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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종교개혁사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 이야기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 이야기

권현익 선교사(GMS)

글을 시작하며…
깔뱅의 생애 가운데 그를 굉장히 힘들게 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있다면 카스텔리오(Sébastien Castellion)라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깔뱅에 관한 온갖쓰레기 자료들은 이 카스텔리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깔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되는 끔찍한 범죄들이 벌어졌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조용하던 제네바 시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처참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피의 도시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질렀던 너무도 잔인한 고문과 참변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것이다" (원문이 아닌 2차 자료)
이제 카스텔리오에 관한 역사 자료를 근거로 그의 이야기를 서술하겠습니다.
카스텔리오와 깔뱅의 만남
카스텔리오는 1515년생이니, 깔뱅보다 6살 어린 나이이며, 한 때 쥬네브(제네바)를 다스렸던 Savoie 영주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주 명석하여 리옹(Lyon)에서 공부를 하게 되고, 그곳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라틴어와 헬라어의 대가라 불릴 정도로 언어에 탁월했으며, 늘 헬라어 성경 원문을 읽었고, 라틴어로 기록된 깔뱅의 기독교 강요를 열광적으로 읽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개혁 사상을 더 잘 알 수 없다고 판단한 카스텔리오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가게 됩니다. 마침 깔뱅도 그곳의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고 있었으며, 마틴 부처가 제공한 참사원 건물의 방 몇 칸에 나그네들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카스텔리오도 깔뱅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시작됩니다. 때마침 페스트가 창궐하여 깔뱅의 집은 환자 보호소가 되었고, 카스텔리오도 깔뱅을 도와 아주 열심히 환자들을 돌보게 됩니다. 그의 모습에 감동을 받을 깔뱅은 주변 친구들에게 그에 대한 좋은 인상에 대하여 말하였고, 카스텔리오 역시 자기 친구들에게 깔뱅과의 만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 후, 깔뱅은 다시 쥬네브에서 사역하게 되었고, 비록 헤어지게 되었지만 재능 많은 카
스텔리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쥬네브의 한 학교에서 교장을 찾고 있을 때, 깔뱅은 카스텔리오의 자질과 신앙, 그리고 희생적인 자세를 떠 올리게 됩니다. 깔뱅의 추천으로 26세의 카스텔리오는 쥬네브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은 그에게 있어서 행운과 같은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갈등의 시작
카스텔리오가 깔뱅의 소개로 쥬네브의 한 학교에서 교장직을 수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깔뱅은 그가 다투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말에 트집을 잡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 카스텔리오는 가까운 사람들과 자주 다투었는데, 대부분의 문제는 돈과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깔뱅은 교회의 이미지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적인 스캔들에 대해 중재자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카스텔리오는 성경 번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성경은 깔뱅의 사촌형 올리베땅이 번역한 성경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 가운데 가장 수려한 문장과 완벽에 가까운 문법 사용으로 근대 프랑스어의 기초를 세움이었는데, 그는 이 성경이 좀 촌스럽다고 생각하고는, 그보다 더 유창하고, 보다 알기 쉬운 성경 번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그는 깔뱅의 의견을 듣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깔뱅의 도움을 받아야 보다 유명한 책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깔뱅은 카스텔리오가 올리베탕의 번역 성경보다 더 나은 번역을 하기에는 그가 역량이 부족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성경 번역이라는 것은 언어적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카스텔리오는 번역한 첫 몇 페이지를 깔뱅에게 보여주지만, 깔뱅은 원어 성경이 갖는 수준이나 정확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확고한 확신이 들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랫동안 서먹한 관계가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서로가 멀어지게 된 것은 신학적인 의견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적 관점 차이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
카스텔리오는 구약성경<아가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깔뱅에게 말하였습니다.
“깔뱅 선생님! 저는 당신이 아가서를 왜 비유적 관점으로 해석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이런 비유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왜 유독 아가서는 상징적인 비유라고 가르치므로 다른 성경과 달리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성적인 중요한 묘사들을 당신이 제하여 버리려고 합니까?”
이에 대하여 깔뱅은
"그렇다. 이 이가서에 등장하는 두 연인의 이야기를 하나님과 신자의 영혼으로 읽어야만 이 책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단다."
"그 참 이상한 커플이군요.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이 애정 표현이 하나님과 영혼간의 사랑이라고요?"
"카스텔리오, 나는 이 애정 표현에 전혀 당황하지 않단다. 아가서에서 말하는 이 하나 됨은 앞으로 오게 될 것의 그림자이지. 우리 주님과 교회의 연합을 예시로서 말이다."
