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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아버지 살해와 자기 부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크샤뜨리야 출신 왕들을 죽이고 나서, 왕국과 신하를 없애고 나서, 브라만은 두려움 없이 간다
-법구경 21-294
Mātaraṃ pitaraṃ hantvā, rājāno dve ca khattiye;
Raṭṭhaṃ sānucaraṃ hantvā, anīgho yāti brāhmaṇo.  
Dhammapada 21. Pakiṇṇakavaggo 294 

 

살생을 금하는 불교에서 살부살모를 말한다. 이는 실제 부모를 살해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다. 성경에서 비슷한 내용을 찾으라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정도가 될 수 있다. 우리 안에 나의 나된 것을 방해하는 부모의 그림자를 제거하라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너무 어리고 연약한 아이와 거대하고 강한 아버지에서부터 비롯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유비가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고대 12 티탄신 중 하나인 크로노스는 가이아로부터 자신의 아들이 자신을 반역할 것이라는 신탁을 듣고 자신의 자녀들을 잡아 먹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크로노스의 이와같은 반응은 자신이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함으로 티탄 시대의 최고신이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자기 반영이다.

 

이것은 마치 살인을 저질렀던 가인이 누군가 자신을 살해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과 유사하다. 자기 행동을 타인에게서 보는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아버지는 지나치게 자녀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그들의 자기 됨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크로노스처럼 행동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세 형의 자살은 모두 아버지의 크로노스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큰 형 한스는 가업을 물려받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자살한다. 둘째 형 쿠르트는 1차 세계대전 중 부하가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에 비관해 자살하는데 이 역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는 방식으로 적응된 세계관으로 아버지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셋째 형 루돌프는 배우로 살기를 희망했지만 역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청산가리를 먹고 술집에서 자살을 한다. 셋째 형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은 금욕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동이었을 것이다.

 

물론 성경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잠 4:4)" 이 교훈이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명철에 기반했을 때, 그와 같은 조건을 갖출 때 마땅히 따라야 하는 교훈이다.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가르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내 생각은 100% 헤브라이즘답다"라고 말할 정도로 유대인적인 사고를 했다. 집안은 유대인 혈통이었다. 당연히 구약 성경의 교훈에 익숙했고 형들의 자살에서 보듯이 아버지가 얼마나 엄격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엄격함은 성경의 전통을 빙자한 것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이었던 프로이트가 소포클래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그리스 신화와 비극들에 아버지와의 경쟁과 반목이 신화적 유비들 속에 가득한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살생을 금기로 삼는 불교의 경전에 살부살모가 등장하는 것 또한 이것이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갈등이자 인간의 성장을 저해하는 근본 요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김헌의 "천년의 수업"에서는 크로노스와 제우스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최고 신에 등극하는 과정을 아버지 살해(patroktonia)라고 했는데 이는 세대교체와 한 개인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외형적으로 다 성장한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스톡홀름증후군에서 보듯이 납치 피해자는 자신의 인격 깊숙하게 지배하여 들어오는 가해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려는 메커니즘을 보인다. 하물며 무기력한 영아가 부모에게서 자라는 동안 겪게 되는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심리적으로 함입(introjection)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내적인 힘은 거대하다. 내면의 애착의 힘은 외부적 대상을 함입함으로 정신 내적인 균형을 이룬다. 법구경은 살부살모를 어머니는 갈애를 그리고 아버지는 자만으로 해석한다. 즉, 어머니는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 아버지는 인정받으려는 "대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둘이 살해되어야 비로서 진정한 자신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에서 오딧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이타카로 돌아가던 길에 키클롭스 거인 폴리페모스들이 사는 섬에 정박했다가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다. 오딧세우스는 포도주를 만들어 바치고 위기를 모면하는데 이 때 폴리페모스가 묻는다. "네 이름이 뭐냐" 이 때, 오딧세우스는 "난 '아무도 아냐'"라고 답한다. 그리고 술에 취해 잠든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게 한다. 그 사이 도망을 하게 되고 동료 폴리페모스가 와서 누가 이랬냐고 묻자 "아무도 아냐"라고 답하고 동료들은 그것은 신의 벌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위기를 피해 배에 오른 오딧세우스는 "난 아무도 아냐가 아니라 라에스테스의 아들, 이타카의 왕, 오딧세우스다"라고 외친다. 우리 안의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죽고 인정받으려는 대상이 죽어서 우리가 아무도 아닌 게 될 때 진정한 의미의 자신이 된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기부인이며(마 16:24) 죽어야 할 한 알의 밀이다(요 12:24). 나 자신은 내가 욕망하는 바이며 내가 인정받으려는 대상이다. 그렇게 자기 욕망을 투영하지 않는 자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않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고 교제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