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 : 절제
노승수 목사
성령의 열매 중 마지막 열매는 절제(self-control)이다. 성령의 열매가 단수이고 이것이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는 점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절제 역시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명사 절제(ε?γκρατεια)는 엥크라테스(εγκρατη?? : 강한, 지배하는, 억누르는, 자제하는)에서 유래했으며, '확고성'과 '자제'라는 어감을 지닌, 자신이나 어떤 것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적 문제에 관련된 억제, 참을성, 견실이란 의미의 자제(self-control)도 의미한다.
엥크라테이아는 신약성경에 총 4회 언급되었다. 특별히 바울은 엥크라테이아를 "성령의 열매"로 묘사한다. 여기에서 자제 혹은 절제는 분명히 간음(포르네이아), 불순, 방탕, 우상숭배(갈 5:19)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행동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수단인 엥크라테이아는 결코 우리들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들이 복음에 의탁함으로써 성령의 선물로 새로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의 엥크라테이아가 단지 성적 측면에만 관련되느냐 혹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있다. 벧후 1:6을 보면,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여기서 절제는 지식의 사용에 관여한다. 절제란 모든 행사를 적절(법)하게 행하는 내적이며 외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한다(E. R. Fuhrman).
여기서 엥크라테이아를 금욕주의적 의미로 이해하면 안된다. 이 용어는 오히려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 능력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자기 실현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벧후 1:5 벧후 1:6)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신자가 곤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내를 위한 선결 조건이다.(H. Baltensweiler).
절제는 인내의 기반이 된다. 절제력의 결여는 인내의 결여를 낳는다. 그러나 진정한 인내는 결국 신앙적 지식 곧 하나님 경험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절제가 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을 함의한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이 경험되고 그의 임재를 체험하지 않고, 절제력을 가질 수 없다. 절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영향력을 인식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조절하려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절하려고 든다. 이와 같은 지배의 욕망은 가인에게 나타났다. 살인에 대한 욕망과도 상통한다. 요한 사도도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고 하셨다. 정신역동에 의하면, 미움 곧 적개심(hostility)은 흔히 지배로 나타난다. 상대의 삶을 통제하고 조절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절제는 상대의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조절함으로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절제가 성령의 열매라는 점에서 인간적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음 명백하다. 절제가 사랑의 또다른 표현이라는 것도 여기에 상통한다. 베드로 사도가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식은 지배력을 의미한다. 특별히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흔히 지식이 지배하는 지식자본주의 사회라고 말한다. 이처럼 지식은 사람을 지배한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며 하나님의 영향력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지배는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나타난다. 이것이 진정한 절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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