"깔뱅 선생님, 저는 이 내용이 중세 아랍시대의 하나의 에로틱한 시의 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아가서는 실수로 구약 성경에 포함되었거나, 아니면 이 책을 필사한 사람이 독자들에게 불안정함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썼다고 봅니다."
이 말을 들은 깔뱅은 화가 나서 마치 밖으로 뛰어 나갈 것처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카스텔리오는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계속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예수님께서 금요일부터 부활절까지 죽음에 머무셨을 때, 땅 아래 어떤 국한된 장소에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에서는 황당하게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지옥에 내려 가셨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옥은 그저 ‘무덤’이라는 뜻으로, ‘죽으셨다’는 의미의 반복에 불과하기에 사도신경에서 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깔뱅은
“사도신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것들을 간단히 요약해 놓은 것이다. 교부들이 간결하게 요약된 사도신경에 지옥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 문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고통의 마지막까지 가셨다는 말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즉, 주께서 철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망의 고통에 매여 있을 수 없게 하셨기에(행 2:24),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 가셨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는가?”
두 사람의 신학적 불일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카스텔리오의 집에서는 깔뱅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구실을 찾게 되었고, 깔뱅의 집에서는 카스텔리오의 영향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카스텔리오는 쥬네브 외곽에서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목사 임직 요청을 하게 됩니다. 조금 황당한 것은, 이런 요청을 그가 하게 된 이유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의 사례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되어 더 많은 돈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목사협의회에서는 그의 목사 임직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또 다시 서로의 마음을 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목회자 협회의 회장이었던 깔뱅은 성경에 관하여 본인과 동일한 의견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 결코 목회자로서 사례를 줄 수 없다는 분명한 자세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깔뱅의 태도에 대하여 그에게는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며, 관용의 태도가 결핍되어 있다고 비판되기도 하였습니다.
노골적으로 원한의 감정을 표현하는 카스텔리오
카스텔리오는 분명 깊은 원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깔뱅에게 복수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1544년 5월 어느 날 그는 뇌브(Notre Dame Neuve) 성당 강의실에서 가르치고 있는 깔뱅을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깔뱅은 바울의 다음의 구절에 대하여 주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고후 6:4)
깔뱅은 하나님의 일꾼인 사역자의 모습에 관하여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카스텔리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깔뱅의 말을 끊어 버리고 아주 심하게 화를 내면서 이렇게 쏘아댔습니다.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종? 내가 웃도록 좀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은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바울과 같지 않다는 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울은 인내하였지만, 당신은 인내가 없잖습니까?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야로 희생하였지만 당신은 교회에서 놀고 있쟎소! 바울은 검소하였지만, 당신은 술꾼이지않소! 그 분은 유혹에 대하여 싸웠지만, 당신은 유혹을 부추기고 있잖소! 그분은 정숙하였지만, 당신은 방탕하지 않소!“
강의실에서 카스텔리오의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하였고, 분개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카스텔리오가 나열하고 있는 내용은 바로 그 자신의 모습이었음을 청중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스텔리오가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새파랗게 질린 깔뱅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성경을 닫았습니다. 사람들이 카스텔리오를 문 밖으로 쫓아내려고 몸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깔뱅은 다른 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다음 날, 전날의 상황을 알게 된 쥬네브 시 의회는 카스텔리오에게 그가 직책을 맡고 일하고 있는 여러 일들을 다 그만두게 하는 최종적 제재를 내리게 됩니다. 결정에 씁쓸함과 앙심을 품은 카스텔리오는 그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가 바젤을 향하여 떠날 때, 깔뱅은 그가 가정을 돌보는 가장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었고 그는 바젤에서 헬라어 교수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고, 카스텔리오는 계속 가난하고 힘들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1544년 5월에 쥬네브를 떠난 후 10년 정도 경과된 1553년 10월에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이 발생하자, 이 시건을 빌미로 카스텔리옹은 깔뱅을 심하게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카스텔리오는 깔뱅의 심각한 대적자가 되었고, 그의 원한과 미움에서 나온 말과 글들은 깔뱅을 공격하려는 자들의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프랑스 리용(Lyon) 교구 소속이었던 중요한 도시 쥬네브를 깔뱅에게 빼았겼다고 생각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깔뱅을 공격하는 1차 자료의 근거로 즐겨 사용하게 됩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오스트리아의 소설가며 극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가 카스텔리오의 글을 1차 자료로 사용하여 아주 신랄하게 깔뱅을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츠바이크의 글은 "폭력에 대항한 양심"(자작나무)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깔뱅을 살인자로 몰아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바오출판사에서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로 재출간 되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관계로<폭력에 대항한 양심>의 독자평 가운데 일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칼뱅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오는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그러나 칼뱅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까놓고 문제 제기를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쫓겨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카스텔리오가 추방된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에 기인한다. 그가 성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용어 사용에 있어 칼뱅의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 아가서를 방탕한 연애의 기록으로 보았다는 것 등이다. 칼뱅은 이러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카스텔리오를 제네바시의 목사로 임명하기를 거부했고 끝내는 시에서 몰아내기까지 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칼뱅이 자신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학자 카스텔리오를 질투했다는 의심을 할 만하다.
