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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신학/해석학자료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더욱 깊이 있는 삶으로 이끄는 새로운 성경 해석 전략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더욱 깊이 있는 삶으로 이끄는 새로운 성경 해석 전략
토드 빌링즈 J. Todd Billings 
2011.10.26 권영주 옮김
성경 해석이 위기에 처했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여러 전문가의 의견과는 달리, 내 생각에 위기는 성경의 권위가 실추된 데 있지 않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최근 기독교 관련 서적 중 가장 잘 팔린다는 「바이블 다이어트」(Bible Diet)만 봐도 그렇다. 이 책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식단을 짜면 집중력이 향상되고 외모가 근사해지며 삶에 활력이 생길 뿐 아니라 “노화까지 늦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준수한 외모와 활기찬 삶을 위해서일까? 물론 아니다. 이 주장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적이지 않다. 
수많은 기독교 서적에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책은 재정, 인간관계, 가정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약속한다. 물론 이 책들이 인생의 다방면에 관해 기독교 신앙이 지니는 함의를 알려주긴 한다. 하지만 책의 저자들은 성경이 당면한 필요와 문제에 답을 제시하는 권위 있는 책이라고 가르친다. 그러한 가르침은 개인과 각자의 기호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우리의 필요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너머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는다.
성경을 기독교 경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은 악의 없는 작가들뿐만이 아니다. 일부 성경학자 들은 성경을 고대 역사책 정도로 여긴다. 이들에게 성경은 고대 세계에 관한 고고학적 혹은 사회학적 질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자료일뿐이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이나 성경 기자의 사상을 재구성하려 한다. 또 어떤 학자는 하나님이 바울의 오래된 글을 통해 현대에 말씀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채 바울의 신학에 대해 심층적인 비평을 한다.
성경 본문을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해석해 현대에 접목하려 하는 사람들 역시 경솔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에티오피아 교회 지도자들을 한 학기 정도 가르치고 돌아온 후, 나는 어느 저명한 성경학자가 성경 본문의 ‘역사적 재구성’이야말로 맹목적이고 불성실한 성경 해석을 피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면 에티오피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티오피아에는 수백만의 그리스도인과 성장하는 교회가 있긴 하지만, 성경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 말이다. 
점점 많은 학자들이 ‘신학적 성경 해석’을 지지하고 있다. 대중적이면서도 학술적인 성경 읽기의 부재가 부분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구원을 동반하는 교제의 수단으로 읽기를 권한다. 이러한 해석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성경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가게 한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포괄적 신앙의 원칙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관찰하려면 성경 신학의 기능적인 면, 즉 성경에 관한 각자의 신념이 성경을 사용하는 방식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의 성경 사용 방식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접근법이 있다. 
어떤 독자들은 성경에 관한 상세한 청사진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각 성경 본문을 마치 청사진에 딱 들어맞는 콘크리트 벽돌인 것처럼 읽는다. 이 사람들은 각 본문을 청사진의 상세도에 부합하는 명제나 원칙으로 바꾼다. 이 접근법은 우리가 이미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의 신학체계가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은 각 성경 본문이 우리의 신학체계 안에서 어디에 상응하는지 발견해가는 작업이다. 
또 어떤 부류는 뷔페식 접근법을 선호한다. 다양한 입맛에 맞게 다양한 음식이 가득 차려진 큰 식당을 상상해보라. 당신은 소그룹 성경공부 멤버들과 함께 식당에 와있다. 소그룹의 다른 멤버들이 무엇을 먹을지 예상할 수 있는가? 나이, 성별, 민족, 사회 경제적 지위 등에 따른 유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은 각자 취향대로 어떤 음식을 먹을지 선택한다. 뷔페식 접근법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당면한 필요와 개인적 견해에 대한 해답이 된다. 
청사진 접근법이든 뷔페식 접근법이든, 우리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성경을 사용한다. 우리가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긴 하지만, 우리의 선입관을 뒷받침하거나 당면한 필요에 영적인 충고를 제시하는 책으로 받아들인다. 
청사진 접근법을 가진 독자들은 당연히 선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고는 누구도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모두 성경에 대한 어떤 신학적인 가정을 기반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다. 뷔페식 접근법을 가진 독자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신다고 믿는다. 성경이 단순히 고대의 역사, 교리, 세계관에 대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적 성경 읽기는 이러한 두 가지 가정을 좀 더 깊이 있고 온전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신학적 성경 읽기는 상세한 청사진 대신 여행 지도를 제공한다. 이 지도는 특정 본문에 대한 답을 모두 주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는 성경 속의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 여정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위로의 표지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기도 한다. 성경 읽기는 퍼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알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신비의 하나님을 만난다. 
