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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어거스틴의 윤리사상 속에 나타난 사랑(caritas)개념

I. 들어가는 글


1.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차이날 수 있으나,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력의 크기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한다. 워거만(Philip J. Wogaman)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 명의 신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다른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어거스틴을 포함시키지 않을 사람을 없을" 것이다. 이 어거스틴의 저술을 읽는 것은 마치 우리들 자신의 지적, 영적 선조를 발견하는 것과 같다. 윌리엄스(Daniel D. Williams)에 의하면 4세기에 서구 문명에 여러 세기 동안의 문명을 인도하며 형성시킬 사상을 제공한 인물이 어거스틴이었다. 서구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일련의 각주라고 한 화이트헤드의 말을 수긍한다면, 마찬가지로 "서구 기독교 신학은 어거스틴의 일련의 각주"라고 말할 수 있다.

2. 이러한 평가는 그의 윤리 사상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의 윤리 사상은 이후 서구 기독교 신학에서 윤리학이 하나의 독립된 분야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해준 선구적인 업적이었다. 어거스틴의 윤리학은 본질상 그의 신학 및 철학과 분리시킬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 영혼의 지향성(intentio)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Battenhouse, 371). 그런데 어거스틴에 대한 연구 자료가 방대함에 비해, 그의 윤리 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단 한 권의 전문적인 윤리학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윤리 사상은 그의 다양한 저서들 속에서 추적하여 재구성해야 한다. 그의 초기 윤리 사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가톨릭 교회의 도덕』(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388/389)도 실제로는 본격적인 윤리학 저서가 아니라 마니교도들의 비방에 대항하여 정통 교회를 옹호하려 했던 기독교 변증서였다. 또한, 그의 모든 신학 사상이 그렇듯이 그의 윤리 사상 역시 그때그때 교회정치적, 신학적인 도전에 대한 응전의 형태로서 개진되었기 때문에 하나의 고정된 신학 체계를 보여주지 않고 꾸준히 변화를 거쳐왔다. 우리는 이같은 관점에서 그의 윤리 사상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어거스틴의 사랑(caritas) 개념은 그의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교의학, 윤리학, 성서학 및 영성신학 전체를 포괄한다. 특히 그의 윤리학은 사랑의 윤리학이라고 칭해지고 있다.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이 특별히 주목받게 된 것은 스웨덴의 루터교 신학자인 안데르스 니그렌의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가 1939년 영어로 완역되면서부터였다. 본서에서 니그렌은 고대인의 사랑 개념을 헬라인들의 에로스, 유대인들의 노모스 및 신약성경의 아가페의 세 가지 유형으로 대별하고 특히 에로스와 아가페의 양대 사랑 유형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종교개혁 시대까지 내려왔는지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루어진 인물이 어거스틴이다(Nygren, 449-562). 저자에 의하면 어거스틴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적인 에로스 개념에 입각하고 여기에 신약적인 아가페 개념을 가미하여 하나의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루었는데, 그것이 그의 카리타스 개념이라는 것이다(Ibid., 449-452). 이것은 상당히 어렵고 논쟁적인 문제이지만, 1940대 이래로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에 대한 기독교계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필자는 본 리포트에서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을 그의 신학적 윤리학의 틀 안에서 정리하고, 니그렌의 학설 및 그에 대한 쟁점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II. 어거스틴 윤리 사상의 발전 과정


1. 어거스틴의 윤리와 관련하여 본다면 388년이 획기적인 해라고 볼 수 있다. 동년에 어거스틴은 윤리학에 관련된 두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자유의지론』(On Free Will, 388/395)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기(前記)한 『가톨릭 교회의 도덕』이었다. 전자는 마니교의 도덕적 결정론에 반박하여 인간 의지의 자유 및 책임을 주장한다. 후자는 역시 마니교의 금욕주의에 반대하면서 인간을 덕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금욕 여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와 그 사랑의 방향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Babcock, 12-13). 전자는 인간 윤리에서 의지의 작용을, 후자는 사랑의 문제를 다룬 점에서 의미를 갖는데, 그의 후기 사상은 이러한 주제들의 확대, 심화였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자유의지와 사랑은 그의 윤리학의 원리들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양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하나이다.