추방된 카스텔리오와 칼뱅과의 싸움이 절정에 달한 것은 세르베토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고 칼뱅에 의해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진 다음부터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한참 수세에 몰려 있던 칼뱅은 세르베토를 본보기로 처형하면서 그 모든 반대자들을 잠재웠다. 중세 가톨릭이 행했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여기에 카스텔리오는 침묵을 깨고<이단자에 관하여>,<칼뱅의 글에 반대함>과 같은 글을 써서 이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자 하였다. 만일 이들 내용이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칼뱅은 자신의 국가권력으로 월권을 행사하여 살인죄를 저지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서술하였던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카스텔리오가 제시한 역사 서술이 얼마나 황당한 허구이며, 그의 글을 기초로 깔뱅을 살인자로 공격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 그리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폭력에 대항한 양심"을 통하여 카스텔리오를 영웅으로 삼으려는 잘못된 의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츠바이크의 글을 1차 자료로 삼아 멋대로 깔뱅을 욕하는 심삼용씨, 그리고 왜곡된 역사가 마치 있었던 진실된 역사처럼 인터넷에 열심히 퍼다 나르는 열심 당원들의 논리에 대하여 정식으로 반박하고자 합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주장에 대한 반박
#주장 01.
"깔뱅이 통치한 불과 5년 동안에 당시 전 인구가 1만 3천 명에 불과한 제네바 시에서 13명이 교수대에서 살상되었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을 화형시키는 끔찍한 범죄들을 벌였다." (카스텔리옹의 주장)
반박
1. 깔뱅은 2차례에 걸쳐 쥬네브에 머물게 되는데, 1차 체류 기간은 추방으로 1536∼1538년까지이며, 2차 체류 기간은 재 초대된 1541∼1564년(사망)까지이므로, 카스텔리옹이 말하는 깔뱅 사역 초기 5년이라는 것은 2차 기간을 의미합니다. 즉, 1541∼1545년까지를 뜻합니다.
2. 깔뱅은 1555년 초까지 쥬네브 사람들에게 심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쥬네브라는 도시가 깔뱅을 위하여 존재한 도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나온 부르조아 계급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유 도시이며, 자신들의 자유를 제한시켰던 로마 가톨릭 교회를 추방시키고 난 후 로마 교회로부터 신학적 공격을 정당하게 막아주므로 자신들의 정부가 분명한 명문을 갖고 있는 국가임을 증명해줄 막강한 실력을 가진 신학자가 필요하였던 것뿐입니다. 쥬네브가 깔뱅에게 아무런 권한이나 권력을 부여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과거 로마 교회가 쥬네브를 장악했을 때의 잔혹한 피 흘림과 억압을 이미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역사의 반복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자신들의 권리가 종교적인 것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깔뱅의 첫 사역 기간 동안 사례비를 한 푼도 받지 못하였던 사실에서도 깔뱅이 쥬네브에서 갖는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3. 카스텔리오는 1544년 5월에 시의회로부터 그가 처한 모든 직위에서 파면되어 실직하게 되자 쥬네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깔뱅의 초기 5년이라는 기간동안 그는 거의 4년을 함께 사역했고, 쥬네브에서의 마지막 해에는 그도 목사가 되겠다고 목사 위임 허락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니, 그의 말대로 깔뱅이 살상과 화형을 행하고 있었다면, 그런 와중에 생활비가 부족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했던 그는 왜 그 살상에 대하여 침묵하였으며, 침묵도 부족하여 살인자들의 집단인 목사가 되고 싶어 했으며, 목사 임직을 허락하지 않자 광란을 부린 것인지?
4. 아∼! 이럴 수 있겠군요. 카스텔리오가 머물렀던 4년 동안은 깔뱅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며(그 증거가 카스텔리오를 살려 둔 것이니), 카스텔리오가 쥬네브를 떠나간 후 1년 동안 살상을 저질렀다는 가설도 가능하겠군요.
