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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강의

칼빈의 교회론에 관하여(2)

칼빈의 교회론에 관하여(2) 

노승수 목사

로만 처치는<가르치는 교회>와<배우는 교회>를 구분하면서,<가르치는 교회>곧 사제들이<참 교회>라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루터가 반발을 하면서<만인제사장>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는 이런 구분과 달리 모든 그리스도의 몸된 보이지 않는 교회가<참교회>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이 일에도 불구하고 이미 설명드린대로 로만처치로부터 떨어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개혁되기를 바란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그의 바램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뿐만아니라 루터가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사실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카톨릭 교회 안에서도 신학 논쟁이 일었습니다. 그 결과 사실은 이들도 이신칭의의 교리를 인정하는 신학적 결론을 얻었습니다. 어느 회의였는지는 제가 기억이(이도 나이 탓인가? ㅠ.ㅠ ) 그런데 카톨릭 교회 안에서 '그건 루터가 하는 소리와 똑같이 않느냐?'라며 이 회의의 결정을 정치적으로 뒤집는 결정이 나옵니다. 그 결과 카톨릭 교회와 개혁교회는 신학적으로 일치를 볼 수 없는 선이 그어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칼빈은 개혁교회의 교회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모두가 제사장이다>는<아래로부터의 교회>로는 부족했던 것이지요. 그래서<배우는 교회>와<가르치는 교회>의 교리를 원용해서 기구로서의 교회에 대한 신학을 정립합니다. 이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진 말씀의 전승이 초대교회와 교부들과 중세를 거쳐 현재 말씀을 바르게 섬기고 받드는 교회에 정통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여러가지 표현들에 칼빈의 이런 신학은 이미 상당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예컨대, 교회를 단지<성도 공동체>즉,<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했던 루터의 정의대로라면,<선교단체>역시 믿는 사람의 공동체이니 교회라 정의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칼빈이 참교회의 표지를<말씀>과<성례>와<권징>의 바른 시행이라고 한 것의 이면에는 이것을 바르게 시행할<직원>을 염두에 둔 것이지요. 즉, 칼빈이 교회를<기구>라 이해한 것은 교회의 표지가 성도가 모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가르치는 자격있는 직원이 있을 때 이를<교회>라 칭한 것입니다. 이는<배우는 교회>와<가르치는 교회>의 카톨릭적 색채를 빼고 원래 그것이 가졌던 신학적의미를 복원한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댓글에서 얼핏 언급하였지만 벨직신앙고백서 29장에 보시면<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로 인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 죄를 멀리 하며, 의를 따라 살고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참으면서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해서 참교회와 그 성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30장에서<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그 직무의 담당을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교회의 직원에 맡기셨음을 드러냅니다. 즉, 칼빈이 말하는 기구라는 것을 결국 그리스도가 주인이신 교회의 직원과 직제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교회론을<위로부터의 교회>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칼빈의 이러한 시도는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지상에 교회를 건설하실 때, 이 복음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미 제가 쓴 글에서 니케아 회의가 교회를 사도성을 가진 공동체로 정의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목자에게 그 양무리를 맡기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신학적 구조가<배우는 교회>와<가르치는 교회>에 반영이 된 것이지요. 따라서 제사를 집전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로서 사제들이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성도로 하여금 사도적 복음으로 돌아가게 하는<기구>가 바로 정통적 교회라고 본 것입니다. 
이 당시에 교회의 부패로 인해 재세례파들은 교회의 전체를 다 부정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다시 준다고 해서<재세례파>라 불린 것입니다. 그럼 왜 칼빈은 재세례를 베풀지 않고 영세를 인정하였는가? 지금<거짓 선생>들이 앉아서 교회를<거짓>으로 만들고 있지만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지금<거짓 교리>가 들어와서 오염이 된 것임으로 그 가운데는 여전히 교회의 정통성이 존재하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이게<재세례파>와 갈리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칼빈은 그 정통성이<로만처치>에 있지 않고<개혁교회>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칼빈의<보이는 교회>와<보이지 않는 교회>에서 잘 들어나지요. 이는 잘 아시리라 생각하고 따로 설명드리지 않겠습니다. 
즉,<거짓 선생들>과<거짓 교사>가 차고 앉았다고 해서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오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영세>는 도나투스 파에 대해서 어거스틴이 가졌던 태도처럼<잘못된 교사>에 의해서 시행되고<참 교회의 흔적>인 셈인 것이지요. 이미 앞선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이걸 깡그리 부정한 재세례파는 역사적 교회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이<영세>의 인정을 통해서<말씀의 기구>로서 교회가 사도적이며 교부적이며 초대교회적이며 중세를 면면히 이어온 역사적 교회의<계승자>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세 1000년의 어둠이 하나님의 택함과 부르심을 훼방할 수 없듯이,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외치는 바알 숭배의 영적 어둠 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자 7000명을 숨겨 두신 것처럼<거짓 교사>와<거짓 교리>에 무너질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영세>의 인정은 바로 그 역사적 교회의 정통성을 우리가 잇는다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여전히<진리가 아닌 것들>이 판을 칩니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이 땅에서 우리의 신학이<원형신학>이 아니라<모형신학>이라 한 까닭은 우리의 연약함과 불완전함 때문이었습니다. 비진리는 알미니우스파 안에만 있지 않고 로만처치 안에만 있지 않고<개혁교회>안에서 여전히 있습니다. 그래서<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우리 싸움을 칼날을 밖으로 세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비진리들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승리하도록 하는 것은 개혁파의 진정한 정신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서<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라고 할 때, 우리는 정말 무엇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이 신앙고백이 바르게 회복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