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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언약과 순종

죄는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아담의 최초의 죄를 예로 들자면 아래와 같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의 범죄

2. 범죄로 인한 형벌인 죽음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속이 1의 죄를 사하지 않고 2의 죄만 사한다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의 이유는 바로 보속 교리 때문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라틴 벌게잌 성경에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번역되어 있다.

 

고해를 하면 사제는 곧바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속을 명하는데 우리가 아는 가장 대표적인 보속 중 하나가 바로 면죄부 판매다. 면죄부 외에도 고행이나 금식 등등의 행위를 통해서 원죄와 자범죄의 행위의 범죄를 스스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댓가를 치르고 나면 사제가 사죄의 선언을 함으로 사죄가 이뤄진다.

 

이미 눈치 챈 분들도 있겠지만 아 가톨릭 교리가 지닌 함의는 2가지다.

 

1. 위의 언급한 1과 2의 죄값을 모두 치러야 사죄가 이뤄진다.

2. 그리스도의 대속은 2에 대해서는 이뤄지지만 1은 자기가 지불해야 한다.

 

아담으로부터 유전한 원죄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범죄 역시 속죄를 위해서는 2가지를 보상하는 것이 자연스런 원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기서 1을 우리가 스스로 치러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구원의 공로에 해당한다면 행위구원론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에서 이미 명백하게 정리가 된 적이 있다. 펠라기우스에 대항해서 어거스틴이 주장한 것이 바로 "원죄" 교리다. 어거스틴이 정리했고 그에게 기원이 있었던 원죄는 "원의의 상실"과 앞서 설명한 두 가지의 "죄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세로 들어서면서 변질이 발생하게 되는데 3가지 지점에서 그렇다.

 

1. 우리가 믿을 때, "원의의 주입"이 일어난다고 말했고 이 주입은 우리의 상태를 아담과 같은 상태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종교개혁 이전 시기의 타락은 "본성의 부패" 개념이 모호하고 단지 "원의의 부재"로 설명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2. 그렇게 주입된 원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며 이 때 대속은 앞서 설명한 죄의 두 가지 요소 중 2에 해당하는 것, 곧 십자가에서 우리 죽음을 대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3. 가톨릭은 믿음이 은혜로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가 주입되어서 우리 상태가 의를 행할 수 있는 상태라고 가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죽음은 대속했지만 우리 행위는 대속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주입된 의로서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갚아야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어거스틴 때에 정죄되었던 펠라기우스는 종교개혁 직전에도 정죄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은 아무도 은혜와 믿음이 아니고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핀 3가지 변질을 통해서 행위구원론이 부활했는데 머리는 은혜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몸통은 행위의 모양을 하고 있는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라는 변종이 발생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3가지고 대응을 했다.

 

1. 타락을 단지 "원의의 부재"가 아니라 의를 행할 수 없는 "무능력" 개념을 동원해서 우리 본성의 오염과 타락을 설명했다.

2. 의의 주입이 문제되었으므로 의는 주입되지 않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만 남아 있으며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전가"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3. 우리가 행위로 보속해서 갚아야 하는 범죄의 2가지 구성 중 1, 곧 행위의 범죄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공생애 전체의 기간 동안 율법에 순종하시고 그것을 전가 시켰다고 설명했다.

 

이 3가지 조치는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의 통해서 부활한 행위구원론을 봉쇄하는 종교개혁 신학의 key와 같다.

 

그리고 이 3에 해당하는 인간의 죄책에 대응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개념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1. 원죄와 자범죄의 행위의 범죄 vs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2. 범죄에 따른 죽음의 형벌 vs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종교개혁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 핵심적인 key로 작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순화해서 설명하자면 아담의 원죄와 우리 자신의 자범죄에서 우리 범죄의 행위와 그에 따른 형벌 모두를 그리스도가 대속했다는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의 전개 개념이다.

 

그리고 능동과 수동은 이해를 위한 개념이지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개념(槪念)의 개(槪)는 쌀을 계량하는 되를 평평하게 밀어내는 평미레(槩)를 음차해서 호환해서 쓰는 말이다. 어차피 신학 개념은 모두 해석을 위한 장치다. 그런데 어떤 무식한 자들은 이걸 두고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분리했다고 하지도 않은 말들을 지어낸다. 이 개념들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학은 개발에 편자 같은 게 되고 만다. 애초에 신학은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종합적으로 해석해내는 사고와 그것을 통해 원형신학이신 그리스도께 가까워져 가는게 그 목적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하나의 함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의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언약개념을 함축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와 그에 따른 형벌은 그 자체가 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무엇인가 형벌을 가하려면 거기에 법적 조항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언약사상이 그 기원이며 계몽시대의 사회계약론은 바로 이 사상의 확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언약 개념은 종교개혁자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거스틴으로 소급되는데, 원죄 개념자체가 언약개념을 함축한다. 원죄란 그와같은 죄를 범하지 않은 후세대에게 동일한 형태의 형벌 곧 생명을 값으로 요구하는 죽음을 댓가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위 언약은 종교개혁자들이 만든 용어가 아니라 어거스틴에게서 등장한 용어다.

 

그러므로 언약 신학을 부정하거나 그 언약의 실질적인 성취로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의 전가를 부정하는 신학은 적어도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일 수 없으며 어거스틴 전통은 더더욱 아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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