5. 그런데 카스텔리옹이 깔뱅을 공격하는 것은 그가 쥬네브에 머물러 있을 동안도 아니며, 쥬네브를 떠나자마자 바로 공격한 것도 아니었고, 쥬네브를 떠난 지 10년이 경과한 이후인 1553년 10월에 벌어진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 이후입니다. 그렇다면 1553년까지는 카스텔리옹이 아무리 찔러봐도 깔뱅을 꼬투리를 잡을 만한 그 어떤 사건도 벌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 반대로 그의 주장대로 깔뱅이 살인자라면, 카스텔리오 역시 살인자 집단에 포함되어야 할 살인자, 혹은 살인 동조자였다는 자기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역사적 서술은 그 어떤 경우에도 역사의 1차 자료로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6. 그의 주장대로 깔뱅 초기 5년 동안 수많은 살인과 살상이 일어났다면, 왜 이 엄청난 사건들에 대하여 쥬네브를 공격하기 위하여 손바닥처럼 쥬네브를 내다보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는 침묵하였으며, 더군다나 카스텔리오는 이 엄청난 학살의 역사에 대하여 10년 동안 침묵하였을까요? 혹 깔뱅이 써준 추천서가 효력을 잃고 그곳에서도 실직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요?
7. 10년 만에 카스텔리오를 통해서 쥬네브의 학살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면, 13,000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1560년경에는 2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쥬네브를 드나들었는데, 왜 이 역사가 카스텔리오에 의해서 처음 드러났던 것일까요? 비밀리 죽였기에? 그렇다면 가능하겠군요. 그런데 화형은 어떻게 비밀스럽게 할 수 있는지? 70여명의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왜 그 가족과 모든 쥬네브 사람들은 침묵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런 역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8. 깔뱅 사역 당시 사형 당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군사적 반란 혹은 제네바 시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경우였습니다. 그것은 법에 의해 누가 봐도 사형을 받을만한 일이었기에 사형수의 가족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7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깔뱅이 쥬네브로 오기 훨씬 전인 1531년 까지 13명의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깔뱅이 사역하고 있을 당시, 깔뱅의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년간 몇 남녀가 공모하여 독을 사용하여 역병을 일으키게 한 것이 사실로 밝혀졌으며, 이 일로 15명의 여자가 화형을 당하였고 몇 명의 남자들은 잔인한 방법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러합니다.
깔뱅 당시 유럽 전역에는 페스트가 유행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은 희생을 당하였음에도 일부의 사람들은 역병에 멀쩡한 것에 화가 났고, 그래서 고의적으로 병을 퍼뜨렸던 사실이 역사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1545년 1월부터 1546년 3월까지 총 35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어 그들 대부분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여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카스텔리옹은 혹 이 사실을 근거로 깔뱅이 살상을 저질렀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궁색한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시대를 살았던 깔뱅에게 큰 잘못이 하나 있었다면, 고의적으로 병을 퍼뜨린 살인범들을 살리기 위하여 사형 제도를 온 몸으로 거부하며 당시 그 시대적 사고에 붙잡혀 있지 말고 오늘날의 관점으로 사형수들에 대한 인권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어야 하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그는 단지 사형수들을 너무 오랫동안 고문하지 말라는 간청만을 하였던 것입니다. 화형을 당하는 사람들이 깔뱅이 목사로 있는 그 시대에 실제로 있었지만, 그 가족들이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 법 집행에 대하여 침묵하였던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닌 정당한 법 집행으로 간주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난 우리 시대에 17명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범 김대두가 마침내 교수대에 섰을 때 당연히 사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의 일처럼 침묵하였던 우리들처럼…. 깔뱅을 비롯한 당시 개혁자들은 간음죄에 대하여서도 구약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간음은 한 가정과 그 자녀들, 그리고 배우자를 죽이는 “살인죄”와 같다는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살인범은 당연히 사형 형벌로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깔뱅이 살인자나 간음죄에 대한 사형 형벌에 심적으로 동의했다고 해서 그가 직접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닙니다. 근대 관용의 선구자라고 추앙받고 있는 카스텔리오는 쥬네브에서 집행된 화형에 대하여 열을 올리며 깔뱅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는 수많은 화형 사건이 있었고, 특히 1562년 3월 1일 바시에서는 “바시 대학살(Massacre de Wassy)” 사건으로 인해 백여 명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사건에 대하여서는 깔뱅을 비난하는 카스텔리오를 비롯하여 “찌라시”(전단지) 역사를 퍼 나르는 자들은 아직까지도 침묵을 하고 있는지, 그런 카스텔리오가 어떻게 근대 관용의 선구자가 될 수 있는지… 관용은 그들에게 있어 오직 쥬네브에서만 적용되는 그런 단어인가 봅니다.
