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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목회칼럼

행위언약과 죄 문제

전통신학은 아담의 최초의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를 2가지로 나눕니다. 여기서는 최초의 죄를 예시로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행위의 죄
2. 그에 따라 언약에 기초해 사망에 이르는 형벌

로마 가톨릭은 위 2가지 죄 중에서 2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16세기 문맥이 아니라 21세기 현재 상황입니다. 16세기는 더 까다롭고 엄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짓는 죄 역시 위의 2가지 유형의 죄와 그 형벌이 따릅니다. 즉, 자범죄에 대해서도 사망에 이르는 형벌을 사해주지만 우리 행위의 잘못은 스스로 갚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죠.

다시말해서 1은 보속교리를 통해서 우리가 직접 치러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못 치르면 아시는대로 연옥에 가죠.

이것을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면, 아담이 상실했던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를 그리스도가 성취하셨는데 그걸 우리에게 "주입"해주셨기 때문에 그 주입된 의로 우리는 범죄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와 유사해졌고 그 능력으로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갚아야 하는 걸 제대로 못 갚으면 가는 곳이 바로 연옥입니다. 연옥 교리는 중간 상태 교리의 변형인데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함의합니다.

1. 지옥에 갈만큼 중죄인이 아니다.
2. 노력 여하에 따라 천국에 갈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 노력은 후손들의 공덕입니다. 기도나 보속, 고행, 면죄부도 여기에 해당하죠. 특히 면죄부 때문에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교리가 함의하는 바가 뭐겠습니까? 3가지 사실을 함의합니다.

1. 그리스도가 치른 대속은 최초의 죄와 우리 자범죄 중에서 죄 구분의 2번만 치렀다.
2. 그리스도가 치르지 않은 1번이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다.
3. 대속 공로를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구원 얻기 위해서 스스로 능동적 순종의 공로를 취득해야 천국간다. 아니면 다 연옥행이다.

이 때문에 펠라기우스와 논쟁 끝에 결론이 나버린 행위구원론이 변형된 형태로 부활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절반의 펠라기우스주의라고도 하구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어도 세가지 이해가 수정되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가 치르지 않았다고 주장되는 최초의 죄에서 아담의 구체적 불순종의 행위와 우리 자범죄에서 구체적인 불순종의 죄에 대해서 그리스도가 순종의 공로를 치렀다고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서 5장에서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얻으신 의로 석의할 수 있다.
2. 그리스도가 치렀다고 주장된 대속적 공로가 우리 안에 "주입"된다는 교리를 철폐해야 한다. 주입되었다고 생각하니 우리가 기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WCF 10장 칭의편 1절에서 명시적으로 "주입"이 아니라 순종의 의의 "전가"라고 설명한다.
3. 마지막으로 중세적 타락 이해의 교정인데 어거스틴도 아퀴나스도 타락을 단지 "원의의 부재"로 이해했다. 즉, 원의가 주입되면 우리가 순종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상태로 이해한 것이다. 이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시편 51, 로마서 3장 등의 석의를 통해서 "전적 부패" 교리를 이끌어내었다.

요약하면,

1. 대속적 형벌로 사망의 죄값만 치르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해 로마 가톨릭이 부정하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구원의 공덕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2. 그리스도가 이루신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구원의 공덕은 우리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우리는 단지 우리 것으로 여김받는 것, 곧 "전가" 받는다.
3. 펠라기우스주의가 부활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였던 우리 본성이 단지 원의의 부재로 하등한 상태에만 놓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부패한 상태곧 우리 존재의 모든 범위가 부패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공로를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력의 상태로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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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언약을 부정하는 것, 즉 언약의 율법적인 요소를 거부하는 일반적인 시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성을 뒤틀려는 견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교리도 바꾸려는 이론이며 나아가 전통적인 개혁주의 입장에 미달하는 어떤 신학을 만들려는 것임을 빗치우스와 브라클은 잘 알고 있었다. ... 구속의 성취는 율법과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만족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선물은 믿는 자들을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동시에 그 구원은 율법의 요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등은 여전히 동일하게 남아 있다. 한 언약에서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 다른 언약 안에서는 율법의 견고성과 연관되고, 반면 다른 용도로 쓰이지만 두 언약 안에 율법이 동시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적인 본성의 불변성과 신적인 약속의 일관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 리차드 멀러, <칼빈 이후 개혁신학>, 462-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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