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攝理)란 무엇입니까?
[ 본문: 히브리서 1장 3절, 시편 104편 ]
이승구
우리는 지난번에 창조 사실과 창조 신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 우주와 심지어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이 되는 창조의 사실을 믿고 전능하신 창조자를 생각하는 일은 피조된 이성적(합리적) 존재들에게는 당연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창조와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17세기말부터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과 당시의 신대륙인 미국에까지 번져간 이신론(理神論, deism) 또는 자연신론(自然神論)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이 세상이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 나가게끔 하셨다고 생각합니다.1 그래서 이신론자들은 피조계를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정교한 우주를 디자인(design)하신 창조자를 생각하고 그에 대한 경이를 느끼고, 그가 자연계에 부여하신 법칙을 애써 찾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피조계와 어떤 직접적인 관련을 갖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을 발휘하셔서 이 세상과 역사의 과정에 관여하고 계셨고, 또 지금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섭리(攝理, providentia, providence)라고 불러왔습니다.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하였던 이신론자들은 창조는 믿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론자들은 "가슴속에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을 지닌 합리주의자들이었다"고 표현한 드라이든(Dryden)의 표현은 옳다고 할 수 있습니다.2 그러나 창조만 믿고 섭리를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종교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믿으라고 하신 것을 다 믿지 않는 것 또한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섭리 교리에 대한 근대의 오해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의 또 하나는 섭리의 과정을 따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과정을 동일시하려는 헤겔(Hegel)의 사상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은 범신론(pantheism)일 것입니다. 이는 이신론과는 달리 섭리를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성경이 말하는 대로 섭리를 이해하지 않고, 섭리의 과정이 하나님의 존재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 세상 역사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에게도 매우 형성적인 과정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에 의하면 창조와 섭리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며, 사실상 하나님께서 섭리하신다는 개념도 사라질 정도로 역사의 과정을 하나님 자신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3
그러므로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마 현대에 들어 와서 가장 심각하게 왜곡되는 교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섭리 교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섭리의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7 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문답은 다음과 같이 묻는 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써 당신이 이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섭리 개념의 이해
섭리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이 "전능하고 항존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 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의 본유적인 능력, 특히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용하셨던 그 능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써 섭리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은 "항존적인" 능력이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에 섭리에 작용하는 능력이 항존적인 능력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능력은 항존적인 것이므로 우리로 하여금 전혀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합니다. 우리는 넉넉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는 손길을 믿고 우리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섭리의 능력에 대한 믿음에는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믿음이 그 배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이런 섭리가 발생한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되어 지는 일들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것입니다.
그런 전능하고 항존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일은 다음 두 가지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유지 또는 보존"(preservation, conservatio, sustentatio)이라는 말이고, 또 하나는 "통치"(government, gubernatio)라는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은 지극히 거룩함과 지혜와 권능으로써 모든 창조물과 그 모든 행동을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일입니다."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제 11 문답). 이 둘을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그 개념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지 이 과정들이 결코 떨어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보존과 통치, 그리고 후에 말할 협력이 모두 하나의 섭리적 사역의 여러 측면들이기 때문입니다.4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 또는 보존하신다는 말은 "모든 피조물을 붙드신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성자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것들의 존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 당신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붙드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이 피조계는 결코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은 그 존재의 시작에서만이 아니라 그 지속에 있어서도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께 의존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자족적인(self-sufficient)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리스가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잘 설명하고 있듯이, "성자의 유지시키시는 활동의 범위에서 배제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5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존재도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도 다 하나님의 우리를 붙드시는 손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님과 관련을 가지지 않고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깨달은 시편 기자는 피조계 전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 104: 27-29).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있는 존재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의 붙드시는 손길 때문에 이 순간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신 태양이 없어지면 자신들이 그 존재를 계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 태양을 창조하시고 유지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인정하지도 않는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상황입니까?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깊은 통분함을 느껴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와 붙드시는 손길을 유의하고 그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와 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바빌론 포수기에서 돌아와 회개하면서 찬양을 드리는 옛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아주 바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해야 할 것을 천명한 후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 8:6). 온 세상의 피조물들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데도,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심한 통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 세상을 그저 유지해 나가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님께서 영원 전부터 가지신 목적을 향하여 이 세상이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세상을 운영해 나가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경영 또는 경륜(oiconomia, economy)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다스리심[統治, gubernatio, government]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통제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의 역사와 민족들의 흥망성사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를 잘 깨달은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단 2:21);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아야만 한다고 말입니다(단 4:25). 이 세상에 되어 지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손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체적 통치 행위에서 그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라는 것이(엡 1:11) 잘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평소에도 이런 사실이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아주 잘 나타나는 것은 때로는 이 세상의 죄악을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최후의 심판에서는 더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말로 다음과 같은 아모스의 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둥머리를 쳐서 문지방으로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셔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육하리니 그 중에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의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눔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그 칼을 명하여 살육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아모스 9: 1-4).