가톨릭 백과사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깔뱅의 살인적 행동에 대한 역사 서술은 카스텔리오의 서술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처형이든 모든 사형은 깔뱅의 집 문 앞에서 행해졌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쥬네브를 한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깔뱅의 집 앞에 사형터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역사적 서술이 아닌 저질스러운 인격 모독과 인신공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교의 이름으로 집필된 가톨릭 백과사전에는 이러한 왜곡 역사가 버젓이 올라가 있으니, 그 동안 찌라시 역사만을 찾아 다니는 “찌질이”들은 값진 진주를 찾은 사람처럼 기뻐하고 열심히 퍼나르지 않았을까요? 이 문장 내용을 그대로 배껴서 사용하면서도 인용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기독교 죄악사>를 쓴 조찬선 씨는 좀 더 과장된 보탬으로 그의 책에서 깔뱅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어떻게 소설 대본으로 바뀌며,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각인되는지를 잘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The execution of however must be laid at his door; it has given greater offence by far than the banishment of Castellio or the penalties inflicted on Bolsec -- moderate men opposed to extreme views in discipline and doctrine, who fell under suspicion as reactionary. The Reformer did not shrink from his self-appointed task. Within five years fifty-eight sentences of death and seventy-six of exile, besides numerous committals of the most eminent citizens to prison, took place in Geneva.
그것이 어떠한 처형이었든 그 집행은 그의 문 앞에서 행해졌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나중에 반동으로 의심받고 훈육과 교리의 극단적 안목에 반대하던 온건한 사람이었던 카스텔리오의 추방이나 볼섹에게 가해진 형벌보다 훨씬 지나친 처벌이였다. 개혁자는 그의 독단적인 과업을 축소하지 않았다. 대부분 저명한 시민들이 투옥되었던 헤아릴 수없이 많은 경우들을 제외하고도 제네바에서는 5년동안 58명이 사형에 처해지고 76명이 추방되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폭력에 대항한 양심”이라는 책으로 카스텔리오를 근대 관용의 선구자라고 추앙을 하고 있는데, 무슨 근거로 그를 관용의 선구자라고 하는지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그저 막무가내로 깔뱅에게 대들기만 하면 “선구자”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역사 왜곡자들의 수준이 그저 한심할 뿐입니다.
#주장 02.
1. "칼뱅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오도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반박
―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고요? 이 대목에서 츠바이크는 정말 역사에 대해 무지한 역사 문외한이거나 아니면 카스텔리오를 순박한 사람으로 묘사하려는 극작가로서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카스텔리오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깔뱅의 집에 머물렀으며, 페스트가 돌았을 때 깔뱅과 함께 환자들을 돌볼 정도로 아주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런 카스텔리오의 모습에 좋은 인상을 가졌던 깔뱅이 쥬네브로 돌아갔을 때, 교장이 비어있는 학교의 교장 자리를 그에게 추천하자 얼른 달려 왔든 것이지, 쥬네브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처럼 멋 모르고 깔뱅의 문하에 들어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2. 그러나 칼뱅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까놓고 문제 제기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반박
― 무슨 문제를 제기했나요? 1544년, 깔뱅이 바울 서신서를 가르치고 있을 때, 카스텔리오는 깔뱅과 동료 사역자들의 신실성과 믿음에 관해 신랄하게 인식 공격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아니, 그건 평상시 그의 인격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카스텔리오의 주장에 의하자면, 이 당시 깔뱅이 70명의 사람들을 화형, 사형시키고 있을 때인데 문제 제기라는 것이 그저 인신공격한 것입니까? 관용의 화신께서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하셔야 할이 겨우 그런 일었습니까? 깔뱅을 말리든지, 아니면 곧바로 편지를 써서 깔뱅을 고발하든지, 시민들을 동원해서 깔뱅을 추방하든지 해야지 했어야지요! 카스텔리오가 너무 관용적이라서? 그렇게 관용적인 사람이 왜 허구한 날 가까운 사람들과 싸움질을 했으며, 그것도 늘 돈 문제와 관련된 것일까요?
3. 쫓겨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반박
― "집에서 새는 쪽박, 나가서도 샌다"는 말이 있듯, 쥬네브에서 교장직에 있었을 때에도 그는 늘 경제난에 쫓겨 다녔으며, 돈이 없다고 항상 불평하고 다녔습니다(당시 카스텔리오는 400플로린의 월급을 받았고, 깔뱅은 500플로린을 받았다. 물론 집과 외투는 정부에서 제공했다). 그 좋은 직장을 잃고, 바젤로 가서 인쇄소(학자들이 운영)에서 교정을 보는 일을 하다가 헬라어 교사로 일하였으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 늘 불평하고 싸우는 그의 성격의 괴팍함 때문에 직장을 잃고 가난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깔뱅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4. 카스텔리오가 추방된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에 기인한다. 아가서를 방탕한 연애의 기록으로 보았다는 것 등이다(아가서를 정경에서 빼아 한다고 주장함).
