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고려의 활자술의 유럽의 전파

흔히 금속활자는 종교개혁의 주요한 동인 중 하나로 이해됩니다.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가 없었다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고 각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 인쇄하는 일도 더뎌서 실제 종교개혁의 동력이 일반 성도들에게 널리 퍼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455년 구텐베르크가 완성한 42행 성경은 최초의 금속활자로 공인받고 있었습니다. 저도 어려서 역사 시간에 이렇게 배운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금속활자는 고려에서 넘어간 것이라는 게 이제 학계의 중론이 되어 갑니다. 잘 알려진 직지심체요절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하게된 1955년 프랑스 소르본느로 유학길에 오른 박병선 박사는 박사를 마치고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게 됩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서울대 은사였던 이병도 박사가 병인양요의 약탈 도서들을 기회가 닿으면 찾아보라는 부탁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동양문헌실에서 먼지 덮힌 한국 책 한 권을 찾게 됩니다. 그 책의 제목은 잘 알려진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입니다. 이 책은 1377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된 책으로 1890년대까지 한국에서 보유하고 있다가 당시 프랑스 외교관을 한국에 와 있던 콜랭 드 플랑시 대리공사가 수집품을 사들인 후 프랑스로 가지고 가게 되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에서 이 책을 전시했고 유언으로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이 책을 발견한 박병선 박사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놀라운 발견을 합니다. "이 책을 쇠를 부어 만든 글자로 찍어 배포하였다"라는 글귀였습니다. 이는 당시 가장 오래된 구베르텐의 금속활자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기록입니다. 1972년 박병선 박사는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전시회에서 직시심체요절을 출품하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여러 학자들 앞에서 입증합니다. 결국 유네스코는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는 "우리는 교과서, 백과사전 등 모든 세계 문헌을 정정하도록 통보, 조처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직지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프랑스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2020년)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에 의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세계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은 지지보다 무려 138년이나 앞선 금속활자본입니다. 이는 국내 실존하고 있고 이미 보물로 지정된 도서입니다. 이는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남아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여러 종의 남명증도가 중에 공인본이 바로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입니다.

 

박상국 교수는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이고 나머지 다른 3종의 책은 목판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 책이 금속활자본이라는 근거를 들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1. 너덜이라 불리는 쇠찌꺼기와 글자 획의 탈락

2. 목판본에서 나타나는 나무테의 흔적이 없는 점

3. 이 공인본은 삼성본의 다시 찍은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금(金)자의 머리가 삼성본은 들 입(入)으로 공인본은 사람 인(人)으로 되어 있다. 이는 두 판본이 서로 다른 판본임의 증거다.

4. 판독이 어려운 글자를 덧칠해 가필한 흔적이 있는데 목판본에는 없는 흔적이다.

5. 공인본의 가필을 삼성본이 수정한 흔적이 있다.

6. 이 중으로 찍힌 흔적은 목판본에서는 나타날 수 없는 흔적이다.

7. 금속활자본에서 흔히 보이는 뒤집힌 글자, 예컨대, 일(一)이 구분이 어려워 뒤집혀 조판되어 찍힌 흔적이 보인다. 글자를 새긴 목판본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실수다. 이런 특징들은 한 글자씩 조판해서 찍는 금속활자본의 특징이다.

8. 책의 말미에 있는 최이의 발문을 잘 못 해석했는데 "기해년(1239) 조주자본중조(彫鑄字本重彫)"이란 귀절을 그 동안 "금속활자본을 본보기 삼아 다시 목판으로 제작했다"로 해석했다. 그런데 이정섭 교수는 "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한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도 2017년 논문에서 최이의 발문에 등장하는 조주(彫鑄)는 금속활자의 주조를 뜻한다고 밝혔는데 고려사 사서에 목판본은 조주가 아니라 조판(彫板)이란 용어를 썼다고 밝혔다.

 

이를 근거로 박상국 교수는 공인본과 삼성본은 명백히 다른 판본이며 이 둘을 같은 판본이라고 한 판단은 명백히 틀린 판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기정 사실이 되면 구켄베르크에 비해 무려 216을 앞선 기록이 됩니다. 이런 사실들로 인해서 서양학자들도 구텐베르크가 고려의 기술을 카피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셰필드대학의 존 홉슨 교수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일컫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술은 한국의 고려 금속활자를 모방한 것이다"라고 했고 폴 니덤 박사는 "한국의 금속활자술이 서양으로 전파됐다"면서 한국에서 비단길과 초원길을 통해 동서양의 문물이 활발히 교류됐고 금속활자술도 이 길을 통해 독일에 전해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남명증도가 공인본이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학계에서 인정이 된다면 한국은 서양보다 216년이나 앞선 금속활자본을 갖게 됩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그렇도 그렇고 금속활자도 그렇고 우리 민족은 언어와 문자에 대한 남다른 감각과 인식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