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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종말 개념

성경적 종말 개념

노승수 목사

먼저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읽기에 약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는 제가 충분히 정리가 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고 주제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읽다가 어려움이 느껴지시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 다만 여기 여러 본문의 해석적 이슈들이 있어서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ἐπʼ ἐσχάτου τῶν χρόνων)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20)
베드로전서 1:20은 그리스도의 계시되심 곧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 바로 말세의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종전에 가진 그리고 이해하는 종말론과 사뭇 다르지요. 제가 일전에<종말이 구원에 앞선다>는 글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성경의 종말론은 이미 우리 삶 깊숙히 들어온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실제로 받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믿음의 안경이 있어서 그것을 실제 우리 삶의 일부로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과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사건을 해석하면서 요엘서를 인용하는데, 17절을 보면 한 단어를 요엘서와 바꾸어서 인용합니다. 말세(ἐν ταῖ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라고 바꾸어 인용합니다. 즉, 지금 이 오순절 사건이 바로 말세적 사건 곧 구약의 신학적 개념인 '여호와의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통상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닙니다. 신자에게는 이 날이 구원의 날이지만 불신자에게 이 날은 심판의 날로 묘사됩니다. 그 일의 성취를 오순절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리 사건을 흔희<성령의 역사적 오심>이라고 하며 성령이 오심으로 종말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R.C. 스프라울의 글을 읽다가 재미난 종말론의 관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언과 관련한 것인데요. 감람산 강화는 세 편의 공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데 모두가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든 돌을 "무너뜨리우리라"는 말씀으로 감람산 강화를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자세한 논의는 스킵을 하고 이 주장의 핵심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종말의 시작이라는 개념입니다. 리델보스가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을 말할 때, 여기서 이미는 이미 성취된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종말을 의미합니다. 세례요한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설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길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로서의 길이었습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리고 그의 선포는 매우 긴박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종말을 미래의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지만 이미 우리는 종말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미래적 구원보다 현재적 종말 가운데 우리는 있는 것입니다. 
근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가지는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 종말이 이미 우리 가운데 들어와 있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 왜 성전의 멸망이 종말의 이미라는 관점의 정점이 되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에 비유하셨습니다. 그가 사실 지상 성전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성령의 오심>과 지금 오순절에 너희가 눈으로 보는 이 이적 곧 하나님의 큰일은 성경의 미리 예언된 약속대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날' 곧 '종말의 날'이라는 설교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처럼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성질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우리의 온전한 구속은 십자가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대로(갈 3:14)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행 1:4)의 강림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반복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집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인류의 역사 속에 들어오시는 것처럼 성령께서 인류의 역사 속에 그의 택하신 자들과 함께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이는 이전에 없던 역사입니다. 물론 구약의 백성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받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신약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이제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내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성령의 인치심>이라고 신약의 다른 본문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 인치심은<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의 보증을 의미하는 것으로 참으로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모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회심의 맨 마지막 단계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의 논의의 초점은<구원 사역의 적용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구원 사역 그 자체>에 초점이 있습니다. 