이런 심판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섭리가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심판만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인 것입니다.6 그에는 가장 사소한 것도 포함되고(마 10:29-31), 우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포함되며(잠 16:33, 왕상 21:19-24; 왕상 22:17, 34-36), 선한 일도(빌 2:13), 악한 일도(욥 1:11, 12; 2:4-6), 자원해서 나타나는 자유스러운 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보존과 통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하시는 것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을 향해 잘 다스려 나가시는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려고 하는 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며, 모든 피조계가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형성을 위하여 온 세상을 지금도 유지하시며 다스려 나가시는 것입니다.
2. 섭리의 구체적인 과정은? - 기적의 경우 외에는 동시 발생, 혹은 협력(concurrence)7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는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책임지셔야 하며, 다른 존재들은 다 그의 조종에 의해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섭리에 대한 심각한 오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연관 관계를 무시하고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강요와 억압을 부여하여 피조물들의 작용과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원인 결과의 관계를 너머 서서, 즉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지 않고, 또는 그 과정에 역행하여(contra media), 즉 자연 법칙으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단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직접 일으키기도 하시고, 관여하시기도 하십니다.8 그러나 이런 이적들(miracles)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providentia extraordinaria)인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말하고 있듯이 이는 참으로 비상(非常)한 일로 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바다 가운데에 내신 길로 가게 하신 일이나,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신 일이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행하신 이적들이나, 사도들의 선포의 확증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일으키도록 하셨던 소위 "사도적 이적들"(apostolic miracles)과 같은 이적들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일을 하신 비상 섭리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또 보편적으로는 대개 이 세상의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사용하셔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는 제 2의 원인(the second cause, causa secunda)을 사용하셔서 섭리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벌써 이 세상에 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중세 때 스콜라 신학자들이 즐겨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만물의 "제 일의 원인"(the prima causa)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이 모든 것의 직접적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말이 아님에 유의해야 합니다. 제 일의 원인이신 하나님은 제 2의 원인들을 무시하고서 사역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 2의 원인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되 그 제 2의 원인들의 성격을 잘 활용하셔서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하나님과 제 2의 원인들이 협력하여(a concurrence of the first Cause with the second causes) 일이 이루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9 이를 협력(co-operatio, cooperation) 또는 동시 발생(concursus, concurrence)라고 우리 선배들이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제 2의 원인의 원인으로서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방식으로 섭리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어떤 일을 하도록 하실 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주관하심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지는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바울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 13)라고 말할 때, 이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의 연관성을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10 이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심이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과 경영이 우리의 의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우리는 자동 기계나 로봇과 같아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책임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하나님의 뜻의 작용이 간접적으로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의지를 강요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우리의 의지의 활동,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제 2의 원인이 동시 발생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섭리 교리의 실천적 의미는?
이러한 섭리 교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매우 실천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에 우연히(by chance)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과 관련하여 일어난다는 것이 섭리 교리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에서 말했던 이적들과 같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되는 일도 있으나, 대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등 하나님과 간접적으로라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관장 아래에 있으므로 이 세상에는 "우연히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점을 확언해 주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까지라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섭리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서 우연에 근거하거나, 요행을 바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개혁자들이 카드놀이를 금한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연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락으로 카드놀이 등을 즐길 수는 있습니다마는 기본적으로 요행이나 우연을 기대하는 태도는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문제시해야 하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각국마다 유행하고 있는 복권 제도입니다. 미국이나 영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열심히 복권을 사고 있습니다. 그런 일에 따르는 다른 문제점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복권 제도 배후에 있는 우연에 근거한 생각, 즉 이 세상에 우연히 요행히 되는 일도 있다는 생각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진화론이 옳을 수 없는 것도 이 생각이 기본적으로는 우연에 근거하여 생물의 발생과 진화를 설명해 보려고 하려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우연에 근거하여 무엇을 설명해 보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섭리 교리의 첫 번째 실천적 의미입니다.
