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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어거스틴과 근대

어거스틴이 말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를 데카르트가 오마쥬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말했다. 어거스틴의 표현은 내면의 마음만이 계시의 빛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간직할 수 있다는 의미다. 데카르트 역시 명석판명한 진리의 기초를 놓기 원했으나 계시의 빛을 소거한 채 자아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것이 근대의 출발이었다. 그래서 근대의 철학을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근대는 결국 진리를 대상화함으로 길을 잃어버렸다. 실존주의자들의 성찰은 이런 지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칼뱅이 하나님과 나를 아는 지식을 인식론의 기초로 놓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나 근대가 만들어 낼 문제 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사실 데카르트에 정통했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는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철학의 원리`를 해설한 것이었다. 사실 데카르트의 시도는 자연철학 혹은 자연신학의 재구성이었다. 계시가 제거된 세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그 기초를 자아에서 출발해서 신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형이상학을 확장했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욕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Desidero, ergo sum)’라고 했다. 그에게서 존재를 지속시키려는 힘은 육체와 영혼을 합치시키는 성향으로 드러난다(conatus). 이 영혼과 육체 역시 일종의 힘이며 이 힘은 욕망이다. 욕망이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 그리고 이 욕망은 타자에 의존한다.

욕동 이론의 조상은 아리스토텔레스라 할 수 있고 스피노자는 중조 즘 된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그것을 마침내 우리 무의식에 적용했다. 사실 스피노자의 욕동 역시 무의식적 측면이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내가 의식이라면 스피노자의 Conatus는 무의식이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철학적 무의식이라면 프로이트에게 보면 이 무의식을 임상으로 드러내었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이 성찰은 칼뱅의 나를 아는 지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물론 그에게도 한계란 있다. 계시가 소거된 근대의 체계는 결국 자아 안에 갇히고 말기 때문이다. 아마도 칼뱅의 인식론은 어거스틴의 인식론의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욕구) 이론의 기원을 추적해 올라가면 어거스틴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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