반박
― 과연 이게 사소한 일이란 말입니까? 오늘날에도 어떤 이들이 아가서를 3류 소설처럼 취급하다가 혼쭐이 난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500년 전에 기독교적 가치관 속에 있던 유럽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면…
20세기를 살았던 츠바이크가 갖고 있는 신앙 수준에서는 그것이 사소한 일인지 몰라도, 그 당시는 아주 인생을 종칠 소리였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5. 칼뱅은 이러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카스텔리오를 제네바시의 목사로 임명하기를 거부했고, 끝내는 시에서 몰아내기까지 한 것이다.
반박
― 목사가 될 사람이, 그것도 교장 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허구한 날 싸움질하고, 깔뱅이 중재해야만 되는 일을 벌인 것도 그것 역시 사소한 일입니까? 카스텔리오는 당시 이미 어느 지역에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었던 상태였는데, 그런 그가 목사가 되려는 이유가 영혼을 살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쥬네브의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 잡겠다는 것도 아니었으며, 모두가 그의 행실을 잘 알고 있는데(그것만으로도 자격 없음), 경제적인 문제 해결책으로 목사가 되겠다고 하니 누가 그런 그에게 목사직을 허락하겠습니까?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은 아마 그런 자를 깔뱅이 목사로 세웠다하더라도, 왜 그런 자를 목사로 세웠는지 목사의 기준을 알 수 있었다고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깔뱅이 그의 신학적 문제로 목사 임직을 거부하긴 했지만, 카스텔리오가 맡고 있는 학장직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다면 깔뱅이 더 관용적인 사람이지 않습니까? 츠바이크는 깔뱅을 공격하기 위하여 카스텔리오라는 인물을 내세웠지만, 그 정도 자질을 가진 사람으로 깔뱅에게 흠집을 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것 같군요.
6. 이 같은 사실은 칼뱅이 자신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학자 카스텔리오를 질투했다는 의심을 할 만하다.
반박
― 카스텔리오가 언어적 탁월함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깔뱅과 대등한 학자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 듯합니다. 클래식 작곡가로 예를 든다면, 깔뱅이 모짜르트와 같은 사람이라면, 카스텔리오 역시 당대 대단한 언어적 소양을 갖춘 학자이긴 하였으나 살리에리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스위스 각 도시 국가에서 신학적 토론이 벌어질 때, 깔뱅만 참석하면 수적으로 월등라던 로마 교회 진영이 늘 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에서 깔뱅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츠바이크가 주장하는 깔뱅의 질투라는 표현은 살리에리의 위치에 있었던 카스텔리오가 늘 가슴에 한켠에 한처럼 품고 다녔던 단어였다고 말함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개신교적인 사람들은 깔뱅이 역사에서 갖는 위치를 잘 알고 있기에 그를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지만, 우리 개신교 내에서도 덩달아 깔뱅을 무시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저 모차르트일 뿐 공자가 아닙니다. 공자가 죽어야 유학이 산다고 했나요? 그를 무너뜨려야 음악이 살거나 그를 이겨야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 깔뱅은 개신교 신앙을 열어준 영적인 선조로 오늘의 신앙을 잇게 해준 것에 감사해야 할 인물이지, 싸움의 상대나 뛰어 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7. 추방된 카스텔리오와 칼뱅과의 싸움이 절정에 달한 것은 세르베토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고 칼뱅에 의해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진 다음부터다.
반박
― 세르베투스가 깔뱅에게 쥬네브를 방문해도 되느냐는 편지를 보냈을 때, 깔뱅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르베투스가 쥬네브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도 프랑스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지만, 세르베투스는 돌아가도 살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쥬네브에 남기를 고집하고 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쥬네브가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아니라 세르베투스가 어느 나라, 어디에 있었든지 그는 반드시 죽임 당해야 했었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시대에 그가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은 이미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고, 궐석 화형식을 거행했을 정도입니다. 그의 화형에 대해서는 애석한 일이지만, 세르베투스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카스텔리오와 칼뱅과의 싸움이 절정"이라는 표현 역시 옳지 않습니다. 깔뱅은 카스텔리오와 싸움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카스텔리오가 깔뱅을 뒤에서 욕하고 공격하였을 뿐이지요.
8.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한참 수세에 몰려 있던 칼뱅은 세르베토를 본보기로 처형하면서 그 모든 반대자들을 잠재웠다.