둘째로,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좋은 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적인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리들의 아버지의 손길에서 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면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27 문에서는 "꽃잎이나 풀잎, 비나 가뭄, 풍년이나 흉년, 음식이나 음료, 건강이나 병, 번영이나 가난 이 모든 것이 사실은 ...... [하나님]의 아버지다운 손길에서 우리에게 온다는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따라서 섭리의 대상에는 신자나 불신자, 피조계 전체, 심지어 천사들과 타락한 천사들인 악한 영들(귀신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는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계 일반보다는 인간들에게, 또 인간들 일반보다는 당신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섭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특별 섭리라고 하고, 그 중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치는 섭리를 "아주 특별한 섭리"(특특별 섭리, a very special providence, providentia specialissima)라고 불러 왔습니다.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은 그저 세상 만사를 하나님께서 다 섭리하신다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 자녀된 자신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섭리하시는 줄 알고서, 그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고 그 인도하심에 잘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이들과 그 섭리 아래 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큰 차이인 것입니다.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다 섭리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론적으로는 오직 성경적으로 바르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섭리를 인정합니다. 그들은 섭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음 말씀을 실천적으로 체험하며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마지막으로 바른 섭리 교리를 배운 이들에게 오늘의 신학적 상황 가운데서 요구되는 하나의 이론적인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섭리를 하나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 범신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을 교묘하게 변형시킨 만유재신론(pannentheism) 극복의 과제라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 강의를 마치고자 합니다. 이것은 과정신학, 몰트만과 융엘의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 큐피트 등의 비실재론적 신학, 심지어 이전 시대의 바르트의 신학에도 등 오늘날 신학계에 상당히 펴져 있는 심각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도 섭리 교리를 오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20세기말과 21세기초에서도 전통적 신학을 유지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만유재신론에 대한 극복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주제(agenda)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섭리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로 정립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미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대표적인 이신론자들로 우리는 영국의 John Toland (1670-1722), Anthony Collins (1676-1729), Matthew Tindal (1655-1729), 유럽 대륙의 Hermann Reimarus (1694-1768), (Francois-Marie Aroute Voltaire (1694-1778), 그리고 미국의 Thomas Paine (1737-1809)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를 우리의 이성에 부합하는 이성적인 종교로 만드는 일에 부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Dryden: "rationalists with a heart-hunger for religion", quoted in New Dictionary of Theology (Leicester: IVP, 1988), s.v. "Deism."
3 헤겔 사상과 그와 같은 범신론적 사상의 이런 점에 대한 좋은 지적으로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165, 166, 168을 보라.
그는 아예 "a pantheistic confusion of God with the world"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165).
4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다른 곳에서와 같이 이 문제도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개념상의 정의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Berkhof, 169;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One Volume Edition (Grand Rapids: Baker, 1985), 388, 389, n. 1.
5 Leon Morris, "Hebrews,"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14. 이 본문에서 성자가 전면에 나서도록 표현된 것은 성자만이 섭리하신다는 것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자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모리스의 논의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이다.
6 섭리의 포괄성에 대한 좋은 논의들로 Berkhof, 176;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trans. George Musgrave Giger, vol. 1 (Phillipsburg:,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1992), 498-501을 보라.
7 흔히 섭리를 보존, 통치, 협력으로 셋으로 나누어 말하나(Berkhof, 169-76; Mastricht, a Marck, De Moore, Brakel, Francken, Kuyper, Bavinck), 보존과 통치의 두 요소를 말하고 협력을 그것이 이루어지는 구체적 과정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던 과거의 신학자들, 특히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그리고 댑니(Dabney), 핫지 부자(the Hodges), 딕(Dick), 쉐드(Shedd), 맥펄슨(McPherson) 등에 따라 여기서도 이런 설명을 시도한 것임에 유의하라. 이에 대해서 Berkhof, 166을 보라.
8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Berkhof, 176을 보라.
9 이런 표현에 대해서 Berkhof, 167을 보라.
10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 즉 "너희를"을 (Michaelis나 I. H. Marshall이 주장하듯이) 각각의 교인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Ralph Martin이 생각하듯이) 빌립보 교회 전체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리 심각한 대립의 문제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여기서는 이 둘을 다 취하여 생각하는 것이 옳은 듯하다.
11 이 점에 대한 지적으로 Berkhof, 168을 보라.
'조직신학 > 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0) | 2018.02.06 |
---|---|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0) | 2018.02.06 |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고찰 (0) | 2018.02.05 |
칼빈의 삼위일체론 (0) | 2018.02.05 |
삼위일체되신 하나님 (0) | 2018.0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