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경해석학의 기능, 한계, 그리고 설교
이한영 교수
들어가는 말
목회자의 최대 본분(main duty)을 설교라고 말함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설교의 매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복음사역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작 그 설교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해석학적 요소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에 있어, 또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근본자세에 있어,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무관심하며 그로 인해 때론 강단의 설교가 허공을 치는 꽹과리의 음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에 있어 최근 설교와 해석학의 관계를 연구하는 작업들이 활발해지고 있으나 과연 해석학이 설교에 미치는 영향, 또한 그 한계는 무엇인지에 대해 적잖은 혼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숙고하며 이를 간략히 정립해보고자 한다.
설교와 해석학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들 각개의 본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설교와 해석학은 분명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는 두 개의 독립적이고 고유적인 기능들이 상호보완적인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문은 먼저 (I) 해석학의 정의를 논한 후 (II) 해석학과 방법론, 그리고 (III) 해석학의 기능, 한계, 그리고 설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I - 해석학의 정의
과연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해석학 (hermeneutics)에 대한 정의에 있어 학계의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왕대일은 구약성서를 연구하는데 있어 크게 세 축이 있음을 말하며 그것은 본문의 증언을 설명(explanation)하는데 초점을 둔 주석(exegesis), 다음은 주석을 통한 본문의 메시지를 토론(discussion)하는 신학(theology), 그리고 본문에 대한 주석-신학적 판단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백하는(confession) 해석학(hermeneutics)이라고 요약한다. 이에, 해석학을 “고백”이라고 함은 본문의 의미가 독자와 본문의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엮어짐을 전제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해석학의 전체적인 본질을 말하기보다는 해석학을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단일적 부분을 부각시킨 것 같다.
위의 정의들을 좀더 근본적이고 통전적으로 정리하자면 주석은 궁극적으로 작은 단위의 본문의미를 목적하고 있고, 신학은 이러한 주석을 통하여 창출된 다양한 의미들을 총괄적으로 연관시키며 체계화하는 작업일 것이다. 즉, 주석과 신학은 둘 다 “의미” (meaning)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이제 문학과 철학에서 말하는 해석학(hermeneutics)이란 이러한 의미를 창출하는 도구들, 즉 해석방법론들(methodological tools)을 연구하는 학문(Wissenschaft)이다. 즉, 의미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방법론들과 도구들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기능과 한계는 무엇인지, 이에 관련된 전제적이며 상황적인 인식론적 요소들은 무엇인지, 또한 의미창출의 역동적인 과정들을 연구하여 해석자로 하여금 그가 이해하고 정립한 의미의 최종적 형태가 어떠한 전제와 도구적 매체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는지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헤르(Schleirmacher)는 해석학(hermeneutics)은 철학의 한 과목으로써 이는 본문의 의미를 가능케 하며 그 의미를 창출하는 방법론적 도구들이 어떻게 형성되는 가를 연구하는데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유사하게 안토니 시슬톤(A. Thiselton)도 해석학은 고대문서의 의미를 형성하는 규정들(formulation of rules)의 다양한 요소들을 이해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포이트레스(Poythress)는 해석학을 본문의 이해를 위한 역동적이며 혁명적인 전제들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함으로 해석학과 인식론의 상호관계성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설명들을 요약하자면 해석학이란 본문의 이해와 의미를 가능케 하는 다양한 방법론들의 기능과 한계, 그 도구들을 형성하는 종교학적-철학적-사회적-경제적 요소들, 또한 그 뒤에 작용하고 있는 인식론 혹은 패러다임들을 고찰하는 복합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해석학은 방법론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II- 해석학과 방법론
해석학은 본문의 의미를 창출하는데 적용되는 해석방법론들을 설명하는데 그 주요 목적을 두고 있음을 위에서 설명했다. 이를 연구함에 있어 그동안 성서본문의 해석방법론들을 크게 세 종류로 분리할 수 있다. 첫째는 본문을 형성한 역사적 배경에 초점을 둔 역사비평학이고, 둘째는 본문의 최종적 문학형태에 초점을 둔 문예적 접근이며, 셋째는 독자에 초점을 둔 실존주의론에 근거한 독자비평이다.