초대 그리스도인 역시 기본적인 신학 지도를 손에 들고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2세기경, 이레니우스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신앙의 원칙’(rule of faith, rugular fidei)
을 이야기했다. 또한 (영지주의자와 달리)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러한 ‘신앙의 원칙’은 학자들의 객관적인 산물이 아니라 복음 및 세례에 근거한 기독교 정체성에 관한 설명이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예수의 제자로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의 세례신조, 즉 신앙고백서는 ‘신앙의 원칙’의 뼈대인 삼위일체론이라는 특색(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왜 이런 원칙이 필요할까? 성경은 방대한 책이다. 신중한 독자들도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방식이 기독교적인 성경 읽기는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면서 성경을 읽는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비추어 자비로우신(심판하시지 않는) 하나님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두 방식 모두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읽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원칙’을 통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었다.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신 바로 그 하나님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이 신앙의 원칙은 초대 교회 시대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를 거치면서 성경 읽기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전통이 아니라) 성경이 궁극적인 ‘신앙의 원칙’임을 강조했다. 이에 더하여,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적 신학으로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열렬히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구약성경은 물론 신약성경을 해석할 때도 종교개혁자들은 창조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 성경 읽기를 시도했고, 이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적용했다. 
많은 현대 학자들은 이 삼위일체론적 신앙의 원칙을 되살리려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R. R. 르노(Reno)는 「브라조스 신학적 성경 주석」(Brazo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Bible)의 서문에서, 이 시리즈는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여전히 기독교 경전인 성경의 해석에 타당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가정하에 쓰였다”고 밝혔다.
‘신앙의 원칙’이라는 문구에서 ‘원칙’(rule)이라는 단어의 가장 적합한 의미는 ‘척도’다. 이 척도는 성경을 해석할 때 핵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제공한다. 또한 척도는 특정 성경 본문의 의미를 미리 결정하지 않는다. 대신 성경 읽기의 여정에서 해석 범위에 대한 감각을 심어주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여정을 ‘드라마’라고 부른다. 휘튼칼리지대학원 교수인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는 이렇게 설명했다.
“성부 하나님은 이 여정의 각본가이자 연출가시다. 성자 하나님은 여정의 극적인 순간이며 요약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를 옷 입히는 의상 담당자이자 성경 대사들을 기억하게 해주는 프롬프터(배우에게 대사를 일러주는 사람/역주)이며, 각 교회 구성원이 자신의 배역을 연기하는 데 필요한 도구(은사)를 준비해주는 소품 담당자시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를 이끄시는 새로운 세계는 넓고 광활하지만, 분명한 특징이 있다. 이 여정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궁극적이고 완성된 교제를 기대하며 성령의 능력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여정이다.
성경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신학적 성경 해석은 전문적인 훈련을 요구하는가? 이 운동의 지지자들(밴후저, 조엘 그린, 스티븐 파울)은 우리에게 전근대의 주석뿐 아니라 현대의 성서비평을 사용할 것을 권면한다. 이들은 또한 평범한 회중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굳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현대적 성경 해석에는
, 특히 역사비평적 가정에 기초한 해석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간과되기 쉽다
.
첫 번째는 성경을 조명하는 성령의 사역이며,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
이다. 온 세상의 회중들은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한다. 더불어 제자와 증인의 공동체에 성경을 적용하며 위의 두 가지 실재를 더욱 깊이 인식한다. 물론 이러한 실천이 정확한 성경 해석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요소는 성경을 경전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이 내주하실 때 비로소 기독교 공동체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성경학자들은 그러한 신학적 가정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 학자들은 신학적 확신이 정확한 성경 해석의 잠재적인 동맹이라기보다는 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반대의 이면에는 다음 같은 진실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신학을 성경에 강요하기보다는 성경에서 우리의 신학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경 해석 작업에 선입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만 성경을 다룰 때는 자신의 신학적 전제를 ‘보류’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성경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신학을 찾는 것이 보다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학적 확신, 그리고 예배 같은 실천이 성경 읽기를 더욱 풍성하고 충실하게 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르노는 ‘브라조스 시리즈’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학적 교리는 영적 교육의 핵심적 측면이며, 자기기만으로 흐릿해진 마음을 정화한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회중이 모여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위엄에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원자로 경배하며, 성령 하나님의 공동 사역을 고백한다. 이러한 모습은 건강한 기독교 예배의 기본 특징이다. 예배는 예배자의 사랑과 신학적 확신을 표현하며 이를 구체화한다. 예배가 시작된 후, 우리는 누가복음의 한 본문을 듣게 된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정말 그 순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랑과 확신을 ‘보류’하라고 회중에게 요구하기 원하는가? 회중은 특정한 선입관이나 성향을 가지고 누가복음의 본문에 접근한다. 하지만 그러한 성향은 회중이 누가복음 본문을 들을 때 기독교의 제자도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회중의 성향이 본문을 통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데 열려 있다면 더욱 그렇다. 
주석이 차지할 자리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극단을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우리 시대의 어떤 이들은 개인이 성경 해석자로서 전권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주석가들도, 신앙 공동체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나와 성경과 성령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라는 구호를 그러한 접근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개신교의 원리를 심각하게 곡해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의 주요 해석학자들은 전 세대에 걸친 해석학자를 검토하고, 성경 언어에 대한 지식을 쌓았을 뿐 아니라 성경 해석의 비평적 기술들을 연마했다. 
