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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루터 계열의 예배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루터 계열의 예배
주승중 (장신대)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시간에 종교개혁이 근본적으로는 예배의 개혁과 함께 일어난 사건임을 보았다. 그리고 예배와 관련하여 개혁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그리고 개혁가들의 공통분모 등도 살펴 보았다. 그러나 결국 개혁가들은 각각의 주장에 의해서 그 길을 달리 하고 말았는데, 그들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사람들이었다.
즉 종교개혁시 예전에 관한 입장들은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독일의 루터, 쮜리히의 쯔빙글리, 스트라스부르크의 부처, 제네바의 칼빈 그리고 영국의 크랜머 등이다. 우리는 앞으로 그들의 기원과 발달과정 그리고 차이점 등과 아울러 오늘의 모습까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성경과 전통을 소중히 여긴 루터 계열의 예배에 대하여 공부하고자 한다.
2. 몸 말
1) 루터의 예배의식
마르틴 루터가 가장 먼저 개혁의 총성을 터뜨렸던 첫 주자였지만 개혁자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는 예배에 있어서 중세 교회의 미사로부터 어떤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아니하였다. 루터는 기존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는 몇 가지 문제되는 현안들에 대해서만 수정하기를 원하였다. 특별히 그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예배는 온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자신들의 언어로 집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독일어로 집례할 수 있는 예식서를 발간하고, 독일 찬송가를 쓰고 작곡했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구원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중세 후기의 예배에서 죽은 자를 위한 미사, 성직자의 독신주의, 순례, 평신도들에게 잔을 허락하지 않은 것, 화체설 등을 반대하면서 새로운 예배 신학을 수정 보완하였다. 그래서 맥스웰의 말대로 루터의 예배 개혁은 창조적인 것(creative)이었다기 보다는 보존하려는 경향(conservative)을 가졌다. 그는 처음부터 예배 형태를 바꾸는 개혁은 계획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루터의 예배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모순된 면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루터는 모든 개신교 예배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던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1520년)를 통하여 그의 성만찬 신학에 대한 입장을 피력한바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의 성만찬 신학과 제도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내린바 있었다. 그는 여기서 자국어로 미사를 드려야 할 것과, 화체설에 대한 반대, 회생제사로서의 미사 반대, 그리고 모든 미사에 성만찬이 있어야 할 것을 선언하였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리스도와 함께(with)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의 친교(fellowship)로 이해했으며, 그는 성찬 성례전을 설교와 함께 예배의 중심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1520년 설교를 통하여 주님의 만찬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매일 집례 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는 이런 입장을 수정하여, 성만찬을 보다 자주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 제외하고는 주일에 한번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루터교에서는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한번 갖는 것이 전통으로 되었다.
그는 성찬 성례전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예전으로서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질적으로 임재함'(the Real Presence)을 주장하는 공존설(consubstan- tiation)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재설은 중세의 화체설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으며, 그는 주님의 실재적 임재(the real presence)가 예배자들이 성만찬을 받을 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성례전은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선물(the Mass as a sacrificium)로서가 아니라, 인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미사(the Mass as a testament)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1523년과 1526년에는 두 예식서를 발간하는데, 특별히 [독일 미사]는 전적으로 독일어만을 사용하는 예배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서 모국어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예전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그 내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사의 대부분을 그대로 보존하려고 하였고, 다만 모국어로 진행하는 예배에 모든 사람들의 참여를 적극 고려한 흔적을 보게된다.
