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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비트겐슈타인의 내면 엿보기

비트겐슈타인은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오스트리아 철강회사가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소유였다. 그의 집에는 매일 음악가를 불러 음악을 연주했는데 이 때 초빙된 음악가가 브람스, 슈만, 말러 등이었다. 형제들의 음악적 재능도 상당했지만 여기서 엿보이는 것은 아버지의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 성향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집안이 유력한 만큼 억압도 컸던 거 같다. 첫째 형은 아버지가 가업을 잇기를 바랬고 그 강압을 이기지 못해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후 거기서 자살했다. 둘째 형도 군대에서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자 비관하여 총으로 자살했다. 셋째 형도 배우로서 살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에서 나와 베를린에서 살다가 한 술집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하고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셋째의 자살의 이유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아마도 이것은 집안의 억압적 분위기에서 비롯된 오이디푸스적인 좌절이 그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형이 좋아했던 음악이 의미심장한데, Thomas Koschat의 "나는 버림받았네(Verlassen, Verlassen, Verlassen bin ich)"였다. 아마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감정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의 거대한 성공은 가족에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에게 어린시절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은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였다. 그녀는 클림트와도 인연이 있어서 클림트가 초상화를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프로이트의 친한 친구로 독일에서의 탈출을 돕기도 했다. 그가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한 것은 형들의 자살과 무관치 않았으며 그것을 배경됐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전장에서 죽기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더 특이한 점은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조차 늘 사색하면서 글을 썼다는 것이다.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이 썼던 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의 영혼을 깨닫게 하소서!", 형들의 자살로 미뤄볼 수 있는 가정에서의 심리적 좌절과 자기 영혼을 위한 구도적인 갈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그는 이 원고를 마무리 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논리철학논고다. 이것은 라틴어로 쓰여진 그의 전기 철학의 완결이며 논리실증주의의 바이블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 후, 동성애자에게 끌렸다. 그는 이런 경험을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 그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셋째 형의 동성애적 성향과 자살의 내면적 역동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수용소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이 가능한 조건이 되었지만 부하들을 두고 혼자 석방될 수 없다고 석방을 거부하기도 했다. 석방 후 논리철학논고를 출판했다. 그의 놀라운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버지가 전쟁 전에 사둔 채권이 엄청나게 올라 전쟁 전에는 오스트리아 갑부였지만 전쟁 후에는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는데 그 재산을 예술가들과 누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자신은 논리철학논고 이후 그는 철학은 끝났다고 하며 은퇴해서 시골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청빈하게 지내며 방 한 칸과 단촐한 가구가 전부인 생활을 했다.

그의 논리철학논고는 신의 세계를 도려낸 근대 지성의 완결판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철학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낙향 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캠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돌아가는 기차역에 경제학자 케인즈가 마중을 나가기도 했다. 근데 케인즈는 그의 부인에게 이 일화로 편지를 썼는데 "신이 돌아왔다"고 썼다. 그만큼 비트겐슈타인은 천재였다. 그는 이때 학위가 없었다. 석사조차 없었다. 그의 논리철학논고는 100쪽도 안 되는 짧은 책이며 러셀의 추천으로 이 책을 박사논문으로 제출했다.

그가 돌아온 후 후기 철학을 담은 "철학적 탐구"를 집필하게 되는데 이것은 학계에서 "언어적 전회"로 불리며 코페르니쿠스적인 발견으로 불린다. 영미 계통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출발이었다. 그의 철학적 탐구는 노르웨이의 한 오두막과 아일랜드의 오두막 등에서 집필이 되었다. 케빈 벤후저의 "이 텍스트는 의미가 있는가"에 보면 오스틴의 일상 언어는 바로 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적 탐구에서 말하는 언어의 의미, 곧 언어는 그 사용법에 의해서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데로 전환이 일어난다. 그의 전기 철학을 그림이론이라면 후기 언어 이론은 일상 언어 이론이며 오스틴은 확장해서 종교적 언어 역시 유의미한 것으로 설명했다. 이것을 fideism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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