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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수의 강해설교/야고보서강해

차별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따라 긍휼로 이기라(약 2:1-13)

차별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따라 긍휼로 이기라(약 2:1-13) 

노승수 목사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전체적으로: C" : 가난과 긍휼 베품(2:1-26) : 믿기와 행하기_가난한 자와 부자(2:1-13)
우리가 어제 살폈던 1:26-27에 나타난 참된 경건에 대한 구체적 실례이며 야고보서의 핵심적 세가지 주제 중에 부자와 가난한 자에 관한 참된 믿음 곧 가난한 자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일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이에 앞서 가난한 자에대한 경건한 자의 내면적 태도를 다룹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외모는 이들의 재산의 유무 정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학벌, 말 그대로 외모(성형 열풍), 재산, 출신 지역, 등등의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참된 표지는 바로 이런 우리 내면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출발합니다. 경건은 이처럼 외형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의 열심 있는 기도생활이라든지, 말씀에 대한 열정이라든지, 교회에 대한 충성도와 같은 것으로 평가되어지지 않고 도리어 우리 주변의 작은 자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그의 내면적 태도에 의해서 결정되어집니다. 대개 아첨을 하며 외식하는 자들의 아첨에 의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눈이 가리웁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에게 잘하면 의례 다른 사람에게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이런 문제를 잘 살펴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그가 내게 잘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특히 교회에서 약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를 평소 유심히 살피고 이런 태도 가운데 경건이 베여 있는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교회도 청교도 시대가 스펄전 시대에 이르러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던 것처럼 '내리막 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펄전의 교회가 얼마나 부흥을 했습니까? 아시다시피 그러나 스펄전은 그 시대를 내리막길로 진단했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그와 같은 교회가 있으니... 나만 괜찮으면 된다. 이런 태도가 바로 비경건적 태도입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본문을 차근히 살피겠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치 않으신다.(1-4)

야고보 사도는 형제들을 간곡한 말로 권면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다면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드린대로 경건의 일차적 표지입니다. 예배당에 부자나 좋은 옷을 입은 자가 들어 올 때는 좋은 자리를 권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섰든지 내 발등상에 앉으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의 지위가 교회의 지위가 되어 버립니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사람들이 오면 대접을 하고 가난한 교인이 오면 인사도 안시킵니다. 참 씁쓸한 이야기인데요. 전도를 하다보면, 불신자들 중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나갈께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대접 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몇차례 교회 문턱을 기웃거렸던 그도 느꼈던 것이지요. 참 슬픈 현실입니다. 교회에서 장로가 되려면 돈이 많거나 교수, 의사, 변호사 같은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장로가 과연 그런 자리입니까? 우리 명예를 뽐내기 위한 자리입니까?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일에 대해서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고 반문 합니다. 뭐라고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한다고 합니다. 거기에 어떤 경건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니 인정상 그럴 수 있다? 천만에요. 성경은 이것을 악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나는 주의 지체들을 그들이 가진 재물이나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의 정도로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악한 생각입니다. 회개합시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주님에 대해서 '영광의 주'라고 언급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귀 치호인데 고린도 전서 2:8절에서도 예수께 붙여졌습니다. 이 칭호의 의미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올리우신 주님으로서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에서의 '영광'의 용법에 대해 여러 차례 강조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영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연관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를 일컬어 영광의 순간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엔 수욕과 수치의 순간이 바로 영광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안목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이 영광의 주라면 우리 역시 그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 곧 세속적 영광을 취하는 일을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수치와 수욕의 길을 가셨는데 우리는 교회에서 외적 아름다움을 취하면서 나를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를 일컬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고 하셨습니다. 주를 따른 다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입니다. 나는 나의 외적인 것들을 부인하고 있습니까? 

2. 긍휼로 이기고 자랑하라(5-13)

야고보는 다시 한 번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엄하지만 사랑을 가지고 권면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에 대해서 기억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으로 부요케 하시며 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나라를 유업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케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도리어 이 가난한 자들을 괄시하였습니다. 부자는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갔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훼방하건만 부자 편을 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신분에 있든지 괄시함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 가장 큰 미덕은 그가 온전히 중생한 사람인가? 거듭난 사람인가? 이어야지 그 외에 어떤 기준도 우리를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 편에 서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사적 이를 탐하는 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참으로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하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어서 성경이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율법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이 법이 최고의 법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지만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당신을 범죄자로 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범법자가 됩니다. 마치 몸에 좋은 보약에 온갖 좋은 재료를 다 넣더라도 마지막에 '비상'이라는 독약을 넣으면 더 이상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모든 죄는 다 치명적입니다. 거기에는 경중이 없습니다. 십계명의 두 계명을 들어 이 내용을 설명합니다. 간음은 안 했더라도 살인을 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를 얽어 매기 위한 율법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 처럼 말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은 1:25절에서 이미 한 번 설명드린대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 받음에 관한 구원의 소식임으로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란 복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하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복음 안에 있기 때문에 율법의 조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언하는 대로 이 율법은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곧 심비에 새긴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는 자에게 긍휼의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조항은 이제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긍휼 곧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긍휼로 행하는 자는 긍휼의 심판으로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긍휼 곧 사랑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누가 야고보서를 율법이나 구약적 책이라고 합니까? 신약에서 가장 복음적인 책입니다. 나는 이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