2. 카니(F.S. Carney)는 그의 논문 "아우구스티누스 윤리의 구조"(The Structure of Augustine's Ethics)에서 어거스틴의 윤리 사상을 3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어거스틴의 윤리는 처음부터 특별히 완성된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생애 말기의 20년 사이에 점차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거스틴의 윤리 사상을 가치(value), 덕(virtue), 의무(obligation)라는 윤리학의 3대 주제로 나누어 그 변천 과정을 관찰하고 있다(Babcock, 11-37). 그의 초기 윤리학에 해당하는 저서로는 『자유의지론』(On Free Will, 388/395), 『가톨릭 교회의 도덕』 및 『선의 본성에 관하여』(The Nature of the Good, 399)를 들 수 있다. 중간기(전이기)의 윤리적 저서로는 『참된 종교(True Religion, 390/391)』, 『거짓말에 관하여』(On Lying, 394/395)를 들 수 있다. 후기(원숙기)의 윤리적 저서로는 『신앙핸드북』(Handbook on Faith, Hope, Love, 421/422), 『거짓말반대론』(Against Lying, 420),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 413/427),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00/428)을 들 수 있다. 이 책들은 그의 연대기적 저작 순서와 대체로 일치한다.

3. 첫번째 부류의 책들은 마니교와의 논쟁의 산물인데, 가치와 덕에 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지만 의무에 대해서는 드물게 단편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도덕』은 인간의 최고선(hominis optimum)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은 행복해지길 원하며, 이 행복에 도달하는 게 최고선이다(Morals, 3.4). 이 최고선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소유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인데, 그것은 신밖에 없으며, 따라서 신을 소유하고 사랑하는 삶이 참된 행복이다(6.10; 11.18). 이같이 해서 어거스틴은 행복에 관한 가치론적 작업을 수행했다. 인간이 지향할 최고 가치는 신이다. 덕이란 이 신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름 아니다(15.25). 사랑을 통해 인간은 신에게로 동화된다(13.23). 그는 고전적 4주덕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 4주덕은 하나님 사랑의 4가지 양태에 불과한 것이다.

4. 『자유의지론』의 주제는 악의 원인에 대한 것인데, 악은 인간의 선택의 자유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인간은 의지의 능력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추구하고 획득할 수 있다(Free Will, 1.12.26). 즉, 의지는 일시적, 가멸적(可滅的)인 것을 영원한 것에 종속시킬 능력이 있다. 덕은 이같이 일시적, 가멸적인 것을 영원한 것에 종속시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스스로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은 법이 필요없다(1.15.31). 『선의 본성에 관하여』에서는 모든 존재는 선하며, 타락하는 경우도 단지 선의 정도가 감소하는 것뿐이라고 설명한다(Nature of the Good, 3, 4). 선의 정도는 존재의 가치 등급을 결정하며, 덕은 더 나은 선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다. 저급한 선을 위해 고급한 선을 버리는 것이 악덕이다(20). 그러므로 인간의 윤리는 두 가치 사이에서 의지의 선택인 것이다(35). 이상 초기의 작품들에서 그의 윤리 사상은 주로 가치와 덕의 주제에 머문다. 그리고 덕이란 보다 고차원적인 가치를 선택하는 것이다(본질상 신플라톤주의적이다). 이에 비해 의무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 시기의 그의 윤리 사상을 총괄할만한 원리를 찾는다면, 신에 대한 사랑(caritas)을 들 수 있다(Babcock, 12-16).

5. 전이기의 작품들에서는 의무에 대한 논의가 점차 분명하게 다루어진다. 이것은 선을 향한 인간의 자연적 갈망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후퇴하여 힘써 선을 향하도록 명령하는 권위있는 신적 안내를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신앙 초기에 가졌던 자신감에서 후퇴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Babcock, 20). 전이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같은 특징은 후기의 작품들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특히 그의 『신앙핸드북』, 『하나님의 도성』, 『삼위일체론』은 윤리학의 3대 주제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신앙핸드북』의 앞부분에서는 육체보다는 영혼을 지향하고, 나아가 영혼을 초월하는 신을 지향하도록 논하다가 진리와 허위의 문제로 옮겨가며, 뒤이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의무론적 진술로 이어진다(Handbook, 6.18). 인간은 진리를 정확히 표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진리 자체가 영혼의 생명이다(5.17). 올바른 신념은 올바른 행위와 결합되어 덕을 구성하게 된다. 『하나님의 도성』에서는 영혼을 좇아, 신을 좇아 순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진정한 덕으로 정의한다(City of God, 14.1-6, 9). 지상 도성에 속한 무리들에게도 잠정적인 덕이 있지만 이것은 인간을 자랑하기 위해 사용되며, 진정한 덕이 아니다(5.19). 참된 덕은 신의 도성에 대한 근본적인 헌신인 것이다. 아담이 금지된 과실을 먹은 사건은 원죄의 기원이 되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실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신이 금지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이 신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는 한, 그것은(무엇이든) 악하고 해롭다(14.14). 이것은 정사(正邪)의 결정 기준이 신의 의지 여하에 달려 있음을 뜻한다.(Babcock, 22-26).

