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어른 목사님들께 이런 사고방식이 있다. 예컨대, 세배하러 온 후배 목사를 끝까지 강권하여 그냥 앉힌다. 그럼 후배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게 되는데 이 때 정색하시는 것이다. "아니 왜 자리에 앉으시는가?" "아 목사님께서 앉으라 권하셔서..." 그럼 다시 말씀하신다. "아니 그건 내 할 도리고 자네는 자네 도리를 하셔야지...." 이런 방식은 일본인들의 속마음과 겉마음,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다. 한동안 유교문화라고 오해된 이 행동은 조선이 선비들의 강직함과 대조를 이룬다.
극단적으로 표현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 이런 풍속이 많이 남아 있다. 예컨대, "차린 것 없지만 많이 드세요..."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요...." 누구나 다 알지만 말하지 않는 예절인 셈이다. "맛은 없지만 드셔보실래요?"는 진짜 맛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것이고 속의 의도는 맛보고 칭찬하시라는 것이다. 유교라는 윤리적 당위가 살아 움직일 때는 별 문제 없던 의사소통의 방식이었으나 점차 이런 배려(?)가 사라지면서 오해를 낳는다.
어느 목사님이 사임하게 될 때, 원로 목사님이 "멀리가서 개척하면 누가 따라가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원로 목사로서의 도리를 한 것이다. 그런데 후배 목사는 그 말을 액면가로 듣는다. 그리고 근처에 개척을 하면, 그럼 원로 목사는 당회원들에게 사임하는 목사는 진심으로 교회를 위하지 않는다는 자기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근처에 개척한 목사는 원로 목사가 솔직하지 못하고 장로들을 만날 때와 자신을 만날 때 말이 다르다며 그의 의중을 의심하고 정치 행위로 간주한다. 통역은 외국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데 누가 잘 했다 잘 못 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다. 서로를 더 배려하면서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지 않은 잘못이 크다. 고양이는 기분이 나쁠 때, 꼬리를 쳐들고 개는 기분이 좋을 때, 꼬리를 쳐든다. 상대의 신호를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면 관계를 망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사람이란 자기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의 의사소통과 욕구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에서도 일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양식을 먹을 때, 한식을 먹을 때, 각기 다른 식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사소통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면 다 한 가지 자기 방식이 있고 그 방식으로만 세상을 파악한다. 우리에게 관용이 찾기 어렵고 용서나 화합을 보기 어려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나치게 자기가 과잉되어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가 말이 막히면 상대의 잘못으로 돌리거나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반박할 자료들에 집중해서 그것을 논리적으로 조직하는 사고를 하고 있다면 말을 들을 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만 먹었지 미숙한 것이다. "우리는 다 다르며, 달리 생각한다." 이것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은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기술에서부터 시작하고 거기에 적절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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