2) 루터의 예배 개혁
위에서 우리는 루터의 개혁의 성격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알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루터의 예배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정리해보자. 제일 먼저 루터의 예배 개혁에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루터의 예배개혁들은 학문적인 계획들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교구 생활의 현실들에게 나온 것이라는 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다.즉 한 마디로 루터의 예배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목회적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루터는 새로운 평신도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신학은 단순히 예배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교회와 목회와 세상에서의 생활과 경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중세기는 엄격하게 거룩함을 추구하는 계급 조직 시대로서 성직자를 최정상에 두고, 평신도들은 최하위에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위치한 곳이 어디든지 간에 서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 신학은 성직자의 위엄을 낮추지 않으면서 평신도를 성직과 종교직에 있는 사람들과 동일한 위치로 상승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인하여 세례가 새로운 존엄성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직분으로 옷 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세례의 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미 성별된 사제와 주교와 교황이라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에 의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 되고, 교회와 사회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루터는 신학적으로 만인 제사장설을 중심하면서 신부를 중재자로 한 예배의 구조에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예배의 결과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참여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교회관과 예배에 대한 견해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자연스럽게 루터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예배의 방법들에 대한 개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제사장직을 완수하려면 평신도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다음과 같은 분야의 개혁이 있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 교회 음악과 찬송가에 대한 루터의 개혁
첫째로, 음악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의 사역을 행하도록 할 수 있는 방법들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루터교의 예배는 본질적으로 음악예배가 되었다. 루터는 예배를 위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들 중에 하나"로 음악을 간주하였기에 그는 보편화된 회중 찬송의 작곡, 작사에 대단한 열의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능한 한 예배에서 음악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특별히 예배의 구성 부분으로 대중적인 찬송의 개발은 루터에게 있어 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1523년에 벌써 그는 독일어 찬송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240여편의 독일어 찬송을 만들었다. 그는 모두 약 37편의 찬송들을 작사했고, 또한 대게 작곡까지 직접했다. 많은 찬송들은 주로 시편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 찬송들은 힘차고 박력있는 운문들로 제작되었다.
(2) 설교와 예배개혁
그 다음에 루터가 그의 예배 개혁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였던 것은 예배에 있어서의 설교였다. 루터는 말씀의 예전을 회복하여 설교사역을 부활시키는데 크게 공헌을 하였다. 그의 설교들은 직접적으로 성서의 본문들을 다루었던 본문 설교의 형태를 가졌고, 그러면서도 회중들의 상황에 그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잉그베 브릴리오트(Yngve Brilioth)는 [설교의 역사]라는 책에서 "설교의 역사에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루터의 연구는 중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루터는 설교를 개신교 예배의 필수 부분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은 신령한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해석된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모든 예배는 설교를 포함해야 하고, 심지어 결혼식과 같은 공적 행사들에도 설교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렇게 이론적으로만 설교의 중요성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었다. 예배에서 설교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 루터의 중요한 공헌은 그 자신의 모범이었다. 그의 설교는 솔직하고 현실적인 양식으로 성경 본문들을 다루었다. 그의 설교는 부자연스럽게 꾸민 수사학이나 웅변술이 아니라, 평민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였으며,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이끌어 낸 생생한 실례들로 성경의 내용을 생생하게 마음에 그리도록 도와주는데 목표를 삼았다. 그의 설교는 교훈적이라기 보다는 주석적이었다. 그의 설교에 대한 견해가 담겨있는 [탁상담화]에 보면 그는 말하기를 "젊은 신학생들은 히브리어를 공부하여 나중에는 희랍어와 히브리어 단어들을 서로 비교하여 그것들의 특성과 본질과 강조점 등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설교의 목적은 항상 설교를 통해 회중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회중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회중에게 알게 하는가의 문제였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본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여 본문에 입각해서 설교하려고 노력하였다.
"설교자는 본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자기 앞에 있는 본문에 주의하여 그것을 회중에게 이해시키도록 해야 한다. 입에는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설교자는 마치 시장에 간 어떤 여인을 생각게 해준다. 그녀는 다른 여인을 만나서 멈취서서 잠시 수다를 떨고 또 다른 여인을 만나서 말하고 계속해서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시장에 늦게 도착할 수 밖에 없다. 본문을 떠나서 헤매고 있는 설교자는 꼭 이와 같다.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말해 버리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루터와의 대담)
(3) 성만찬의 횟수에 대한 그의 개혁
루터는 성찬 성례전을 기독교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성만찬을 매주일 시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개혁이 바로 성만찬의 빈번한 집례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 변화로 인해 평신도들이 제사장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매주 또는 매일 성찬식을 행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전문적인 성직자들에게만 기대되었던 이 성찬을 모든 평신도들에게 돌려준 것은 진실로 대과업이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모든 성찬식 때마다 성찬을 받으라는 권면을 하였고,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일년에 한번, 대게 부활절에 성찬식을 받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히 놀랄 만한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4) 모국어의 사용
루터는 처음에는 비록 신중하였으나, 나중에는 말씀을 평신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지 않고는 평신도의 역할을 거의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독일 미사](Deutche Messe, 1526)에서 예배에서 완전한 자국어 사용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제 예배 전체가 회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참여할 수 있는 언어로 드려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적 기도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526년부터 대부분의 기도는 교구 교회들의 자국어로 드려짐으로 회중들은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교회들에서는 기도를 드릴 때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거나 혼자 또는 찬송을 부름으로 참여할 수도 있었다.
