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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신학/예배학

이치에 합당한 예배

이치에 합당한 (영적) 예배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회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로이드 존스 목사
교회의 역사에서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존재하였던 가장 큰 비극들 중 몇 가지는 사람들이 바로 이 두 구절의 가르침을 전혀 포착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그러므로'라고 말한 것과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고 말한 것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낱말들은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교리들과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연결시켜 주는 접속점, 또는 고리와 같은 것입니다. 철로(鐵路)에 있어서 노선(路線)들이 만나는 교차점은 항상 중요하면서도 항상 위험한 곳입니다. 철로의 노선들을 혼돈할 수 있어서 잘못 갈아타면 끝없고 심각한 문제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어서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연계(連繫) 조사(助詞)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본문에서처럼 더 중요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주제에 대해서도 유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위대한 이 로마서 남은 부분에 대한 서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말을 숙고해 왔으며.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동기가 로마서 처음 11장의 위대한 교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라는 말들은 은혜에 감사하는 보은의 요소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드리다'는 말의 중요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문자 그대로 여러분의 육신적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것도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살아 있고 계속적인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 제사는 또한 '거룩한' 제사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며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유(類)의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올려져서 하나님께 기쁨과 만족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더 나아가 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which is your reasonable service). 여기서 다시 우리는 참으로 흥미 있는 진술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진술에 대해서 분명해야 합니다. 여기서 '섬김'(service, 흠정역 성경에서는 그렇게 번역하고 있음-역자주)은 성경에서 사용되는 여러 전문적 용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말은 ·예배(worship)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시사한 바와 같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살전1:9). 여러분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공적인 예배 속에서만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 물론 그것도 한 일부입니다만, 오히려 여러분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만일 너희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여기서 '봉사' 라는 말은 역시 똑같은 개념을 전달하고있습니다 - '네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 바울은 하나의 그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다 너희는 하나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제물을 가지고 있다. 자, 구약시대에는 여러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것이 관례였다. 만일 필요하다면 너희의 제물과 봉사(섬김) 위에 내 피를 붓고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자기 자신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되, 경배와 찬양의 행동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을 써도 좋다면, 바울은 드리는 제물과 제사 위에 부어지는 제주(祭酒, 제사 드릴 때 부어 따르는 술-역자주)가 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또 다른 흥미 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3:3, 여기서 '봉사하며'라는 말을 흠정역에서는 worship으로 번역하고 있음-역자주). 여기에서 '봉사하다'로 번역된 말은 로마서 12:1에서 '예배'로 번역된 말과 동일한 헬라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는 말을 '하나님을 예배하며'라는 말로 매우 잘 고쳐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예배와 봉사는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to worship God) 하나님의 집으로 간다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안에 있는 예배(service)를 위해 간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 바울이 이 본문에서 바로 그 사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의 예배의 행위입니다.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이 제사를 '이치에 합당한' (reasonable, 흠정역에서는 우리말 개역성경에 '영적인'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역자주) 예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어구를 흠정역에 번역된 대로 취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네가 지금 너희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바는 이치에 합당치 못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그것은 매우 이치에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제사로 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고 찬미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탁월하게 이치에 합당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여러분이 좋아하는 대로 한다면, 이 '이치에 합당한'이라는 말의 의미 속에 그런 결론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사도는 여기서 그것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우리 몸을 드리는 이 제사의 성격을 더욱 더 상세하게 묘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그 제사는 '살아 있는 제사'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거룩한'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덧붙여서 그는 또한 그 제사는 '이치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말입니다. 이 말은 마음으로 이해되는 어떤 것. 또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예증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주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해 나감에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성경 안에서 한 유추적인 표현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면 항상 안전합니다. 항상 성경으로 성경을 비교하십시오. 제가 볼 때 성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방식 이 그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베드로전서 2:2말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베드로전서 2장을 생각해 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 저는 여기서 흠정역 본문을 읽고 있습니다. - "순전한 말씀의 젓을 사모하라(desire the sincere milk of the word:우리말 개역성경에서는 ·신령한' 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음- 역자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이 흠정역의 번역은 매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합니다. 물론 그 번역이 옳기는 합니다. 그 번역이 말하는 바는 온전한 진리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의 순전한 젖"에 관해서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정확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신령한, 순전한(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젖'입니다. '말씀의 젖'이 아니라 '신령한 젖'입니다. 