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
[ 본문: 마태복음 6: 25-33 ]
이승구
우리는 지난번에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사실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창조 신앙을 다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지난번에 말한 대로 창조의 사실을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창조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 사실은 성경에 기록한대로 믿지 않으면서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고 그것은 믿으려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대의 신학적 정황 가운데서는 창조 사실을 성경에서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는 일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창조 사실을 나 자신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그 일에 나의 존재를 던져 넣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제 26문을 따라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 당신이 믿는 바는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일반적 유신론의 입장에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1) 기독교 유신론적 의미에서의 창조 신앙은 사실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모두 믿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무(無)로부터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로서 지금도 그것들을 붙드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창조와 섭리에 대한 신앙); 둘째로, 그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며(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 그리고 셋째는, 그런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시라는 것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다 믿는 이가 기독교적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유대교도들이나 이슬람교도들도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내용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도 그저 유신론을 가진 이들이 창조와 섭리를 믿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창조와 섭리에 대한 믿음'은 어떤 점에서 독특한 것입니까? 그것은 결국 이 창조와 섭리를 해 나가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영원 전부터 가지신 경륜을 따라서 (우리가 지난번에 생각한 바와 같이) 당신님의 뛰어나신 지혜와 크신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지금도 그리고 영원까지 이 피조계를 창조의 능력과 동일하신 능력으로 유지하시며, 통치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성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한 후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말하여(히 1:3), 지금도 온 세상을 섭리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심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서도 그의 창조의 능력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어떤 일을 믿는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의 창조적 능력의 붙드심이 없이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못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을 그의 창조적인 손길과의 대화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참으로 창조주를 믿는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를 그저 과거의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참된 창조 신앙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이 순간도 하나님의 창조적인 손길의 어루만짐이 있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며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조 신앙은 역동적 신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에 동일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서 살며 가르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또한 성령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아주 친근하게 "아빠"(αββα)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번에 생각한 바대로 성부와 성자의 아버지 아들 관계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만 있거나, 그 때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로고스[말씀]께서 성육신 하시기 이전부터도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는 영원부터 성부(God the Father)요, 성자(God the Son)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God the Holy Spirit)과 함께 영원한 삼위일체로 계시는 것입니다.2)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창조자는 "알라"가 아니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어떤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the Ultimate)에 대해 돌려 드릴 수 있는 수많은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3)
그런데 그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나의 하나님이요,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까지를 믿어야 창조 신앙을 제대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해서 내가 창조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나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존재론적 기초를 마련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 가운데 있지 않았을 텐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가 창조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를 믿는 이가 기독교 유신론적인 의미의 창조 신앙을 가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2. 창조자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창조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 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공중의 새보다 귀하며, 들의 백합화보다 귀하므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 31).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를 돌아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셨다고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전혀 관계하지 않는 듯이 생각하는 것은 결국 창조 신앙도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한 돌보심을 이처럼 믿어야 창조 신앙을 바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아름다움과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바라보면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하실까를 생각하고 믿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가진 이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수 없습니다 (마 6:25, 31).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자들은 주어진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 나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도는 그 모든 것의 해결을 자신이 다 해야 하거나, 다 할 수 있는 듯이 노심초사하거나 안절부절못하지 않습니다. 또 그런 문제에 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염려함으로 그 목숨을 한자라도 더할 수 없음을, 오히려 사실상 그것을 단축할 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4) 그는 오히려 상당히 초연한 자세로 모든 것을 잘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모든 문제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빌 4:6).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빌 4:7). 그러므로 참된 창조 신앙을 가진 이는 삶에 대해서 초연한 태도를 가지고, 그러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일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염려하는 것이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그의 아버지께서 창조하셔서 그에게 잘 보살피도록 맡기신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은 이 세상을 피하여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거나, 또 어떤 곳에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잘 살겠다고 하지 않고, 이 세상 전체의 과정과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삶의 모든 문제에 다른 어떤 이가 그럴 수 없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합니다.5)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듯이 생각하지 않기에 거리를 두고 초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한가지를 끊임없이 추구해 가고 그것을 위해서는 그야말로 노심초사하고 그것이 이루기까지는 쉬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추구로 그는 이 땅에 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있어서 그 나라의 온전한 의가 우리를 하루 속히 지배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 전에라도 그 나라의 의에 조금이라도 근접하는 것이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만 그의 이 세상에서의 힘쓰는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뜻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상)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구하다, 추구하다"(ζητ?