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한 언어를 사용하라(약 3:1-12)
노승수 목사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전체적으로 :B" : 순전한 언어 사용(3:1-4:12)
선생과 혀(3:1-12)
3장 1절에서 4장 12절까지는 경건한 자의 언어 생활에 관한 단락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으면 그 생활의 열매를 나타내는데 특히 경건 생활에 있어 말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직분을 받는 일은 더 조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어제 본문에서도 살폈듯이 바울의 믿음에 관한 교훈을 잘 못 적용하는 무리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거짓교사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성도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언사들을 잘 알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서 떠드는 교사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언어 사용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럼 본문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많이 선생되지 마라(1-2)
선생이 되다 의 의미는 '교회의 집회에서 교사로 나서려고 하다'라는 뜻입니다. 앞서 살짝 설명드렸듯이 아마도 선생인체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믿음의 도리를 곡해하여서 성도들이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는 교훈을 가르치는 무리들을 향해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 야고보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선생들 중에 낀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교사'들이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고보사도는 자기도 그들 중의 한 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더 엄격한 척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만큼 책임도 무겁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의 혀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쁜 짓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직위를 얻으려는 사람은 스스로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생각할수록 목회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실감합니다. 목사는 신학자여야 합니다. 얄팍한 메시지로 성도들이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혀의 사용은 단순히 그 사람의 혀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상과 정신세계 전체를 보여줍니다. 제대로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교사로 나서는 일은 자신에게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2절에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능히 온 몸도 굴레를 씌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온전한'이라는 단어는 야고보서에서 수차례 반복적으로 사용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자유의 법(1:17, 25) 그리고 믿음을 완성시키는 실천과 효력을 설명하는데 사용됩니다(1:4, 2:22). 행동의 온전성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길의 온전성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구약의 전형적 사고입니다. 마태복음(5:48, 19:21)도 예수께서 완성하신 법을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히 순종함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강조했던 바울 역시 로마서의 기록이 동기를 '믿어 순종케'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롬 1:5, 16:26). 온전한 순종의 사람이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의 온 몸 역시 굴레를 씌워 실수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고 합니다. 실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제가 실수했습니까? 용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그들이 수많은 실수를 통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처럼 우리에게 실수가 있지만 그 실수는 장차 온전함을 꿈꾸는 실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과 이웃의 실수에 대해서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온전함을 꿈꾸고 있습니까?
2. 혀의 특성(3-8)
혀는 작지만 배를 움직이는 키에 비유가 됩니다. 말을 순종케 하는 것이 온 몸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케 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합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 사릅니다. 그리고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납니다. 혀의 잘못된 사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혀가 얼마나 길들이기 어려운지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합니다. 혀는 단순히 우리 지체의 기관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거짓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것은 쉬지 아니하는 악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또한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말로 표현합니다. 아는 중에 표현하고 알지 못하는 중에 합니다. 만약 우리가 알지 못하는 중에 하고 있다면 우리는 혀를 제대로 다스리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자는 자신의 혀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은 알지 못하는 중에 하는 말이 없도록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을 능히 지배하고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성령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일이 없이 능히 자신의 심중의 깊은 것을 능히 깨달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니 말하는 것을 누가 능히 통제하겠습니까?
형편이 이러한데도 우리는 옆사람의 말을 그냥 쉬이 곧이 곧대로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마음에서 나오는 죄입니다. 특히 동양적 사고에서 이간계가 쉽게 들어 먹히는 것은 먼저 누군가에 대해 들은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는 내적 기준이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그 사람의 말을 다 해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것을 묻고 확인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쉬지 않는 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은 일에 대해서 삼자대면을 하면 쉽게 확인이 다 되는 일을 자기 마음의 악을 따라 먼저 누군가에게 들을 말들로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게 됩니다. 말하는 것의 중요성 만큼이나 듣는 것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듣는 것 역시 말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그 듣는 것을 아마도 성경에서 확인하려고 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자는 결코 성경이 전하는 참된 진리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됩니다. 진정 나는 누구나에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까?
3. 혀를 주의하라(9-12)
그래서 혀를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혀로 주를 찬송도 하고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니 이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샘이 단물과 쓴물을 함께 내지 못하고 나무가 포도와 무화과를 같이 열매맺지 못하는 자연의 이치처럼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으로 형제를 저주하는 것은 정말 마땅치 못한 일입니다. 앞서 이미 설명드린대로 이런 말을 하는 자의 죄도 크지만 이런 말을 듣는 자 역시 자신의 마음의 악으로 그 말을 쉬이 믿어 버리는 것도 역시 죄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악함은 소문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소문은 쉽게 퍼져나가고 선한 소문은 잘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악을 따라 악한 것을 말하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듣는 일에 제가 주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기는 그가 무엇을 들었느냐에서 이미 결정이 나기 때문입니다. 혀는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환경으로부터 무엇인가 정보를 얻을 때부터 확인이 됩니다. 나는 나의 언어 생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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