베드로전서 2:2에서 'spiritual milk'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마서 12:1에서 '이치에 합당한' (reasonable)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와 정확히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그 요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생각을 자라게 하는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해서 말씀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몸을 자라나게 하는 보통의 젖과 그것을 대조시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상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질적인 젖(우유)만 취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자라게 하는 신령한 젖도 취하라고 말하고 있다." 자, 베드로가 그러한 대조를 그 대목에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 로마서 12:1에서 그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제사가 하나님을 영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 여러분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셨습니까? 다시 사도는 우리에게 한 대조를 보여 주기 위해서 이 말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사도는 '산'(살아 있는)이라는 말과 연관지어 이 말을 사용하고 잇는 것입니다. 죽은 동물이나, 죽은 몸을 드리지 말고 살아 있는 계속적인 제사를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외향적인 것만 드리는 어떤 것과를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사는 외향적이지 말고 내면적이어야 합니다. 그 제사는 한 의식의 부분을 통과하는 정도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제사의 전체적인 것은 내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그 점이야말로 오늘날 매우 강하게 강조될 필요가 잇는 요점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들이 종교와 관련하여 외향적인 여러 형식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눈에 보이고 눈부신 어떤 것을 좋아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맨 처음부터 맞서 싸워야 했던 큰 문제는 예배를 외향적으로 만드려고 하는 지속적인 경향성이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여러 세기에 걸친 그 싸움의 내력을 읽어 보면 흥미롭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서 소위 유대주의자들과 함께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 길리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 외적인 의식들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관례를 깨고 보다 영적인 예배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자체가 그 문제를 놓고 격돌을 보였던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그 이후의 교회사 속에서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현 시점에서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 카틀릭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 지금 저는 로마 교회가 해 온 일을 비평하려는 의도로 이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역사적인 정보를 여러분에게 제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타나기 전에도 교회는 이 문제와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물론 로마교회가 나타난 이후에는 훨씬 더 심각하게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기독교가 확산됨에 따라서 이교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던 사람들 속에까지 기독교가 파급되어 들어갔습니다. 그들 모두 이전에 자기들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누구나 한 종교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신비로운 종교들과 함께 많은 이방의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이방 종교들이 눈에 보이는 광경, 외향적인 눈부신 양식에 크게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이교도에 속해 있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일종의 집단 운동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제국을 기독교국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하였을 때, 이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그 모든 사람 각자가 다 개인적으로 회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아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꾸미지 않은 단순하고 영적인 내면적 애배를 보게 되었을 때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의 타협책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게 바라볼 어떤 것을 주어야 한다. 그들은 그런 일에 익숙하게 지내 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갈수록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단순한 예배, 즉흥적이고 단순한 예배에서 분리되어 나갔고, 갈수록 제사장들은 정교한 의식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경위에 대해서 여러분은 그런 식으로 추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있었던 제단이 멀리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앉아서 그 예배 드리는 광경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 많은 이교적 의식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기독교 형식으로 옷 입혔습니다. 그들은 이교도들이 지키는 많은 날들을 가지고 '거룩한 날들'이라고 정하였습니다. 골로새서나 다른 서신들에서 바로 그 일에 대해서 사도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기독교도가 되게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자, 그들이 그런 식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 식의 논리를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이 이교적인 실천 교리들에 세례를 주어 기독교로 둔갑시켰습니까? 아니면 기독교를 낮추어 일종의 절반의 이교주의로 변환시켰습니까?
자, 우리 모두는 이 주제들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여드리는 바는, 다만 이 위험들이 '이치에 합당한'이라고 번역된 말을 사용하는 사도의 용법 속에 내재적으로 지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신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외향적 의식(儀式)의 반명제(antithesis)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되, 이치에 알맞은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신령한 예배요, 비이성적 동물을 제사 드리는 것과 구별되는 이른바 이성적 인간 존재의 예배입니다. 
여기에 또한 다른 많은 대조들이 있습니다. 사도는 율법주의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과 대적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요한 영적 전투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앞으로 여러 해 동안 그 문제는 계속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모든 추세들을 눈치채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바로 그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로마교회가 변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물론 변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의식(儀式)들을 우리에게 보다 더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고 있죠. 그 교회 지도자들은 더 이상 라틴어로 예배를 집행하지 않고 국어를 사용하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미끼에 불과합니다. 그 미끼 안에는 올가미가 있습니다. 이 올가미는 의식적인, 이 외향적인 예배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적인 것이죠.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형식으로 율법주의의 위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구원의 위대한 교리.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것을 제시한 다음에 골로새서2:16-23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자, 바울은 여기서 모든 것에 속한 초보적인 원리들, 일종의 추잡한 것을 의미함-"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 -여기를 주목하십시오-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자 이 골로새서의 대목은 우리가 여기 로마서에서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주제를 상세하고 논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교회나 그 이웃한 여러 교회들 속에 한 싸움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와 철학을, 그리고 거기에다가 예전의 신비로운 종교들을 가미시키고 아울러 유대교를 조금 혼합시킨 이상한 형태의 교훈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다른 교훈들과 종교들을 매우 특이하게 조합시키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그 교훈은 매우 놀랍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을 취하면서 여기에 정말 특이한 무엇인가가 잇다고 느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자, 이것만 행하면 된다. 이 원칙들과 규례들을 이행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다."