이는 의미의 지평이 역사적 상황, 본문의 문학, 그리고 독자의 혹은 관중(audience)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음을 말하며 설교는 이러한 의미를 작성(sermon)하며 전달하는(the act of preaching)과정에서 실제 이 세 가지의 방법론들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다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설교가 그 작성과 방송학적인 면에서 발송인-매체-수송인의 역동적인 본질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있어 이러한 해석방법론의 3부적구조의 적절한 이해는 설교 작성과 전달에 있어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3부적 방법론이 지난 2세기 동안 어떻게 실제 적용되어왔으며 또한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왔는지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 중반까지 성경해석학에 있어 압도적으로 전유되었던 방법론은 역사비평학이다. 17세기 르네상스와 함께 상승을 이어간 역사의식과 합리주의의 접목을 통하여 구약학에서는 벨호이젠(Wellhausen), 노트(Noth), 군켈(Gunkel)등, 주요학자들이 보편적인 신학(본문의 의미)을 추구하자는 의도아래 역사비평학의 도구들을 응용해 구약본문의 객관적인 역사적 배경(Sitz im Leben)을 재현하고자 했다(historical reconstruction). 그 결과 학자들은 문서비평을 통하여 오경은 신화적 사물로써 그 본문의 내용이 실제적인 것보다는 고대근동의 신앙-고백적인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유사한 상황에서 신약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초기 익명으로 시작된 스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의 연구를 중심으로 역사적 예수와 고백적 그리스도의 분리 논쟁은 19세기 신약학계의 핵심적 주제로 떠올랐다. 예를 들어 파울루스(Heinrich E. G. Paulus)는 그의 저서 Das Leben Jesu als Grundlage einer reinen Geschichte des Urchristentums에서 바르트(Karl F. Bahrdt), 벤뚜리니(K. Heinrich Venturini)와 함께 예수의 부활은 실제가 아니오 의식불명에서 깨어난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적 고백이었음을 주장하며 역사적 실제와 신앙적 고백을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이는 성경본문의 의미를 이원화시키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한 것이다. 평범했던 역사적 인간 예수(historical Jesus)가 유태인들의 종말론적 기대(eschatological expectation) 속에서 그리스도(Christ)로 고백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설교자는 성경 본문에서 부활하지 못한 예수를 전할지 아니면 부활 한 그리스도를 전할지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은 당연히 신학의 준거(reference point)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고대근동 신화에 불과한 구약과 인간 예수를 중심으로 객관적 신학을 구성하려했던 의도와는 달리 구약학에서는 의견불치로 논쟁을 더해 가는 이스라엘역사의 재생(historical reconstruction of Israel)과 신약학에서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다양한 재현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논란을 축적해나갔다. 과연 신학과 설교의 준거는 역사적인 예수에게 있는지, 아니면 고백적인 그리스도에게 있는지, 그 사이에 있는 또한 다양한 회색지역(gray area)에서 악순환의 갈등이 신학과 설교의 대 혼란을 범람케 한 것이다.
현대 신학은 그 준거를 역사적 배경에서 신앙적 고백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폰라드(G. von Rad)의 구약신학은 이러한 신앙적 고백을 준거로 한 대표적인 연구작품이다. 이는 이제 성경본문의 의미(구약-신약신학)를 본문 뒤의 역사적 배경에서 객관적으로 재생하려했던 시도들을 중단케 했고 대신 본문의 최종적 문학구조에서 찾으려는 전환을 가지고 왔다. 훠켈만(J. P. Fokkelman)은 이를 “본문 그 자체가 제공하는 그것”(That which the text itself provides)이라고 말한다. 구약본문은 그 최종형태에 있어 출애굽의 여호와를 실제와 신화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는다. 신약본문도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와 분리시키고 있지 않는다. 예수와 그리스도를 나눈 것은 본문이 아니오 이원론을 전제한 19세기 합리주의의 도구들을 단일적으로 적용한데서 비롯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그 준거가 역사배경에서 고백으로, 그리고 그 고백을 담고 있는 본문의 문학으로 옮겨가게 했으며 통시적 접근에서(diachronic) 공시적 접근으로(synchronic)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는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 역사비평학에서 문학비평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이제 역사와 본문을 넘어 신학의 준거를 실존주의적인 독자의 상황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서 싸르트르(Jean Paul Sartre)로 이어지는 실존주의인식론(existential epistemology)을 바탕으로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화 작업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의미의 준거를 독자의 상황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 토착화(contextualization)를 통한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신체신학, 등등, 실존-현상학적 상황을 준거로 한 신학과 설교의 도래로 이제 다원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더 이상 그 어느 해석과 설교도 지배적 권위와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데 이르렀으며 의미 그 자체의 해체(deconstructionism)로 이어져 가는 조짐들을 보이고있다.
