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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분노 바이러스의 역습

분노는 주제를 모른 체 권리가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온다. 그러면 내 분노만큼이나 우주 만물과 인간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는 왜 생각지 못할까? 자기 분노는 정당하면서 왜 하나님의 분노는 부당한가?

 

그래서 은혜는 자기상승의 힘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제한(zimzum)에서 온다. 우리 비참의 처지를 직면한 자만이 은혜에 기댈 수 있다. 예수께 바리새인이 나오기 어렵고 세리와 창기가 나오기 쉬웠던 이유이기도 하다.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바이러스는 온갖 분노를 쏟아놓고 있다. 세계 각국의 공통된 현상이다. 혐오와 배제를 낳고 각종 가짜뉴스들이 생산되고 퍼진다. 선전과 선동이 난무한다. 자기 권리가 박탈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다. 종로에서 뺨을 맞고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중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교가 정치를 만나 각종 혐오를 퍼나른다. 벤게메렌이 말한 우상의 가장 직접적 형태는 바로 현실정치다. 대중의 목소리가 선지자의 입에 반영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한발 코로나바이러스는 신천지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참 교회와 거짓 교회, 참 그리스도인과 유사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리트머스 역할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공산주의, 동성애와 소수자 인권 등의 잇슈와 맞닥뜨리면서 분노를 정당화하고 권력에 기생하던 언론이 숙주이자 슈퍼전파자로서 사회와 교회에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다. (http://bitly.kr/waQWgAdV).

 

메르스 때 정부가 감염자 300만이 나와야 비상이라고 안이한 인식을 가질 때도(http://bitly.kr/8SYi9JBI), 제대로 대처가 안 되어서 마스크 1개당 1만원일 때(http://bitly.kr/I0yEnBmB)도 이보다 시끄럽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공포와 분노가 만들어낸 거짓과 우상들은 종교와 교회의 공동체를 통해서 소비되기 시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신천지와 그 기형적 신앙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그것을 닮아 있는 우리 신앙과 교회의 현주소도 드러내고 있다.

 

신명기적 언약(신 28장)을 고려할 때, 기근과 역병, 전쟁은 우리가 은혜를 구하고 회개로 나아가야 할 때이지 분노를 조직화하고 공포를 확산하며 거짓과 선동질이나 하면서 집단괴롭힘을 하는 아이들처럼 굴 때가 아니다.

 

역병에도 분노와 공포만 나도니 여기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이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보여준다. 죄와 비참을 보지 못하고 희생양을 찾는 것이 예수를 팔던 이스라엘과 그 무리의 죄를 닮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