욥의 경우처럼 그 예언을 묵인 해주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바로 얼마 전에 이스라엘 전국에 종교 숙정행위가 이뤄졌습니다. 무당과 박수의 공개적 활동이 금지된 상태입니다. 사단은 이 사건으로 신접자의 신령한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서 종으로 삼으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그런 계략을 알고도 묵인한 것은 욥의 경우처럼 그런 가운데에서도 당신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을 세우고 또 비록 소수일지라도 오직 신실한 당신의 백성을 남겨두시려는 뜻입니다. 
사울은 지금 완전히 사단의 종이 되어 시종일관 사단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여호와께 제사도 지내고 했지만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그랬을 뿐입니다. 사무엘의 말대로 종교 숙정을 단행한 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서가 아니라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랬을 뿐입니다. 
그가 하는 실토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무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벌써 그를 떠났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그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이 주제에 관해선 성경문답 # 6 “한 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의 글을 참조 바랍니다.) 
따라서 그와 그 아들이 죽어서 함께 가야할 곳은 당연히 지옥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가운데 요나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구원 여부를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에 함부로 추측해선 안 됩니다. 말하자면 19절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의미가 지옥이나, 단순히 사자(死者)의 영역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그냥 내일 전쟁터에서 죽을 것이라는 단순한 뜻의 히브리 어법적 표현일 뿐입니다. 
5/3/2009 박신
출처 : http://www.nosuchjesu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