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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디도서강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 2:1-15)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 2:1-15) 

노승수 목사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4] 그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5] 신중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9]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10]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딛 2:1-15, 개정)
전체적으로
: 본문의 문맥을 보면, 목회자인 디도에서 바울이 바른 교훈으로 성도들을 가르치며 양육하길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 양육을 11절에 의하면,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함이라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십니다. 그것이 일차적 원인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목회자를 통하여 양육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좋아하던 선생님 과목의 성적은 좋고, 싫어하던 선생님의 과목은 나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영혼과 생명이 달린 문제 아닙니까? 그러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어제도 제가 말씀 드렸지만, 현대 교회의 문제점은 이런 목양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육적인 것이든지, 성장통을 미리 경험해보고, 거기에 적절한 대처법을 알고 성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각종 경험들에 대해 좋은 멘토가 있다면 적절히 잘 대처하여 슬기롭게 위기들을 넘길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로부터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있을만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이 양육의 기본적 목적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친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 교리에 천착하는 일은 바람직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것이라면, 단순히 교리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일을 위해서 목회자의 도움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평신도가 사역한다는 시대입니다. 사실 이 평신도라는 표현 자체도 개혁주의 입장에서보면,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평신도란, 사제와 구별되는 계급을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회자가 성도와 구별되는 특별한 계급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로, 이 삼직은 교회의 항구적 직분이며,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란 표현은 적절치 않은 표현입니다. 목사를 포함하여 교회의 모든 성원은 성도이며, 장로, 집사 역시 성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수평적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의 목양적 돌봄은 주님께서 정하신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부활 후,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치라고 말씀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에베소서에 의하면, 교회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이 직분을 주셨다고 했습니다(엡 4:11-12) 
그러므로 평신도 사역자는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물론 성도를 잘 훈련하고 온전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역자로 만드는 것이 주된 이유나 목적이 아니라 성도로 온전케(integrity)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근대 이후, 서구를 포함한 지구촌의 대부분은 사회는 기능주의화 했습니다. 무슨말이냐면, 기능에 의해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증언에 따르면, 노인의 백발은 존경의 대상(잠 16:31, 20:29)입니다. 나이가 드는 것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사회에서는 노인의 백발은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얼마나 전문성(expert)이 있느냐가 존경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또한 이런 기능적 특징은 그의 인격과 전혀 무관합니다. 교회의 양육은 그를 기능인으로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를 전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위의 목회자가 성도의 각 계층에 권면하는 내용 중에 기능적인 부분이 존재합니까? 우리의 내적 성숙을 도모하는 것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의 기능인이 되거나, 기도의 기능인이 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거룩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우리의 인격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무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도록 격려하는 직분이며, 성도들은 목회자들로부터 마땅히 이러한 부분의 도움을 구하고, 함께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을 힘쓰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나의 내면은 어떻게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떤 권면이 필요한 상태입니까? 그걸 진단할 수 있는 지경에 있습니까? 나는 목회자와의 관계가 어떻습니까? 그의 신실하고 중심어린 조언을 나는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입에 발린 말들만을 기뻐하며 즐거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