ω)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keep seeking) 할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6)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우리가 구하고 추구하고 염려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신앙을 가진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에 터 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의 구체적인 삶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왕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슬픈 세상에서 그 어떤 역경을 네게 보내시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나의 선을 위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이 그것이 자신의 죄에 의해서 자초되는 것이 아닌 한 자비하신 아버지에 의해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그의 삶과 관련해서는 모든 일이 잘되리라고 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욥과 같이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예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고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는 이입니다.7) 그러나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지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며 지켜 주시는 것을 잊지 아니하며, 그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손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현세에서나 심지어는 죽어서라도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실 분이심을 바울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3. 창조 신앙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믿는 것이지만, 특히 다음의 두 가지 속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고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 세상의 어떤 힘이 능가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크신 힘에 대한 생각이 사무쳐야 합니다. 그 전능하신 힘으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만드시고, 지금도 그것을 유지하시고 통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경륜해 나가시며, 나를 그 나라 백성으로 삼으셔서 다스리시고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무(無)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전능한 힘으로 나를 돌아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실존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전능은 그저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문제와 관련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얼마나 강한 것으로 믿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연약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크신 힘을 가지신 강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으신 이가 온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강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그 분의 강력하나 자애로운 손길을 매 순간마다 의식하며 사는 이가 창조 신앙을 가진 이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큰소리치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힘을 나타내 보일 때만 무엇인가 있는 듯이 돌아보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이 세상적인 방식에 따라 살아야 할 것 같은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중에서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하게 부드럽게 세상의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으며 살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참으로 믿는 이들은 그 하나님과 그의 전능을 의존하기에 그의 방식에 따라 부드럽고 조용하게,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주장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연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은 강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전능의 발휘가 있습니다. 그 전능은 우리의 사적인 욕망이나 개인적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위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사용(私用)해 보려고 하는 생각은 사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반하는 생각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믿음직스러우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약속하셨다면 그는 이 약속을 어떤 상황에서도 신실하게 지켜 나가십니다. 그는 그야말로 신실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지 않으십니다.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진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참으로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변해도 그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그는 변함이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약 1:17 하). 이렇게 하나님 자신이 변하지 않으시므로, 따라서 그의 말씀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는 말씀도 결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적으로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좋은 일이 나타날 때만이 아니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불행의 순간에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그 분께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상하신 돌보심에 대한 우리의 최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리하실 수 있고.
그는 신실하신 아버님이시므로 그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우리의 유신론을 기독교 유신론(Christian theism)이라고 칭하고, 이런 사상의 독특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글로 다음을 보라: Corneilus Van Til, The Defense of the Faith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55), pp. 9-13, 114; idem, Christian-theistic Evidences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61); idem, A Survey of Christian Epistemology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0), p. 62; and idem, Christian Theistic Ethics (Phil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1).
2) 이런 점들에 대한 논의로 이승구,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52-67을 보라.
3) 이는 이를 주장하는 John Hick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진술임을 이제는 누구나가 다 잘 알 것이다. Cf. John Hick, God and the Universe of Faith (London: Collins, 1977); God Has Many Names (London: Macmillan, 1980); An Interpretation of Relig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9); Dispute Questions in Theology and the Philosophy of Relig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3). 다음의 비판서들을 참조하라. Ronald H. Nash, Is Jesus the Only Savior? (Grand Rapids: Zondervan, 1994), 그리고 근자의 졸역, 『다원주의 논쟁』 (서울: 기독교문서 선교회, 2001)을 보라.
4) Cf. R. T. France, Matthew,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85), p. 140.
5) 이런 활동에 대한 시사로 졸고, "복음화와 사회 참여",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5): 83-88; Paul Marshall, "노동, 소명, 그리고 쉼", Mark Noll and David Wells, eds., 『포스트모던 세계에서의 기독교 신학과 신앙』 (서울: 엠마오, 1994): 369-403 등을 보라.
6) Cf.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Eerdmans, 1992), p. 161, n. 105.
7)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졸고, "고난과 기독교", 『개혁신학 탐구』: 68-81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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