(5) 세례 신앙
루터의 공헌들 중의 또 한 가지는 "세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세상에 세례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고 믿었으며, "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아는 지식 가운데 큰 위로를 얻었다. 하나님께서 세례가운데 하신 약속은 확신의 분명한 구원으로, 평생동안 매일 일어날 때마다 촉촉히 내려 주심으로 새로워지는 것이었다. 이런 신앙으로 인해 루터는 "죄를 극복해 주고 제거해 주며, 매일 새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우리가 이 현대의 비참한 상태를 떠나 영원한 영광으로 옮겨갈 때까지 항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세례이다"라고 단언하였다. 루터 교인들은 지금도 생활 방식으로 루터의 깊은 세례신앙을 채택하고 있다.
세례 의식에 있어서 그는 어린이에게 입김을 부는 것, 에바다(막 7:34), 두 번 기름을 붓는 것, 촛불을 주는 것과 같은 많은 의식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십자가 기호를 그리는 것, 루터의 홍수기도(Flood Prayer: 이 기도는 세례라는 사건을 노아의 홍수와 홍해 통과라는 구약성경의 사건들과 연관시킨 것임), 마가복음 10:13-16의 사용("어린이를 용납하라"), 마귀에 대한 부인, 신조에 대한 질문, 물에 잠그는 것(루터가 선호한 방법), 그리고 흰옷을 주는 것과 같은 많은 과거의 의식들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6) 주일과 교회력
루터의 주일에 대한 매주 주기의 강조는 기독론적 사건으로서의 매 주님의 날에 초점을 맞춤으로 강화되었다. 그는 주현일(Epiphany, 1월 6일), 마리아의 수태고지(Annunciation, 3월 25일)과 같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축일들은 기독론적인 차원에 더 큰 강조를 두면서 지속하였다. 성경의 구원 사건들을 강조함으로 성인들의 축일들은 사실상 감소하였고, 따라서 상당히 적은 축일들이 지켜졌다.
(7) 기타 성례들에 관한 그의 견해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7성례 중에서 세례와 성만찬 만을 성례로 인정하였다. 그는 먼저 견진(Confirmation)은 성례가 아니라고 하였고, 결혼식도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결혼이 "수도원의 생활보다 백 배나 더 신령하지만" 성례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는 "일반 목회자들을 위한 결혼식순"이라는 그의 의식에 따라 교회 문 앞에서 서로 서약을 했다. 그는 마태 19:6을 덧붙이기도 하였고, 결혼식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를 하고, 축도를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교회 안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또한 성직수임식 역시 자유롭게 여러 가지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종부성사(Extreme unction) 역시 성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장례 의식도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을 위한 미사(requiem masses), 철야기도(vigils) 등 인간 대행자에 의해 죽은 사람을 위해 행해지는 일에 초점을 맞춘 행위들을 배제하였다.
(8) 기타 내용들
루터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예배를 위한 복장과 이미지, 그리고 중세 교회 미사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것들, 즉 촛불 사용, 제단, 성상들, 십자가, 종 등을 루터는 깊은 의미를 주는 상징물로서 계속해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루터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이상과 같은 예배의 개혁은 사실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특별히 루터교의 예배는 종교개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18세기와 19세기를 지나면서, 특별히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를 경험하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와 오늘에 이른다.
3) 루터의 독일 미사(Deuche Messe, 1526)
특별히 루터의 두 번째 예전인, '독일 미사'를 통해서 루터의 예배 예전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입당송과 함께 시작된 예배는 '자비의 연도' (Kyrie eleison), 인사 교환(Salutation)과 짧은 기도(collect), 그리고 서신서 봉독, 찬송(독일 찬송), 복음서 봉독, 사도 신경을 통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동안 성만찬이 준비되어지며, 그 후에는 설교가 따라온다.