원래 역사-문학-독자 비평으로 이어지는 성경해석방법론의 3부적 구조는 사회 모든 계층이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며 중립적인 성경본문의 의미를 창출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 반대로 의미의 해체에 이르게 되었다. 즉, 의도한 바의 적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또한 오늘날 예수를 실제 역사적인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있는 교회의 설교자들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 이에 대한 토론은 무한정 할 것이다. 그러나, 짧은 본 논문에서는 해석학의 기능과 한계를 논의하며 이에 대한 간략한 해답을 시도하려고 한다.
III- 해석학의 기능, 한계, 그리고 설교
과학은 진리가 아니고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적 도구이다. 즉, 과학이라는 매체로 설명될 수 있는 많은 현상들(개체)이 있지만 또한 관찰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더 많을 것이다.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미생물이 있지만 그 시각을 벗어나는 것들이 더 많은 것과도 같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개체를 인식하는 주체로써 어려서부터 과학은 진리의 한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아니고 진리 그 자체라고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즉, 과학적으로 이해되지 못하면 진리가 아니라는 단순한 환원주의(reductionism)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해석학의 지속된 연구를 통하여 과학은 개체가 아니고 개체를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매체라는 것을 논하게 되었다. 즉, 자연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학문에 속한 해석방법론이란 본문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써 본질적이며 고유적인 기능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도구의 기능과 한계는 이 도구를 사용하는 주체와 이 도구가 적용되는 대상, 즉 개체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더 복잡한 양상을 지니게된다.
예로 망치라는 도구와 돌과 석공의 관계를 들 수 있다. 망치 하나로 돌을 날카롭게 깎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망치로 다이아몬드를 깎는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즉, 돌의 자연적 본질 그 자체도 석공과 망치의 기능을 견제한다. 또한 이 망치의 사용이 석공에 따라 다양한 돌 모양을 만들어낼 것도 분명하다. 망치와 돌과 석공은 서로를 견제하며 삼위일체의 역동적인 보완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성경해석학에 있어 성경본문은 개체이며 방법론은 도구이며 독자(해석자, 설교자)는 주체라 할 수 있다. 본문의 의미는 독자의 전이해적인(Verständnis) 전제와 정황적인 지평이 성경본문의 고유적인 본질의 지평과 역동적으로 대립하고 대화함으로써 창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해석이란 단순한 객관적 “정보의 재생이나 지식이 아니고” 가다머(Gadamer)가 말하는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 혹은 폴리큐에르(Paul Ricoeur)가 말하는 역동적인 누적과정(sedimentation process), 즉 개체와 주체의 역동적인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석방법론은 이 개체와 주체를 이어주는 도구인 것이다.