반박
― 맞습니다. 깔뱅은 이때에도 여전히 수세에 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깔뱅이 사역 초기 5년 동안에 70명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요? 이 말대로라면 사역 말기에는 한 700명을 죽였단 말입니까? 그런데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어떻게 반대자들을 잠재우는 기회가 되었는지에 대한 일체의 설명이 없습니다. 세르베투스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반대자들이 이단 세르베투스의 죽음으로 패할 수 있단 말입니까? 깔뱅에게 덤벼들다가는 자신들도 저렇게 죽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물러났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당시에 권력이 깔뱅 한 사람에게 몰리기 시작하면 그 힘을 분산시키려는 것이 반대파 정치인들의 생태적 습성이지 않나요? 깔뱅 반대파들이 그 당시 패한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패함의 원인이 다른 곳에 있었음을 츠바이크는 숨기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깔뱅 반대파들의 행동과 삶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이 옳지 않음을 확인하고 선거 혁명으로 반대파들을 물러나게 한 것입니다. 즉, 반대파들의 부당성을 알고서는 선거로 심판했을 뿐이지, 깔뱅의 무력 앞에 패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숨기고 왜곡시키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밝히려고 있다는 것을 츠바이크는 몰랐던 것 같습니다. 세르베투스가 화형될 때, 카스텔리옹은 그 현장에 없었기에 단지 소문의 소문을 듣고서 평상시처럼 흥분하여 마치 사실처럼 자세하게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하면서 깔뱅을 공격하고 있지만, 역사적 자료로 채택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허점들이 있습니다. 반면, 깔뱅은 변호사 출신일 뿐 아니라 그의 꼼꼼한 성격으로 인해 당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에 대하여 동료들에게 편지를 하거나 당회록(혹은 치리회일지)에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기록이 깔뱅의 일방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누가 ∼카더라”를 근거로 진술하는 카스텔리오의 증언보다는 깔뱅의 기록이 더 우월한 역사성을 갖습니다. 조선 세조 때 남이 장군이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을 것인가?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라는 시조를 지었습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왕이 되었을 때, 남이의 출세를 배아파하였던 유자광은 예종에게 “未平國”을 “未得國”으로 고쳤습니다. 즉,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시켜 역모죄로 몰아 대역죄의 형벌을 받게 하였던 적이 있지요. 깔뱅을 반대하는 역사 왜곡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카더라 통신”으로는 깔뱅의 역사적 자료를 뒤집을 수 없었기에 그들이 선택하는 역사 왜곡의 방법은 깔뱅의 편지 가운데 앞뒤문맥을 다 잘라 버리고서는 중간의 편지 한 토막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근거로 깔뱅을 공격하는 방법을 채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듣고 있는 깔뱅에 대한 많은 역사적 부분들이 간신배 유자광이 했던 것처럼 왜곡되었고, 그것이 마치 정설처럼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혁주의 역사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왜곡 역사를 근거로 신학을 펼쳐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깔뱅에 대하여 어떻게 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르베투스가 죽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던 카스텔리오의 그 어떤 글도 그저 억하심정의 감정 폭발이지 역사는 될 수 없습니다. 기초 학문, 기초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학문의 진보를 기대할 수 없는 것처럼 오늘날에도 1차 역사 자료를 찾는 노력이 없이는 500년 동안 왜곡된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역사 신학 학도나, 신학자들은 그저 남의 책을 인용하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1차 역사 자료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갖고 이 일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왜곡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9. 중세 가톨릭이 행했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반박
― 맞소. 츠바이크… 정말 고맙소.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 가운데서 정말 칭찬하고 싶을 정도로 잘 말한 부분이라오. 당신의 말에 의하자면, 1553년 세르베투스의 죽음이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다. 이것이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라면, 깔뱅의 사역 초기 5년 동안에는 단 한 번의 종교적 살인도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깔뱅이 목회 사역 5년 동안 70명을 종교국에서 죽였다는 카스텔리오의 말은 거짓이라고 당신이 증명해 준 것이다.
10. 여기에 카스텔리오는 침묵을 깨고<이단자에 관하여>,<칼뱅의 글에 반대함>과 같은 글을 써서 이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자 하였다.
