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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디도서강해

선한 일과 성품으로 행하라(딛 3:1-7)

선한 일과 성품으로 행하라(딛 3:1-7) 

노승수 목사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1-7, 개정)
1.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1-2)

성경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유는 선한 일을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들이 성경의 진리에 반하는 주장을 우리에게 강요할 때, 우리가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과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과도 훼방하거나 다투지 않고 관용하며, 모든 일에 온유함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라고 합니다. 성경에 온유라는 단어는 원래 겸손과 같은 어원을 가집니다. 진리를 따르는 기본적 태도이지요? 예수께서도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란 율법의 상징입니다. 주님의 법에 순복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합당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있는 사람을 쉽게 비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증거합니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가 악한 통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찢으며 우리가 주님의 덕과 은혜를 드러내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2. 관용과 온유를 드러내야 하는 이유(3)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우리도 전에는 그와 같은 자였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엎드려 침뱉기라는 소리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이 구속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진정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라면, 그저 비난이나 우리의 일삼으며 거짓과 게으름과 자기 배만을 위하는 삶을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자연적인 모습입니다.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원래 관용과 온유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기도할 때만 드러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안드러난다구요? 그건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요, 만남에서 자연히 불완전한 우리가 완전하신 하나님을 닮는 것은 영적 이치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요? 

3.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긍휼을 따라 구원하시는 하나님(4-7)

우리 중에 누가 자신이 의롭다고 소리를 높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시로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두 가지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는 중생의 씻음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 모두 성령의 핵심적인 사역입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성령 받은 증거로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전에 하지 못했던 어떤 체험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또한 우리로 3절에 속한 삶으로부터 새롭게해서, 1-2절과 같은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받은 가장 큰 증거는 삶의 변화라는 것입니다. 방언 하는데, 성질은 고약하다, 그럼 거듭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고전 12:12에 의하면, 완전한 계시인 성경이 주어진 이후로 모든 은사들이 중단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이에 대한 이견들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령의 주된 사역은 방언과 같은 기이한 체험을 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이 무슨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중생하는 일을 통해 우리의 죄를 씻지 않으면 이전이랑 동일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것은 무슨 말일까요? 방언을 하더라도 이전과 삶이 달라진 게 없다면 그것은 가짜라는 것이지요. 제가 전에 사역하던 일산의 어느 한 교회에 사모님은 참 굉장한 분이었습니다. 기도하는데,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일을 묵상하다 주님 나는 왜 안되나요? 라고 기도했더니, 자신의 몸이 어느 순간 공중에 떠 있더랍니다. 신학교 다닐 때 일인데, 한 달인가 차에 기름을 넣지 않고도 가고, 하루는 친지가 와서 맥주를 한 잔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자신의 모공으로 맥주다 나왔다고 합니다. 100% 거짓말이지요. -
그럼 모 장로라는 분이 집회에서 하는 말은, 여의도 모 교회에서 예배 때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치유되게 하셨다고 선언하는 모 목사는요? 그런거 다 거짓입니다.
- 그런데 성질은 얼마나 고약한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교회 부임하는 첫날 교회 문앞에서 전화로 어떤 분을 야단치는데, 연말 정산 서류였던 모양인데, "십일조 3000만원 하는 사람이 너 때문에 시험들어 교회 안오면 니가 책임질꺼야"라고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방언을 했습니다. 과연 이게 성령의 역사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령의 역사의 핵심은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입니다. 나에게는 신자로서 아름다운 성품의 표지가 나타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