먼저 개체가 되는 성경은 다차원적이며 복합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 성경본문엔 신학적, 역사적, 문학적, 더 나아가 본문 자체가 고유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초월성과 계시성, 또한 정경성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은 복합적인 해석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심장수술을 단 하나의 도구로 할 수 없듯이 성경해석은 다양한 해석학적 도구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사비평학이나 혹은 문학비평학이라는 단일적인 도구로 본문을 접근할 때 오히려 의미를 해체하는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이 본문을 인식하는 주체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식의 준거를 17세기 합리주의가 말하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이며 중립적인 이성에 국한시키는 것은 인지적이며 정의적이며 기능적인 인식의 복합성과 역동성을 고려하지 못한 논리이다. 이성은 단순히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이성은 전제, 경험, 인격, 신앙, 사회적 상황, 경제, 이론에 대한 주관적 선택, 등등, 복합적 요소들로 형성되어간다. 이를 메리 헷스(Mary Hesse)는 “사회적 동의”라고 말한다. 이성은 공동체의 공감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의 잣대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17세기의 사상에서 더욱더 발전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해석학은 이제 본문과 해석학방법론과 독자, 즉 개체와 도구와 주체라는 3대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될 것이다. 그리고 도구의 역할은 본문과 독자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기능과 한계를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과연 그럼 실제적으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먼저 본문의 의미를 공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본문의 의미가 본문의 최종적 문학형태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본문의 의미는 본문 뒤도 앞도 아닌 본문 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학적으로만 접근하자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역사의 지평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지평은 신앙의 공동체와 고대문학의 수사학적 매체를 통해 형성되었다. 역사를 사건 그 자체, 혹은 사건의 객관적인 재생으로 여기는 역사비평학의 도구로만은 성경본문의 의미를 적절하게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본문의 복합적인 본질을 간주하여 다양한 도구들로 접근하여 본문의 다양한 지평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으나 결정적으로는 본문의 최종문학형태가(신약-구약) 주장하는 수사학적의미의 견제를 심중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본문을 해석하는 공동체의 주체적 중요성이다. 예수가 실제 부활한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는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내적증거를 경험한 공동체를 떠나서는 그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핵심적 의미는 성령의 내적 증거를 경험한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형성되어 왔다. 즉, 성경해석학은 이 세상 모든 공동체가 제의 없이 동의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의미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성경의 첫 부분을 유대교에서는 타나카(ךנת)라고 한다. 역사비평학자들은 고고학적이며 종교학적인 면에서 히브리 성서(Hebrew Scripture)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교회는 구약(Old Testament)이라고 한다. 설교는 교회공동체가 경험하고 이해한 신약과 구약의 의미를 온 누리에 도전하는 해석학적 행위이다.
크라벤담(Hendrik Krabbendam)은 “해석학과 설교”라는 그의 논문에서 설교는 의미의 해설(exposition of meaning)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적용의 중요성(significance-application)이란 복합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의미를 목적한 설교작성(sermon)과 적용을 목적한 선포(act of preaching)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의 선포는 교신(communication)으로써 듣는 관중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통신학적 면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관중의 기존 인식을 도전하고 변화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설교는 이 시대가 결정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의미를 통해 모든 관중의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교회 공동체가 이해한 신구약의 구속적인 의미와 관중의 기존적 세계관이 서로 도전하며 대화하며 경쟁하는 것이다. 부르게만(Walter Brueggemann)이 “히브리성서”가 아닌 “구약”을 고집하는 것과 같이 설교의 의미는 현대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는 모든 지평과의 균형과 일관성(order and coherence)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체적 비전으로써(alternative act of vision) 오히려 비평과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도전적 항의(subversive protest)에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이상적인 설교와 해석의 만남은 적절한 이해(understanding)에서 출발한다고 말 할 수 있다. 본문과 관중의 신중한 고찰을 통하여 이해의 지평을 넓힐 때 신념을 가진 설득적인 설교를 집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석학에 있어 이해라는 것은 단순히 인지적(cognitive) 인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의 지평은 인지적이며, 정의적이며 기능적인 영역을 가로질러 영성을 포함한 삶 전체의 영역을 포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식의 최대 척도는 실천에서 완성된다. 즉, 해석의 도착지는 이해가 아니고 삶이라는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정전을 통해 이해한 메시지들을 삶 속에서 실천할 때 그 의미의 내면이 완성되며 이러한 실제 삶의 해석(life hermeneutics)만이 설교를 통하여 관중의 세계관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논리의 싸움이 아닌 실제의 증거를 요구하는 변증인 것이다. 설교자의 삶 속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치유와 희생과 사랑과 마가의 다락방의 역사가 일어난다면, 또 한 예수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산다면, 이로 인해 성경본문의 복음주의적 해석과 설교는 객관-주관의 이원론을 초월해 관중의 보편적이고 당연시되었던 세계관을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진정한 설득력을 같게 될 것이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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