언제나 그러한 유의 종교가 사람들을 그런식으로 매료시키죠.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때를 따라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 여러분은 자기들이 로마 카톨릭 교인이 되는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닌 그런 식의 매력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자백들을 이따금 책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네 프로테스탄트의 복음적인 신앙은 정말 나와는 전혀 상판없어 보인다. 내가 누구인가? 그 프로테스탄트적 복음적 신앙이 내게는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 교회인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내게 오라, 우리가 너를 위해서 예배를 드려 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뒤로 물러 앉아서 대단한 광경을 구경하고 있으면 그대들을 위해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도 되는 것이다. 사도가 바로 여기에서 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적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예배를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요점을 매우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또 다른 말씀을 인용하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초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4:1-6)
자. 이 시점에서 바로 이러한 것들에 여러분의 시선을 집중시켜 드림으로써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몸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으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 선생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고 당부한다는 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이치에 합당치 못하고 비논리적인 것들, 마음으로 받지 않아야 할 것들을 행하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너희가 논리를 가지고 드려지는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 "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합당한 제사입니다. 
바울은 이 그릇되고 거짓된 교훈과 '이치에 합당한 예배'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 몸을 괴롭게 하라고까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머리털로 짠 옷을 입으라고 가르치는 자들도 자주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교훈을 적용하여 문자 그대로 몸을 희생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전체 교훈을 오해하여 밥을 먹지 않고 거의 죽을 지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본능적 욕구를 다루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일찍이 생각한 바와 같이 그러한 방식으로 먹지 않고 몸을 괴롭게 하여 결국 어떤 이들은 심각하게 병에 걸리는 처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므로 아주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대가 남자든 여자든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어느 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 그들은 그렇게 주장합니까? 그들이 고기를 먹으면 세상이 하고있는 일을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식물이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고 어떤 소욕을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니 위험천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고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근채나 ·채소나 빵만 먹으라. 바울이 골로새서 2장과 디모데전서 4장에서 바로 그런 유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로마서 12장에서 '이치에 합당한'이라는 말을 통해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4장에서 그것을 더욱 더 상세하게 확장 설명합니다. 17절의 위대한 진술을 통해서 그 모든 요점을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리하여 바울은 여기서 여러분의 몸을 드리는 것이 항상 합리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서로 걸맞아야 합니다. 수세기에 걸쳐서 교회 안에 있던 어떤 사람들은 제사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툭하면 "내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련다"라고 하면서 덤비는 자들이 항상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 '자체' (per se)에 어떤 공력이 있다고 느낍니다. 최근에만 해도 신문에서 어떤 불쌍한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는 기사를 읽습니다. 아마 뉴욕의 미국 국방성 밖에서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휘발유 같은 어떤 액체를 자기 몸에 붓고 자기 동료를 위해서 분신 자살하였습니다. 아마 그가 생각하기로 자기의 원리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면서 그 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매우 극단적인 형식으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런 믿음을 보고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합당치 못하고, 논리적이지 못한 말입니다. 사도는 "참된 예배란 그 모든 모습과 완전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적극적이고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이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영광과 이름을 드러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4장에 있는 본문을 읽어 드림으로써 그.모든 것을 요약해 드리려 합니다. 요한복음 4장은 우리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요한복음 4장이 정확히 같은 요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19-23). 사도가 바로 여기 본문을 기록할 때 마음속에 그 대조를 품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구약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아니면 예루살렘 전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전체 문제거리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러한 흠을 잡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느끼기를,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만 신성 모독자요, 무흠한 자라고 느꼈습니다. 어째서요? 주님께서는 성전이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제사장들이나 대제사장들이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 그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나 모든 사도들 또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흠 잡힐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불경한 사랑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외향적이며 의식적이며 낡은 시각을 지닌 드러난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고, 예배란 전적으로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산, 성전, 예루살렘,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령과 진정' (spirit and truth)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 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퍼부어지던 가장 보편적인 비난이 무신론자들이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하였습니다. 이교도들은 여러 많은 신들을 예배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한 하나님만을 예배하였고, 성전도 없이 내면적인 방식으로 예배하였습니다. 번제도 없고 제사를 드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 속에 그들의 마음속에서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건물들이나 모든 의식절차들을 꾸밀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원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어떻게 이행해야 합니까? 저는 그것을 소극적인 국면과 적극적인 국면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을 사용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이행해 나가야 되겠습니까? 첫 번째 요점은 분명히 네가 지를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갖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그 문제를 상세하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점은 누구에게나 분명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소극적인 국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몸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 우리는 여기서 그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내 몸을 내 자신의 개인의 소유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6:19-20에서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은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19절). 