이상이 말씀의 예전이었으며, 다락방 예전으로는 주기도문, 권고의 말씀, 성만찬 제정의 말씀과 분병, 분잔, 그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성만찬을 받으며, 성만찬 후 기도와 아론의 축복으로 이어진다. 루터는 성만찬 예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성만찬 제정사에 포함시킴으로서 단순화 시켰고, 성만찬 기도와 그와 관련된 전통적인 요소들을 대폭 감소시켰다. 이러한 기본적인 예배의 틀은 오늘의 루터교 예전으로 발전하였다. 다음은 루터가 과감하게 수정하여 만든 [독일 미사](1526)의 내용이다.
말씀의 예전
입당송 혹은 독일어 찬송
자비의 연도(Kyrie eleison)
인사와 짧은 기도(collect)
서신서 봉독
독일어 찬송
복음서 봉독
신앙고백/ 사도신경 (이때 성만찬이 준비됨)
설교
성찬 성례전
주기도 해설
권면
성만찬 재정에 대한 말씀 봉독과 분병과 분잔
성만찬 참여 (찬송하면서)
성만찬 후의 기도
아론의 강복 선언(축도)(민 6:24-26)
(아론의 축복기도를 루터가 선호한 것은 이것이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축복하시면서 사용된 것이라는 약간 무모한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루터가 이것을 소개한 후 이 축복기도는 종교개혁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4) 루터파 예배의 발전
1546년 루터의 사망 후, 루터교의 예배 전통은 여러 국가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속 발전하였다. 비록 대부분의 지역 교회들이 문화적 차이와 사회적 차이는 가지고 있지만, 유사한 경험들을 거쳤다. 대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루터파 예배의 발전은 네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곧 정통 루터교 시대인 1550-1700년, 경건주의가 지배한 1650-1800년, 계몽주의 시대인 1700-1800, 그리고 복고주의 시대인 1800-1950년이다.
(1) 정통 루터교
정통 루터교 시기인 1550-1700년은 루터의 사망에 이어 계속적인 신학적인 쟁투와 군사적인 전쟁들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유익들이 공고해지고 생활 방식이 된 시기를 나타낸다. 이 시기에 루터교의 규범적인 경건의 발전,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독특한 방법이 나타났다. 특별히 루터의 요리문답들이 널리 사용된 것이 특징이며, 이 루터교의 규범적 경건은 믿음과 실천을 반복하여 그리치는 설교와 찬송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예배 음악과 찬송가에 공헌한 수많은 뛰어난 작곡자들이 회중이 사용할 수 있는 교회 음악을 계속하여 작곡한 것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2) 경건주의
경건주의 시기(1650-1800년)는 형식적인 교회생활로부터의 각성시기와 열정적인 개인 신앙에서 보다 깊은 근본을 발견하려는 시기이다. 보다 친밀한 공동체 의식을 찾으려는 열망이 있는 시기였고, 그래서 작은 모임들, 기도와 훈련을 위해 모인 교회 내의 교회에 강조가 주어졌다. 루터교의 정신적 기풍 내에서 독측한 경건이 발전하여 모라비아 교도와 같은 단체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감리교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파 경건주의의 큰 가지는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으로 알려진 집단의 부흥이었다. 이 집단의 부흥은 18세기에 니콜라우스 본 진젠도르프 백작(1700-1760)의 지도하에 일어났다. 이들은 루터교 정통 교리의 규범들을 보존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찬송가와 시각적 예술들에서 반영되는 독특한 경건을 개발했다. 이 경건주의의 가장 영속적인 유산들은 찬송가와 교회 음악이었다. 루터파의 음악가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은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1750)였다. 그는 교회력과 교회의 성구집을 연구하여 매 주일과 축제들을 위한 복음 교훈에 기초한 여러편의 칸타타를 작곡했다.
(3) 계몽운동
계몽운동(the Enlightenment. 1700-1800)의 시대는 오늘날의 예배학자들에 의햐 상당히 무시되는 루터교 예배의 큰 변화들을 일으켰다. 계몽운동은 오직 합리적인 수준으로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성례를 인간의 생활에 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침입으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비록 계몽운동은 성례의 실행을 배제하지는 않아虡으나, 잔존하는 성례의 신앙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계몽운동은 성례를 성경의 명령으로, 따라서 의무로 지켰다. 그래서 성례를 열심히 없이 거행하였다. 결국 성례생활의 쇠퇴와 함께 잔존하는 많은 의식들이 폐기 되었다.