논의가 약간 옆으로 번진 감이 없지 않지만 다시<감람산 강화>속에 등장하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의 기사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공관복음에 나타난 세 이야기의 공통점은 종말과 성전 파괴가 서로 오버랩이 되어 있어서 이 둘을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종전에 학자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이미>로서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로 보았다면 이 논의를<성전 파괴>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제가 신약이 가진<사도에 관한 이해>에서 밝혔듯이 이<사도>라는 표현은 누가와 바울에 의해서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됩니다. 특별히 누가는 이 사도의 개념을 거의 체계화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한 복음이 바로 이 사도에 의해서 확증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증언이 완성되는 시점인<성전 파괴>를<이미>로서 종말의 성취의 시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11장의 성전측량 기사는 성전 파괴 이전임을 시사합니다. 성전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메타포이며 11장의 두 증인은 구약과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 초림의 예비자들입니다. Muratorlan Fragment에 바울이 요한을 본받아 7교회에 서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계시록>의 기록 시점이 도미티안 시대가 아니라 네로 시대라는 점에 개인적으로 심증을 두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이 감람산 강화가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감람산 강화가 오히려 계시록을 통해 확대되어 설명되고 있다는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신의 파피루스>에 나오는 P64 곧<모들린 파피루스>는 신약성경 전체가<성전파괴>전에 완성되었음을 시사한다 할 것입니다. 
성경 자체와 그리스도께서 종말을 논증함에 있어서<성전 파괴>를 늘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다른 복음서와 다른 표현을 섰습니다. 막 1:10에서 '하늘이 갈라짐(σχιζομένους τοὺς οὐρανοὺς)'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막 15:38에서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τὸ καταπέτασμα τοῦ ναοῦ ἐσχίσθη)'라고 해서 1:10의 '갈라짐'과 동일한 단어로 '찢어짐'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9절에 로마의 백부장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언합니다. 이런 구조를 흔히 Inclusio라고 합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본문 배치입니다. 적어도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세례 및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전의 휘장의 찢어짐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이 성전 곧 그리스도의 몸을 헐면 그 성전을 다시 일으킬 것'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마음에 의중으로 두신 것은 성전으로서 자신의 몸을 고난 중에 내어 줄것이었지만 듣는 자들은 '물리적 성전'의 허물어짐으로 메시지를 받아 들였고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 바라고 보여집니다. 
이미 베드로전서에서 살폈듯이 성경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말세를 의미함을 논증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의 그리스도를 예비함 역시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인 긴박감이 넘치는 도래하는 종말의 성취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도 이 성전의 허물어 짐에 대해서 계시하고 그가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부어주셨고 그 성령의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이미 종말이 도래한 노아의 홍수의 때와 같은 시대에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유심히 살피면 성령의 강림이 사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행 1:8은 복음의 확장 과정을 선언적으로 보여주는데, 예루살렘의 성령강림 이어지는 온 유대의 복음의 확산과 사마리아와 땅끝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고넬료의 집에 성령 강림은 사도가 그 곳에 이르러서야 성령 강림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강림은 예루살렘을 대신할 새성전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두 가지 표지였던<급하고 강한 바람>과<불>은 모두 심판의 표지입니다. 세례요한이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서<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마 3:11)에 성령은 뉘앙스에 따라서 얼마든지 폭풍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사실 오순절성령강림과의 연속적 측면을 생각한다면,<불과 성령>은 성령이라는 단의적 의미보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는 의미가 더하여진 중의적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의 증거들은 오순절 사건이 종말적 심판의 성취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이미>로서의 종말의 심판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됨으로서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 24, 막 13, 눅 21장에 여러가지 '재난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W. F. Albright와 C.S. Mann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 말은 '산고의 시작'(beginnings of birth-pain)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이 새로운 시대의 직전에 있게 될 고통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전문적인 용어다 ..(중략).. 유대 전역을 휩쓸었던 격변적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수많은 재난과 더불어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오순절의 종말적 성격이 오순절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이후 예루살렘의 멸망까지의 여러 재난들이 마치 새 시대를 여는 '여인의 산고'와 같은 역할을 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은 종말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열림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이 시대는 성령에 의한 종말적 통치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천년왕국을 무천년론으로 해석해야 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년은 완전한 통치의 문학적 메타포이며 성령의 강림은 이 종말적 통치와 심판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경의 종말 개념은<이미>와<아직>이란 두 개념으로 설명된다. 이미 성취된 종말은<오순절 성령강림>과<예루살렘 성전 파괴>로 완성된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성령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역사적 오심>과 구약적<그림자>로서의<성전>이 폐하여 지고 참 성전인<새 성전>으로서 어린양의 신부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계 21:9-10)가 지상에 건설된다. 따라서 오늘에 그리스도인은<종말론적 사고>를 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종말>가운데 들어와 있으며<미래적 종말>을 믿음 안에서 성화로서의 구원을 이루면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