반박
― 깔뱅이 살인을 행하고 폭정을 행했다면, 왜 카스텔리오에게는 10년 동안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침묵이 아니라 트집 잡을 것이 없다가 세르베투스가 죽으니 이제 빌미를 잡을 것이 생겼다고 공격한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요? 늘 빌미를 잡아 친한 이웃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였기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어디에서 목숨을 걸었습니까? 바젤에서? 그곳에서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건 싸움을 했단 말이죠? 깔뱅이 혹 청부 살인자라도 보내어 죽일까봐 걱정이 되어서? 바젤에서는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깔뱅이 살고 있는 쥬네브로 와서 살인적 행각에 대하여 공격했어야 목숨을 걸었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요? 카스텔리옹이 깔뱅을 공격해서 어떤 피해를 입었습니까? 감옥에라도 갔더란 말인가요? 그가 깔뱅을 공격하면 유명인이 되고, 용감한 시민상이라도 받고 여기저기에서 그를 초청하여 간증집회(?)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의 말을 1차 자료로 사용하는 로마 교회에서도 조차도 그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이야기들은 그저 뒷담화일 뿐, 역사적 자료로 가치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스텔리오는 자기 기대와 달리 배가 고파 굶주림 속에서 결국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그가 죽고 한참 뒤인 20세기에 츠바이크 같은 사람을 통해 그에게 이런 이름의 명예를 붙여주었습니다. "근대 관용의 선구자." 그런데 왜 그 전까지는 이런 위대한 선구자에 대하여 모두를 침묵했을까요? 혹 그의 주장이 거짓이기 때문은 아닐는지…
11. 만일 이들 내용이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칼뱅은 자신의 국가권력으로 월권을 행사하여 살인죄를 저지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반박
― 카스텔리오의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 세상은 깔뱅의 살인적 행각에 대하여 왜 몰랐습니까? 깔뱅이 언론 탄압과 통제를 했기에? 깔뱅이 돈으로 사람들의 입을 막았기에? 억울한 죽음이 있었다면, 깔뱅 사역 당시, 무수히 존재했던 그 반대파들은 왜 깔뱅을 공격하지 않고 침묵했을까요? 심지어 로마 교회조차 침묵했을까요? 쥬네브를 다시 빼앗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던 로마 교회는 자기편의 많은 사람들을 쥬네브에 심겨 두었는데, 쥬네브에 살고 있는 이들 프락치조차 모르는 일을 어떻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카스텔리오만이 알고 있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런 일들이 쥬네브에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가상적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만약 깔뱅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사실이라면 깔뱅의 반대자들은 그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 위령비 하나라도 세우고 노루 때린 막대기 3년 우려먹듯 깔뱅을 공격해야 옳지 않을까요? 그런데 유럽 어디에서도 눈을 닦고 살펴보아도, 그 어느 곳에서도 그런 위령비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카스텔리오의 이 영웅적 행동에 대한 기념비조차 하나도 없습니다. 왜일까요? 카스텔리오의 말이 맞다면, 오늘날 스위스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하여서도 역사 청산을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나라에 대하여 역사 청산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12. “재임기간 4년 동안 13명을 목 매달아 죽인 칼빈” : 칼빈의 옆에서 칼빈의 행적에 대하여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는 증언하기를 '칼빈이 통치한 처음 5년 동안에 비교적 작은 이 도시(제네바)에서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Stefan Zweig. op.cit. p.128)라고 하였다."
반박
― 카스텔리오가 직접 목격했다고 하는데, 왜 역사 자료는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쥬네브가 그 자료를 다 소각해서? 이 사실이 과연 역사적 사실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하다가 이런 역사 자료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Entre 1458 et 1462, la vallée de Chamonix vit plusieurs chasses aux sorciers menées par le tribunal d’inquisition de Genève.
Treize personnes au moins, parmi lesquelles quatre hommes et neuf femmes, sont condamnées au bûcher pour hérésie après avoir reçu, pour certaines, des peines exemplaires – une particularité toute chamoniarde. L’épouse du plus riche syndic fait partie des victimes. Une partie de leurs biens sont dévolus au prieur, seigneur spirituel et temporel du mandement.”
1458년에서 1462년 사이에 쥬네브의 로마 교회의 종교재판소 법정에 의해, 그것도 샤모니 계곡까지 마녀 사냥의 손길을 뻗쳐 최소한 13명, 그 가운데 9명의 여자와 4명의 남자가 이단 판결을 받고 화형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저지른 악행들은 다 역사로 남아 있는데, 깔뱅의 그런 행적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왜 없는 것일까요?
결론
우리 개신교는 심지어 역사 신학 학자들조차 로마 교회, 혹은 의도적 왜곡자들이 흘려 놓은 근거 없는 역사 자료를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반대자들의 비아냥거림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깔뱅은 성인도 완벽에 가까운 사람도 아닌 그저 그 시대의 천재적 자질을 가진 목사였습니다. 그를 지나치게 영웅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에 대한 악의적 공격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또한 옳지 않는 것이기에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그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풀어 보려는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 다음의 몫은 역사 신학자들이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며, 기회가 된다면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에 대한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그 진실을 밝힐까 생각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