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에게서 자연법이란 첫째, 하나님의 창조의 미덕에 의한 본성적인 질서이며, 둘째,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계에서 연역해낼 수 있게 하신 도덕적 질서를 의미한다(Arther C. Cochrane, “Natural Law in Calvin,” Church-State Relations in Ecumenical Perspective, ed. E. A. Amith (Louvain: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6), 204.) 즉,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과 거기에 속한 인류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에 직면해 있으며 이것은 본성적이며 도덕적 질서로 첫 창조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존속되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의 반영이다. 여기에는 중세적인 자연법 개념이 언약과 함께 이해되어 나타났다. 즉, 은혜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완성시킨다는 아퀴나스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John Coffey, Politics, Religion, and the British Revolutions, 152-53.). 칼빈의 자연법 자체가 언약적인 질서를 반영하는 셈이다.
이러한 칼빈의 이해가 우르시누스에게 가서 자연 언약 개념으로 발전했다. 우르시누스는「신학총론」(Summa theologiae)에서 은혜언약 (foedus gratiae)을 둘째 언약인 자연언약 (foedus naturale)에 연결하여서 설명하였는데(Lyle D. Bierma, "Law and Grace in Ursinus' Doctrine of the Natural Covenant: A Reappraisal," in Protestant Scholasticism, 96-110.)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제 36문항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답 율법은 창조시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과 함께 맺은 자연언약을 포함하는데, 이는 본성으로 인간존재가 아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며, 그것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져 있으나, 이와 동시에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과 하나님의 진노가 가해진다."라고 진술하는데 그 내용은 행위 언약과 같다. 멜랑히톤(Melanchthon)도 율법폐기론자들을 반대하면서 Scholia에 십계명이 자연법을 반영하기에 폐지될 수 없는 도덕법이라고 썼다(Timothy J. Wengert, Law and Gospel: Philip Melanchthon’s Debate with John Agricola of Eisleben over Poenitentia (Grand Rapids, MI: Baker, 1997), 197.).
우르시누스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영어권에서는 최초로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을 구분해서 설명했다(E. Brooks Holifield, Theology in America: Christian Thought from the Age of the Puritans to the Civil War (New Haven, CT: Yale Univeristy Press, 2003), 39.). 이런 경향은 17세기로 넘어가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그 대표적 예가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던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의 "법과 군주(Lex, Rex)"였다. 법을 근간으로 한 군주와 백성의 관계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후일, 토마스 홉스나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의 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언약의 조건으로서 법 개념이 이 시기에 왕성하게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이런 율법과 언약 이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덕법은 아담이 타락전에 가지고 있던 법규로 도덕법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의의 완전한 규범(WCF. 19. 2.)이라고 설명했다. 즉 행위 언약은 타락으로 인해 깨졌을지라도 그 언약이 지닌 하나님의 온전한 도덕적 통치의 규범이자 의의 표준으로서의 성격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 우리 불순종의 죄를 온전히 갚으심으로 의롭게 되어야 할 필요를 드러내어주기도 한다.
의의 규범으로서 도덕법적 요구와 이를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순종과의 관계는 녹스와 5인의 목사가 작성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장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가장 의롭고 공정할 뿐 아니라 거룩하고 완벽하며, 또한 그 명령이 온전히 지켜질 때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며 영원한 복락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받아들여 고백한다(레18:5; 갈3:12; 딤전1:8; 롬7:12; 시19:7-9; 19:11). ...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준행할 수 없다(신 5:29; 롬10:3). ... 율법의 목표이자 완성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의와 속죄 안에서 그를 온전히 붙잡는 것이 우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삶이다. 또한 우리가 비록 모든 면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불완전한 순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완벽한 것인 양 간주하시고 받아주신다(빌2:15). ....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이는 자유를 얻은 성도들이라고 해서 율법에 복종할 의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에 순종하는 행위에 대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복종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이외에는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그 율법을 다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한다."(이광호,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 (서울: 교회와성경, 2015.), 179.)
그런 점에서 의무로서 법이 지닌 쌍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런 언약과 법적 관계는 편무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은혜에서 그 기원을 둔다. 패트릭 길레스피(Patrick Gillespie)가 말한 것처럼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은 둘 다 그것을 효력있게 만드는 원인(작용인)은 "단순한 은혜"라는 이해 역시 칼빈에게서 발견되는데, 시편 주석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시행에서도 자신의 은혜를 확립하셨다.”(Calvin's Comment on Psalm 119:6.)라고 표현했다.
