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약 1:19-27)
노승수 목사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1. B' : 순전한 말과 분을 냄 : 말과 혀 사용(19-21)
5-8절에서 이미 한 번 설명된 주제 곧 '기도를 통해 지혜를 얻음'이란 주제가 반복됩니다. 기도를 어떤 심리학자는 'Primary speech'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말과 혀의 사용이란 주제를 가지고 있고 기도 역시 말과 혀를 사용하여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방식임으로 어떤 점에서 기도의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 따로 삶 따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는 말을 많이하거나 소리를 높이 지르거나 하는데 있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듣는데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우리는 매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드리지만 그것은 공허한 기도문에 불과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기도를 배우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은 주기도문이고 내가 드리는 기도는 내가 드리는 기도가 되어 버립니다. 이 땅에서의 순전하게 말과 혀를 사용하는 문제는 단순히 말과 혀를 사용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의 기도 생활 전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사람을 폐쇄시킵니다. 경직되게 하며, 이성적이지 못하게 하며, 마음을 굳어 지게 하여서 하나님께 듣지 않게 하고 자신의 혈기를 따라 결정하게 합니다. 화가 나면 합리적인 대화나 타협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분노의 속성은 충분히 듣고 사태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기 전에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습관입니다. '화'라고 해서 막 소리를 지르고 성질을 내는 것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가 났을 때, 전혀 말을 하지 않기도 합니다.서로 부부임에도 석달을 넘게 말하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있다면 이것은 화를 내고 있는 것이지요. 단지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 뿐이지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란 우리가 표현하는 외형적 태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과 심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에 반하여 온유함은 새롭게 하는 말씀이 작용할 자리를 터놓습니다. 그것이 21절의 표현입니다. 온유함은 말씀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우리의 심성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행하는 자가 되도록 작용하며 종말의 심판 때에 그 사람을 구원받게 합니다 본문의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에서 영혼은 여기서 구약적 의미에서 생명 또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뜻합니다. 또한 '마음의 심긴 도'에서 도 즉, 말씀 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인에게 심어진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 세례는 교회가 행하는 공식적 세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중생의 씻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제 살핀대로 18절에 '첫 열매'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두 번째 창조 곧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믿음에 의한 연합 곧 세례를 암시합니다. 디도서 3:5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21절의 권고는 바울의 권면과 일치합니다. 바울은 세례 때에 받은 "새 사람" 또는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고 권면하는데(롬13:12-14; 엡4:22-24; 골3:8-12)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전반부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은 19절의 '성내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할 때, 결국 성내기는 하나님의 의 곧 말씀을 결실치 못하게 한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앞서 제가 '화'가 성질을 부리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우리 마음의 근본적 태도를 일컫는 말이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지 않더라도 그 마음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분노하고 있다면 말씀이 결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0절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를 분노를 억압하는 문화에 속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분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화를 내고 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느끼고 있는데 정작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성내는 것이 내면화 되면 그 안에 말씀은 전혀 결실할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 안에 내재한 분노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요? 여러분 기억하셔야 할 것은 성령은 '사랑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가 증거하는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사랑'이 부어진다고 했습니다(롬 5:5). 성냄이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성령의 지배력이 없거나 약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분노는 본질적으로 책임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마음에서 성령의 지배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지배력이 강화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찢는 회개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즉, 기도 외에 이른 류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고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분노가 있습니까? 마음을 찢으십시오.
2. C' : 순종은 긍휼을 베푼다 : 듣기와 행하기(22-25)
앞선 본문에서도 설명드렸다시피 화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속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행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도를 온유한 심령으로 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하거나 그것이 억압되어 있으면 그 마음은 경직되고 실제로 도를 행할 능력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제로 준행하기 어려운 이유들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도 가장 핵심적이며 우리으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성내기'라는 점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한 이 '적개심'을 해결해야 합니다.
이 도를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에 비유합니다. 말씀은 바로 우리 심령의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데 적용되거나 다른 문제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데만 적용되고 있다면 우리는 분노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서 분출하려는 욕구를 가지며 자신이 분출해도 좋을 명분이 분명한 상황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편견은 개선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강화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보통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난장판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란 정책을 정하는 매우 합리적인 과정입니다. 실제로 그래야구요. 그런데 사실 정치와 관련된 지지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인물의 잘못에 대해서는 보지 않으려는 경향을 경쟁자의 잘못에 대해서는 침소봉대하는 경향을 가집니다. 정치는 합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치적 인종적 사회적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 이유는 바로 우리 마음 속의 적개심이 끊임없이 자기 정당화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얼마전 나영이 사건의 범인 조두순이 목사라는 루머가 돌았습니다. 그걸 모 일간지는 기사로 게재했구요. 왜 이런 소문이 생겨날까요? 근본적으로 교회에 대한 적개심을 분출하기 위한 명분과 정당화 과정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사건이 생기면 실제 두 사건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인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건이 적개심을 매개로 자연스레 연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밝히 보여주는 영혼의 거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성내기'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도 금방 잊어버리게 만들며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게 만들며 자신의 잘못은 받아들이지 않게 만듭니다.
25절은 율법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우리로 영적 자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분노는 그 말씀을 금방 잊어버리게 합니다. 자유란 무엇입니까? 매인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미워하면 미워하는 대상에 매이게 됩니다. 용서는 그래서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게 되면 자유를 얻게 되고 뿐 만 아니라 복을 받게 됩니다. 나는 내 감정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합니까?
3. X :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 : 전환점 : 참된 경건(26-27)
26-27절은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를 보여줍니다. 참된 경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거나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을 갖는다면 그는 응당 앞서 말씀드린대로 자유하게 하는 율법에 의해 영적 자유를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를 경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과 혀의 사용에 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 역시 같은 내용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화내는 것을 더디하고 말하기도 더디하고 듣기를 속히하라는 권면을 우리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사람의 경건이 참된 경건이 되려면 혀를 재갈 먹여야 하고 자기 마음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는 것이지요. 앞서 설명드린대로 분노는 단지 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결국 본질은 마음이 시키는대로 사느냐? 아니면 혀를 재갈 먹이고 마음을 속이지 않음으로 말씀이 다스리는데로 사느냐? 하는 두 가지 문제로 귀결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외형적인 모양 기도와 말씀, 예배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경건은 외형적 태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자세 곧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참되고 신실하고자 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7절은 경건을 가난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세속주의가 들어와 있는지요. 차마 눈뜨고 보기가 힘이 듭니다. 경건은 바로 이와 같은 세속주의로부터 자신을 성별하여 지키는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분노를 다스리고 온유한 심령으로 마음에 심긴 도를 행하면 그것이 마음에서 자라게 되고 그 결실이 가난한 자와 사회적 소수 곧 이 사회속의 작은 예수를 섬기는 일이 되고 그런 자는 그들을 섬긴다고 해서 결코 섬긴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세속에 물들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말씀 앞에서 신실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런 경건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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