그러기에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 아님을 배워야 합니다. 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 몸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상세한 국면에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이 문제를 정교화시켜야 합니다. 저는 다만 여기 원리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 점을 이렇게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몸의 소욕을 채우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고 있다면 몸에 대한 그룻된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몸은 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몸이 주어진 것은 우리 자신의 인격을 ㄴ타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격성과 능력을 표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몸의 몸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고 몸을 고앙시키고 있는 것이고 몸을 가장 앞자리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발견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고전3:3-4) 이 말씀은 혼인 예배에서 자주 읽혀집니다. 아주 잘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단장하는 바른 자세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설명하였듯이 이러한 문제들에는 하나의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영, 혼, 몸의 순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몸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특별한 유혹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에게 큰 사고와 단아한 몸이 주어져 있다면 그것을 우상으로 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을 섬긴다든지 그 몸의 욕망을 한껏 채우는 일을 조금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이 본문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몸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자신의 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대로 기울어지는 순간, 여러분은 바로 우리가 여기 함께 로마서 12장에서 숙고하고 있는 권면과 호소를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몸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몸을 남용하는 것은 심대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 몸을 하나님께 살아있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기뻐하실 만한 제사로 드리려 한다면, 하나님께 '향내 나는 향기로운 제물'로 바치려 한다면, 그리고 정말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하기를 원한다면(영적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방식으로든지 내 몸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몸을 잘못되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국면에서 우리의 몸을 남용할 수 있습니다. 몸을 무시함으로써 몸을 함부로 쓸 수도 있습니다. 몸을 무시하는 것은 영적이치 못한(unspiritual) 일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러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사역과 그들의 목회사역이 그러한 잘못의 결과로 고통을 받곤 하였습니다.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표현한 바와 같이, 몸을 '형제 나귀' 정도로 여기고 그렇게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관점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경멸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니 내 몸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만한 시간을 전혀 갖질 못한다"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영적이지 못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이 먹음으로써 몸을 함부로 쓸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음식을 먹어아 합니디. -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몸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먹으면 몸을 잘못 대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몸이 너무 중요한 것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몸에 매이고 마는 것입니다. 또 몸의 소욕이 여러분을 주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 속에서 그러한 몸의 소욕이 모든 걸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은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합리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다루어야 합니다.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여야 하되 너무 많이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문제를 다루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21:34). 그러기에 여러분은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합니다. 
물론 같은 원리가 마시는 데에도 해당이 됩니다 - 어떤 유의 것을 마시든지 말입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몸을 정말 무섭게 함부로 쓰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방탕함과 술 취함을 경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눅21:34). 만일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자신의 몸을 망가뜨립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몸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죄를 통제해야 하는 더 높은 중심적인 분분을 손상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위대한 사도가 여기서 묘사하는 유형의 몸으로 드리는 제사를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덧붙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 이와 같은 때에 그 점을 덧붙여 말해야 합니다 - 그것은 성(sex)에도 해당이 됩니다. 성 자체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과도함의 요소가 그 성에 들어오면 나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성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끔직한 무서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몸을 숭배하게 되어 더 나쁜 일입니다. 고대의 헬라인들은 육체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섬겼습니다. 그들의 경기는 인간의 몸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계획된 것들이었습니다. 영국 대영박물관이나 다른 곳에서 이 완전한 인간 몸의 형태에 대한 여러 조각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그릇된 것이었습니다. 몸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분명히 표현하자면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성적 욕망을 사용하되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성욕에 빠져들 정도로 사용한다면, 자신의 몸을 무너지게 하고 있는 것이며, 자신이 인생의 취지를 훼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몸 또는 몸의 어느 부분도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 같은 원리가 잠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잠자지 않고 계속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적당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모든 부분이 다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지장을 줄 것입니다. 그러니 잠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여기서도, 너무 많이 잠을 자면 몸을 위해서 해롭습니다. 그래서 너무 많이 잠을 자면 여러분의 몸을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살아 잇는 제사로 드리는 일을 훼손시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습니까? 몸도 지나치게 영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아무리 영적으로 된다 해도 지나칠 수는 없죠. 그러나 만일 영적인 것을 따로 떼어 내거나 그것을 육체적인 것과 분리시켜 버린다면 심각한 오류로 떨어진 셈입니다. 