율법에 대한 이런 은혜를 기반한 이해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중심이며 완성이며 완전함이며 성취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I. John. Hesselink, “Calvin's Concept and Use of the Law,” (unpublished Ph. D. diss.: Basel, 1961), ch. Ⅶ, 17.) 의식법과 시민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과 폐기되었고 도덕법은 그의 인격과 가르침으로 더욱 명료해졌다(VanGemeren, Ed. Wane G. Strickland. “The Non-theonomic Reformed View,” The Law, The Gospel, and The Modern Christian: Five Views. (Grand Rapids: Zondervan, 1993.) 37.). 그런 점에서 율법에 대한 예수의 도덕적 교훈은 모세의 율법과 여전히 연속적이다(John Murray, Principles, 149-80; K. Chamblin, ed. J. S. Feinberg “The Law of Moses and The Law of Christ,” in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Westchester: Crossway, 1988), 187-92.) 이런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벨기에 신앙고백서 25장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김의환,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4), 193.)
오늘 우리는 구약의 절기와 제사법을 지키지 않는다. 이유는 그 절기와 제사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담과 모세가 받았던 도덕적 요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에게 요청된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지킬 수 없지만 그 부족함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덮으셔서 마치 우리가 지킨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도덕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은혜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율법과 복음이신 그리스도의 관계성은 이렇게 선명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인식 속에는 신학의 부재로 제대로 정돈되지 못한 채로 율법주의자가 되거나 율법폐기주의로 치우친 사람들이 많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의식법과 구약시대를 지배하던 정치윤리로서는 율법의 종결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이 성취되었으며 도덕법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도덕적인 성격이 더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불연속적이면서 연속적인 율법, 곧 십계명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곧, 십계명은 도덕법의 요약이지만 구약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의식법과 시민법으로서 형법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율법들에 의해서 완성되는 측면이 있었고 사법적 요구로 이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예컨대, 1-4 계명에서 안식일 계명은 우리가 의식법으로 쉽게 인식하지 쉽다. 실제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안식일을 도덕법이 아니라 의식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을 포함한 1-4 계명이 도덕법이라는 의미는 이 법령에서 정치적인 명령 곧 시민법적이며 형법적 요소는 폐기되었다는 의미다. 1-4계명뿐만 아니라 5-10계명의 경우, 구약 안에서 정치적이며 형법적 요소에 의해 유지되는 경향이 강하게 있었다. 예컨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경향을 우리는 요한복음 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도덕법으로 남았다는 의미는 이런한 정치 사법적인 집행이 종료되고 폐기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동시에 도덕적 요소만 남은 것으로 이해된다(WCF. 19. 4.)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 보면, "그것은 그 백성의 국가와 함께 종결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거기에 있는 일반적인 형평법(the general equity)이 요구하는 이상의 것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 형평법이 바로 사랑이다. 복잡한 율법을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단순화하신 것이다(G. E. Ladd,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74), 129f.). 그리스도가 단순화하신 방식은 바울에게 이르러서는 그리스도, 율법, 성령과 사랑은 모두 통합되었다(Herman Ridderbos, Paul: An Outline of His Theology, trans. John R. de Witt (Grand Rapids: Eerdmans, 1975), 286-88.).
의의 완전한 규범이자 도덕법으로서 십계명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의”를 잘 보여준다(Inst., 2. 8. 6.). 십계명은 도덕법으로서 우리를 죄책과 은혜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왜냐하면, “명령과 금지는 항상 말로 표현된 것 이상을 함의”하기 때문이다(Inst., 2. 8. 8.).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는 미워하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이런 사실이 우리 자신의 무능력과 부패에 대해 절망하게 하며 그로 인해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고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들로 나가도록 만든다. 이 은혜의 수단으로 인해 우리가 의의 완성자이시요 종결자이신 그리스도께 붙어있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 결과, 율법의 요구가 열매로 신자의 삶에 결실로 나타나며 이 결실조차 부족하여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충분치 않으며 이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에 기대어서 그가 받으실만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시작이 은혜로 시작하며 그 마침 역시 은혜로 마치는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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