경건주의의 특징인 개인주의는 계몽운동에 의해 강화되었다. 도덕에 대한 설교는 계몽운동의 특징적인 설교주제가 되었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 사회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 간주 되었다. 초자연적 활동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고, 모든 예배는 주로 도덕을 가르치는 수단이 되었다. 성찬식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기 보다는 "선하라"는 것이 되었다. 결국 계몽주의 운동은 예배에 있어서 두 번째 혁명이었다. 루터가 다른 형태로 중세기의 예배를 다시 성례화 하려고 활동했던 것에 못지 않게, 이 두 번째의 예배 혁명은 예배의 비성례화 활동에 있어서 큰 사건이었다.
(4) 복고주의
계몽주의 운동이 과거의 루터주의와의 철저한 단절을 야기했다면, 1800년 이후의 시기는 복고주의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많은 루터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개혁의 유산을 보다 더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루터교 형태의 예배의 부활과 성례생활의 부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특별히 이 시기에는 루터교가 미국으로 건너가 이민 집단을 위한 여러 종류의 예식서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는 루터주의가 미국의 문화에 순응하야 하는가 아니면 구별되어여 하는가 하는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어의 예배에서 영어 예배로의 점차적인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동시에 영어 찬송가도 차츰 더 많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교의 강력한 교회음악 전통은 지속되어 일련의 찬송서들에서 더욱 향상되었다.
결국 이 시기는 16세기 루터교 의식이 회복이 이루어진 시기이면서, 동시에 유력한 개척자 잔통을 갖고 있는 미국 개신교주의와의 동화과정이 지속되었다.
5) 오늘날 루터교 예배의 특징들
20세기 중엽부터 세계 곳곳의 루터교 예배에 대변화들이 일어났다. 본질에 있어 이 변화들은 루터주의를 넘어 새로운 교회 일치 시대로의 이동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로마 천주교회에도 미치게 되었는데, 루터교인들도 로마 천주교회의 새로운 개혁들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별히 주일의 성경 교독, 다양한 성찬식 기도의 사용, 그리고 개정된 목회자의 의식들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루터교 예술이 융성했던 때였으며, 설교에 있어서도 훨씬 더 주석적인 형식으로 이동되어 가고 있었다. 1978년의 [루터교의 예배서](Lutheran Book of Worship)는 16세기의 의식에 대한 충실성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예배마다 나타나는 세례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루처가 매우 자주 나타냈던 세례의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 예배서는 루터주의의 범위를 넘어서기도 하는데, 그 중요한 것은 로마 천주교회의 [에큐메니칼 성구집]의 채용이다. 이 성구집은 구약성경의 성구 낭독을 회복시켜 주일 예배에 읽을 세 가지 성구를 제시했다. 공동성구집과 더 빈번한 성찬식 거행과 같은 같은 모습은 다른 개신교들에서도 점점 더 일반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배의 변화는 예배를 위한 공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성찬대는 벽에서 멀리 옮겨졌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세례반이 보다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찬송 곡목들은 상당히 확장되었다. 주님의 수세주일 또는 왕이신 그리스도의 주일(Christ the King Day)과 같은 교회력의 새로운 절기들이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구집에 따른 설교를 위한 자료들도 제작되었다. 이렇게 루터교의 예배는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최근 몇 년간 크게 변화를 겪어왔다.
3. 나가는 말
루터의 예배개혁은 비록 모순점이 있기는 하나, 그는 예배의 정신을 보다 깊고 넒게 하였으며, 회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순서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중들은 적어도 그들이 예배 가운데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되었고, 공동의식으로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만찬도 바른 위치를 회복하게 되었다. 특별히 루터가 교회의 찬송가(hymnody)에 미친 영향력은 영원히 빛나는 것이라 하겠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그 이후의 예전에 있어서 루터가 만든 것들보다 훨씬 풍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따라서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교 안에 있으면서도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예배의식들을 갖게 되었다. 독일 지역 이외의 루터교회는 예전적으로 볼 때 보다 창조적인 면을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고 미국의 루터교회 등 세계의 각 지역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