신학적 성경 해석 운동은 근대가 분리해놓은 제자도와 성경의 비평적 연구를 재결합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교육」(On Christian Teaching)에서 어거스틴은 육신을 입은 신인(God-human)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하늘 본향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며, 모든 성경 해석은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길로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거스틴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아는 것이 성경 해석에 매우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 읽기에는 역사, 수사학, 논리학, 문화인류학의 학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해석 운동은 일반적으로 제자도와 성경의 학문적 연구를 병행하려 한다. 모든 독자들에게 학자와 같은 역량(히브리어 독해나 본문 비평 능력)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그러한 수준에서 성경을 연구할 경우 모든 독자들은 훨씬 더 풍부한 성경 읽기를 할 수 있다. 
바리새인을 언급한 복음서의 본문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스스로를 유대 율법주의자로 여기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율법적 바리새인들을 꾸짖는 장면을 보아도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연구하다 보면 바리새인이 틀에 박힌 율법주의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과 맺은 율법에 순종하고자 애썼다. 그들은 예수님이나 초대 그리스도인들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분명 공통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이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런 역사적 통찰은 우리가 겸손히 귀를 열어 날카로우면서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비평적 연구는 독자들이 성경을 효과적으로 읽는 데 방해되는 장애물, 즉 성경의 장르와 관련된 오해나 언어 및 문화적 문제의 곡해를 피하도록 도와준다.
성경 읽기 방법과 관련하여 풀러 신학교의 신약성경학 교수인 조엘 그린은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모든 방법은 성경의 신학적 목적이나, 성경을 경전으로 읽는 교회의 상황과 연결해 사용해야 한다.” 어거스틴이 제안했던 것처럼, 다양한 해석 방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모든 방법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장해가는 제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신학적 해석의 수많은 작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해석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역사적 의미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까지 이어지는 영적 의미를 비유 혹은 예표론의 형태로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읽기는 본문 자체의 역사적 읽기를 방해하지 않는가? 
이는 ‘역사적’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 대부분의 기독교 역사에서 구약성경의 역사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란 해석학자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구약성경을 내러티브에 따라 읽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내러티브에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영적’ 의미가 덧입혀졌다 할지라도 내러티브는 여전히 보존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적 의미를 상실한 잘못된 해석에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구약성경의 영적 읽기를 지속했다.
구약성경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신약성경에서 비롯된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시편이나 예언서만 이 방법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성경을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읽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는 다양한 맥락과 장르(시편, 신명기, 사무엘하)의 구약성경 본문 중 7가지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데, 그 모든 본문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는 기발한 해석학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섭리 가운데 있는 예수님의 정체성 때문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1-2). ‘아들’은 이처럼 다른 구약성경 본문들의 완성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그들의 시대에는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아들은 ‘만유의 상속자’이자 예수 그리스도로 역사에 알려지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영적 읽기가 구약성경의 내러티브를 무효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부활하신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했던 제자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셨을 때, 그분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대체된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눅 24:44-45). 휘튼 칼리지의 신학자 대니얼 트라이어(Daniel Treier)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말하는 현실에 영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확신과 겸손으로 읽기
애버딘 대학의 신학자이자 신학적 해석을 지지하는 주요 인물인 존 웹스터(John Webst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 읽기는 죄와 죄를 이기는 역사라는 흐름 안에 놓인 사건이다. 그리고 죄를 이기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독점적 사역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것은 필연적으로 회심과 결부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위로를 주기도 하고 직면하게도 하는 말씀)을 듣기를 기대하며 성경을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새롭게 한다. 문화적, 개인적 우상을 직면하게 하고, 우리 길에 빛을 비추며, 세상에서 섬기는 자로 설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경전으로 읽는다는 것은 말씀을 기뻐하고 암송하며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받으실 때 암송하고 있던 성경으로 응수하셨다(마 4:1-11). 골로새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고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의 삼위일체론적 요소를 보여준다. 신자들에게 보냄을 받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고”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6:14).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은 매우 실천적인 일이며, 이는 우리의 재정, 가정, 몸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속적인 ‘성공’ 때문이 아니라, 옛 사람을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새로운 피조물에 참여하는 것의 일환으로 이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기도와 암송, 가르침과 증거를 통한 공동의 예배 가운데서 말이다. 우리는 성경을 완전히 터득한 후에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새로운 장소를 열어주신다. 그 장소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여정 중에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나누는 곳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결코 성화의 여정을 끝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말씀과 성례 안에서 이를 새롭게 경험하는 여정을 끝낼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고 확인하며 말씀과 씨름하지만, 때로 성경이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할 때도 그것과 씨름한다. 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에게 성경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성령이 성부 하나님의 말씀 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경전으로 읽는 일에 완전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며 힘을 주신다.
토드 빌링즈(J. Todd Billings)는 미시건주 홀랜드에 위치한 웨스턴신학교의 개혁신학 부교수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for the People of God: An Entryway to the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