6. 카니는 여기서 어거스틴의 윤리 사상을 총괄하는 원리에 대해, 초기부터 거론된 사랑의 원리와 함께 진리의 원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신에 대한 참된 경배가 없이는 참으로 덕스러워질 수 없다"(CG., 5.19)라는 말에서 보듯이, 덕에 대한 인지적(認知的) 기초가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을 덕이라고 간주하기 곤란하다. 이는 가치, 의무의 경우에도 역시 해당된다. 이는 그의 중간기 저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진리 자체가 영혼의 생명이다(Handbook, 5.17). 인간은 진리 안에 굳게 서서 신의 진리를 말해야 한다(CG., 14.4). 진리는 인식과 의사소통의 기준인 동시에 인간의 의지 설정을 위한 기준이다. 그것은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주며, 그 사랑이 가능하게 해준다(Trinity, 10.1). 인간은 스스로  잘 이해할 수 있는 신을 보다 더 열렬히 사랑할 수 있다. 동시에, 신을 열렬히 사랑할수록 더 분명히 신을 알게 된다(Ibid., 8.9.13). 이처럼 진리와 사랑은 서로 호환적이다(Babcock, 28-29).

7. 『삼위일체론』 8-14권에서는 삼위일체를 하나의 세트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매권마다 정형화시키고 있다. 신의 삼위일체성은 인간의 본성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마음과 마음이 자신을 아는 지식과 자신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의 세 가지가 일체를 이루고 있다(9권). 인간의 마음은 기억과 이해력과 의지가 일체가 되어 있다(10권). 14권에 와서는 신에 대한 회상과 지혜를 통한 신 이해와 양자에 기초한 하나님 사랑이 일체가 되어 나타난다. 여기서 "마음이 신을 사랑할 때, 그리고 그 결과 이미 본대로 신에 대한 기억과 이해가 생기는 그 때 비로소 인간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향유할 수 있다"(14.14.18). 그런데, 원죄로 타락된 마음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신을 사랑할 수 없다. 오직 성부와 그의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참된 자유의 상태(libertas)를 회복할 수 있다(14.15.21). 진리 인식이 곧바로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속에 심겨진 삼위일체적 형상을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해 진리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는 상호 연결되어 작용한다. 카니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원숙기의 윤리를 삼위일체론적 윤리라고 부르고 있다(Babcock, 30-34).

8. 이상 어거스틴의 윤리학 구조의 변화를 볼 때, 어거스틴의 윤리는 신플라톤주의적 덕 윤리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히브리적 의무론의 관점을 결합시키려 했다. 이는 그가 처음 회심한 후 가졌던 플라톤주의적 포부를 포기했음을 뜻한다. 피터 브라운에 의하면, 회심 당시의 어거스틴은 플라톤적 유산을 철저히 물려받아 이를 기독교와 결합시키면 인성(人性)의 거대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10년만에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생활을 통해서는 그같은 계획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인간의 행위에 죄악이 새로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Brown, 146-148). 인간성에 대한 이같은 새로운 인식의 결과는 의무론적 관점과 은혜의 강조로 나타났다. 여하간 그가 초기부터 자신의 윤리 사상을 관통하는 원리로서 사랑을 내세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랑은 그의 윤리 구조의 가장 중요한 실천 원리였다. 사랑과 진리의 이중기초적 윤리(double-matrix ethic)라는 카니의 이론은 윤리학에서 진리 인식을 실천과 동등하게 강조해야 한다는 의미이겠으나, 이는 너무 일반론적인 것으로서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의 특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Babcock, 35).


III.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


A.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cupiditas)의 문제


1. 어거스틴은 초기 기독교의 사랑 개념을 헬라철학의 행복주의적인 틀 위에서 새롭게 발전시켰다(Battenhouse, 372-373).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하길 원한다고 보았고, 행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Happy Life, 2.10). 이같은 행복에의 갈망이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랑은 일종의 욕구(appetitus)내지 갈망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이 그의 체험에서 얻은 결론이었다(Battenhouse, 437; Babcock, 79).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얻기까지는 쉬지 못하는데, 그 안식에 이르게 하는 최종적 목표가 신이다(Confession, 1.1). "신은 인정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유지시키는 힘이며, 의존하고 향유해야 할 살아있는 실존이다… 신을 알고 소유하면 인간은 행복을 얻는다" (Free Will, 2.9.26). 이러한 하나님 사랑이 인간을 행복에로 인도하는 참된 덕이다(Morals, 15.25).