그 다음 적극적으로 바울이 로마서12:1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우리 몸을 건강한 조건으로 유지해야 함을 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운동도 하지 않는다면 매우 영적인 사람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해야 합니다. 몸이 적당한 조건에 있을수록 여러분의 마음과 이해력도 그런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Mens sana in corpore sano - 그것이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 건강한 몸에 건전한 마음.' 이 두 요건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릴 때 엉금 엉금 기는 자세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또 자신의 몸의 작용이 50%만 되게 드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아주 미약하고 힘든 모습으로 드려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몸의 상태를 적당하게 유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육체의 적당한 조건만을 위해서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위해서 몸의 상태를 적당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시어 그 영광과 찬미를 드러내시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적당한 조건을 유지해야 합니다.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 이미 상세하게 그 문제를 말한 바 있습니다 - 일찍이 저는 그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 뒤에 가서 사도 바울은 그 점을 거듭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 같은 지체입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18-19절)
다른 말로 해서 원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되,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도록 마음대로 주장하시도록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든 부분, 심지어 성까지도 포함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먹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가르침의 전체를 오해한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 서 있지 않는 것입니다. 몸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7:31에서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그렇게 나타나 있지만. 흠정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use as not abusing으로 표현하여 쓰되 함부로 쓰지는 말라고 번역하고 있음-역자주)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그 요점이 신약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하나의 주제와 참된 동기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끝으로 저는 기독교 역사의 초기 몇 세기 동안에 위대한 설교자로 불려지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한 말을 인용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자주 '황금의 입을 가진 웅변가'라고 불려집니다. ·그는 그 요점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매우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어떻게 몸이 한 제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눈이 악한 것을 쳐다보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눈이 한 제사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길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과 가게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거나 신문을 집어들 때 악한 것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눈이 악을 쳐다보는 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본질상 우리는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눈이 악한 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의 제사가 됩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지혜로운 욥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 하하였습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욥31:1) 욥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앞을 곧바로 쳐다 보겠다고 내 눈과 언약을 맺었다. 내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사시(斜視)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악한 것을 쳐다보기 위해서 곁눈질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혀로 야비한 것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이 한 제물이다. " 혀는 야비한 것을 토해내고 싶어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엡5:4). 혀로 얼마나 악한 일을 많이 하는지요! 야고보는 말합니다.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3:5). 혀가 어떠한 고통을 불러을 수 있습니까? 악한 것을 말하므로 얼마나 많은 해를 받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악한 말을 할 뿐만 아니라 악하고 악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크리소스톰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혀가 야비한 것을 절대 토해내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혀가 한 제물이 되는 것이다. " 여러분은 하나님께 한 제물로 그 혀를 드리셔야 합니다. 
크리스소톰은 계속합니다. "손으로 죄를 행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면 그 손은 번제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죄를 짓지 않는 손은 참으로 엄청난 것으로, 마치 위대한 제물과 번제를 잡아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소톰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더하라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자, 그것만으로는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소극적인 국면에 불과합니다. 크리스소톰은 제가 여러분에게 구분지으려고 애썼던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하라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다. 그 외에도 선을 위해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몰입시켜야 한다. 손은 구제를 하는 데 쓰고.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는데 쓰고,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데 써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듣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귀를, 여러분의 청각 기관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할 '이치에 합당한 예배', '정신적 예배', '영적인 예배', 참으로 영적인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제 손을 붙드사
당신 사랑의 맥박에 따라
움직이게 하소서
제발을 붙드사
당신을 위하여 민첩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하소서
내 목소리를 붙드사
내 왕을 위해, 내 왕만을 위해
항상 노래하게 하소서
내 입술을 붙드사 
당신께로서 오는 메시지만을 
충만하게 바라게 하소서.
_프란시스 리드리 하버갈(Francis Ridley Havergal) -
그처럼 여러분의 몸의 모든 지체 전부를 그런 방식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여러분은 신령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고,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불안전한 어떤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신령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악한 것으로 여기거나 멸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결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한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 몸을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찬미를 위해서 쓰시도록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도는 그 모든 요점을 '이치에 합당한', '영적인'이라는 한 단어 속에 표현합니다. 정말 이치에 합당하도다! 하나님게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어 그 요점을 우리의 이해 속에 구체화시키고,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상세하게 실천하게 하도록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