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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야고보서강해

시험과 지혜와 재물에 대한 태도(약 1:1-11)

시험과 지혜와 재물에 대한 태도(약 1:1-11) 

노승수 목사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1. 인사(1)

제가 이미 야고보서 개요에서 정리하여 보여드렸듯이 야고보서는 11절까지의 3 가지 주제가 마지막 장까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히브리인들의 특이한 수사구조인 X구조 흔히 Chiasm이라는 구조에 의해 반복적으로 서술됩니다. 전체의 핵심적 주제는 참된 경건이고 이 경건은 세가지 주제에 의해서 표현됩니다. 첫째, 시험 둘째, 참된 지혜의 언어인 기도, 셋째 가난과 복에 대해서 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인 11절까지는 이 세가지 주제를 다 포함하고 있고 야고보서에서 이 주제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한 도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본문을 자세히 살피겠습니다. 먼저 1절은 인사의 말입니다. 여기서 서신을 쓰는 야고보는 우리가 종전에 살폈던 유다서의 저자와 같이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보면 일찍 순교하는 걸로 등장하고 예수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매우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행 12:17, 행 15:12-21). 그는 예수님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는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요 7:5). 그러나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주의 제자가 된 것 같습니다(고전 15:7).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바울을 만나기도 했고(갈 1:19) 바울에게 선교보고를 받기도 하고(행 21:18-19), 바울과 바나바와 교제의 악수를 나누기도 했습니다(갈 2:9, 12).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끄는 중추적인 지도자이자 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 서신의 저자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자신을 소개할 때, 사도라 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친형제였던 유다는 서신을 쓰면서 자신을 교회의 '장로'라고 소개한 것과 달리 우리가 앞서 살핀 것처럼 교회에 유명하고 유력한 지도자였음에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의 직분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소개합니다. 

'흩어져 있는'는 전문 용어입니다.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로 흩어져 사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신약에 의하면 먼저 유대인에게 전파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기회가 되면 제가 따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처럼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당시 흩어져 사는 유대인으로서 복음으로 개종하고 주님께 돌아온 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회당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 머리에 하나님과 '주' 예수에 사용된 '주'라는 칭호는 이 서신의 수신자가 앞서 설명드린데로 그리스도인들임을 보여줍니다. 이 칭호는 예수님과 관련하여서 2:1에 다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나머지 다른 경우들은 성부 아버지를 일컬을 때 사용되었습니다(1:7, 3:9, 4:10, 15, 5:4, 10, 11). 성부 아버지의 그리스도 우리 주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없지만 성경 곳곳에 있는 증거는 이 교리를 절대 부인할 수 없게 합니다. 현대 예배의 가장 문제점은 바로 이 삼위일체 신앙에 대한 고백이 거의 사라지거나 자취 정도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J.I. 패커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과 진노에 대해서는 생략해버렸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가 열심을 내어 가르치는 것보다 그가 가르치지 않는 것에서 거짓 선지자를 분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 교회의 삼위일체 신앙이 희미해지는 것 특히 성부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와 죄에 대한 그의 진노가 생략되는 현상은 우려할 만합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삼위일체에 제 2 위격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를 보내시는 성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고히 합시다. 그럼 차례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시험은 기쁨을 낳는다 : 인내의 주제(2-4)
야고보서 전체는 이 세가지의 주제로 전개 됩니다. 시험의 인내, 기도를 통해 얻는 지혜, 가난과 긍휼을 행하는 복 그 중에서도 2-4절은 시험에서 인내해야 함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사실 누가 시험이 기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인간의 자연적 사고 속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시련만을 보고 기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인내의 열매를 생각하면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것은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험과 믿음, 인내와 기쁨은 로마서 5:3-5과 벧전 1:6-7, 4:12-13절에서도 한 데 묶어져 있습니다. 다른 본문들은 미래의 삶에 대한 기쁨이 현재의 한난으로 말미암아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야고보서는 믿음이 온전히 되는 것에 대한 기쁨을 말합니다. 오늘 이 본문도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강조점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자신의 참됨을 확증하는 기회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시련은 환영할 만합니다. 이것을 영적 사고 방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와 같이 시련을 만났을 때에도 시련이나 어려움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련이 가져다 줄 인내라는 열매와 그것이 온전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온전하여 집니다. 참된 믿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인내하게 되고 그 결과 믿음의 결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3.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음 : 참 지혜의 본질(지혜의 주제) (5-8)
5-8절은 지혜를 위하여 기도하는 주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채워 주십니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 합니다. 앞선 주제가 시련이 믿음을 인내로 온전케 하는 것이라면 이 주제는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우리의 지혜를 온전케 함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에 공통점이라면 역시 온전함입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아무 것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신실한 마음으로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지혜를 구할 때, 우리는 지혜에서 온전하여 짐에 대해서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온전케 되는 지혜를 위해서 구하고 있습니까? 

4.가난과 복 : 부자와 가난한 자(9-11)
재물에 대해서는 평균케 아는 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는 높음을 자랑하고 높은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높고 낮음이란 재물의 많고 적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이것들은 풀의 꽃과 같아서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면 말리지고 아름다움이 없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한 자가 행하는 모든 것도 이와 같이 쇠잔하여 짐으로 부한 자는 뒤에 다시 나오겠지만 긍휼을 베풂으로 낮아짐을 가난한 자는 자신이 믿음안에서 받은 믿음의 부요함에 대해서 자랑해야 하고 부한 자는 지상의 모든 재물이 덧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낮아짐을 고백해야합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의 지혜 있는 세 가지 모양입니다. 내게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나는 가난하다고 너무 기죽어 있지는 않습니까? 부요하다고 오만하고 방자히 행하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