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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세계관의 변화와 이데올로기 우상

세계관이 참으로 관(觀)이 되려면 일체의 자기 방식의 이름표나 계급장, 자기 경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본 것(見)에 대해 해석을 달게 되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확정하게 되면 이 첫단추로 인해 사람과 사람이 안 만나지고 하나님과도 만나지지 않는다. 이런 것은 베이컨이 말한 우상일 수도 있고 플라톤이 말한 현상계일 수도 있다. 성경도 우상 숭배를 말할 때, 항상 "자기를 위하여"가 따라 붙는다.

본래 견(見)이란 자기가 유리하게 보는 방식이다. 내가 세상에 적응해온 방식이며 거기에 미세하게 자기도 모르는 조정들이 가해져서 특정한 조건 아래 보는 방식이 만들어진다. "자라보도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이"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사태를 평가 판단한 후 그것의 사실 유무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교적 어린시절의 미숙한 사고라면 더더욱 평가 되지 않는다. 그런 견해들이 넘쳐나면 점점 사실은 오리무중이 된다.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가 해도 서로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견해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 찬 이야기라는 말이 있듯이 종교인이 정치 이야기 하는게 제일 답이 없다. 교회가 이런 갈등을 극복하고 에베소가 보여주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는 것을 보려면 더 근본적인 세계관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계관은 내 근본적 삶과 문화의 영역의 변화가 없이는 정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세계관 운동은 이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서 둘로 쪼개졌다. 그들이 말해온 세계관이 얼마나 머리속에서만 맴도는 공허한 소리였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 정치가 소비되는 양상은 더 심각해졌다. 세계관은 보는 방식으로서 우리 습관과 견해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수 없다면 지금과 같은 양상을 피할 수가 없다. 세계관은 운동이 아니라 습관을 다루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거시적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내 사소한 견해들조차 성경을 따라 검토할 수 없고 그것이 이미 도그마로 금기가 되고 마치 반공이 이데올로기가 되어서 모든 사안을 잠식하는 것처럼 우리 안의 근본적 논의나 사고를 잠식해버릴 수 있다. 그런 기독교는 이미 참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진보나 보수가 기독교인의 가치는 아니다. 정치는 우리가 잠시 나그네로 머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안정되게 신앙 생활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단에 불가하다. 그럼에도 정치가 이데올로기가 되고 우리의 우상이 되어 버렸다. 아테네의 도둑 프루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기와 맞지 않는 것은 모든 잘라버리거나 늘려버리는 무한 자기 복제나 환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하여" 만든 우상인 것이다. 세계관을 말한 신학자들은 일찍 말한 바가 있다. 기독교가 세계관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돌아서지 못하면 회심은 금방 혼합종교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적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이미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본토 아비 친척 집을 떠난다는 의미다. 내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모든 것들을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청산한다는 의미다. 내가 붙인 이름표나 계급장 이전의 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가진 결함을 마주하고서 그 비참을 들고 예수께 나가야 한다. 그렇게 에덴에서 원의를 상실하고 벗었음으로 부끄러웠던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덧입음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자기정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럴 때, 다 종교와 각종 신화가 가득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가 그들에게 전파될 때 가졌던 복음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 그들의 그런 다원주의 문화에서도 복음이 더 가치로웠던 것은 바로 이런 힘이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사도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