2. 이 사랑은 인간 의지의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은 본래의 자기 자리를 향하여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인간은 마치 중력에 의해 물체가 움직이듯이 그의 사랑의 힘을 좇아 움직이고 있다. "나의 사랑이란 나의 무게입니다"(Conf., 13.9.10)라는 말은 이를 의미한다. 원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서 시간 속에 분산되고 분열된 인간은 영원자를 사랑할 때 비로소 하나로 모아져(colligare) 통합되게 된다(Conf, 2.1.1). 여기서 모은다는 것은 인식론적으로는 상기(想起)를 의미하기도 하고, 신을 지향한다(intentio)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카리타스이다. 그같이 해서 영혼이 자기 본연의 자리를 찾을 때 영혼의 질서가 회복되고 안식에 도달하게 된다(13.9.10). 그러므로, 카리타스란 최고선이신 신을 지향하는 영혼의 욕구와 운동이라 할 수 있다.

3. 인간의 의지는 도덕적으로 상승 운동을 할 뿐 아니라 하강 운동을 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사랑은 그 대상 선택에 있어서 자유롭다. 인간이 반드시 최고선을 선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때, "바르게 의지하는 것은 선한 사랑이고 잘못 의지하는 것은 악한 사랑이다"(CG, 14.7). 바르게 의지하는 사랑이 카리타스라면, 그릇되게 의지하는 사랑은 쿠피디타스에 해당한다. 이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거스틴의 존재론적인 질서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신은 피조물들을 선하게 창조했지만, 제각기 계층적으로 차이나게 지으셨다고 하였다(FW, 2.19). 이 때 존재의 질서(scale of being)에 합당하게 사랑하는 것이 카리타스라면, 질서에 역행하게 사랑하는 것이 쿠피디타스에 해당한다. 즉, 영원하신 신을 사랑하는 것이 카리타스라면 신보다 일시적, 가멸적인 세상의 것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쿠피디타스이다. 저급한 존재는 그보다 상위의 존재에 종속되어야 하는 게 창조의 질서인데, 이 질서대로 사랑하는 것이 카리타스라면 질서에 역행하는 것이 쿠피디타스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그가 어떤 사랑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B. 우티(uti)와 후루이(frui)


1. 모든 존재는 정도 차이는 있으나 본질상 선하며, 선악은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존재의 질서는 4개의 계층으로 나뉜다(Christian Doctrine, 1.23.2). 첫째는 인간의 위에 계신 하나님이다. 둘째로는 인간 자신이다. 셋째로는 자신과 동등한 차원에 있는 이웃이다. 넷째로는 인간의 아래 있는 사물들이다. 그리고 존재의 질서는 가치의 질서 즉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결정한다.

2. 우리가 존재의 질서를 좇아서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질서는 대상에 따라 향유하거나(frui) 이용하는(uti) 형태로 적용된다. 이용한다는 말은 좀더 고차원적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잠시 제한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향유한다는 말은 그것 자체를 위하여(diligere propter se) 사랑하고 탐닉하는 것이다(Doct., 1.4.4; Morals, 1.3.4). 양자는 전부 동일한 사랑이지만, 전자가 최고의 목적으로 가는 중간 수단이라면 후자는 최고의 목적에 해당한다. 최고의 목적은 최고선이신 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사랑하고 탐닉해야 하며, 심지어 우리들 자신보다도 더 사랑해야 한다(Doct., 1.3.3-5; 1.27.28). 그에 비해 다른 피조물들은 신을 사랑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제한을 두고 사랑해야 한다.


C.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신은 영원한 진리 그 자체이다. 이 신을 사랑하는 것이 카리타스인데, 전기한 우티와 흐루이의 도식에 따르면 신만이 향유의 대상이 되고, 만물이나 다른 인간들은 우티의 대상에 들게 된다. 이럴 경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복음서의 계명은 제대로 실천할 수 없다. 오직 제한적으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한시적, 수단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웃에 대해서는 우티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그는 이웃은 "하나님과 상관하여"(referre ad Deum), "하나님 때문에"(propter Deum) 향유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말은 같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진리와 선하심과 아름다우심을 계시하는 성례전적 존재로서 인정하고 향유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즐김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을 즐기듯이 인간에게 집착해서는 안된다. "사람을 믿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Doct., 1.22.20).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인간도 사랑과 향유의 대상이 되도록 함으로써 인간을 단순한 이용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비할 수 없이 더 많이"(Trinity, 8.12)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양적으로 차이를 두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질적인 차원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 요컨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 무엇과도 비견되면 안된다. 세상의 감각적인 모든 것들은 오직 생활의 요청에 따라 우티로서 사랑해야 하며(Morals, 20.39),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후루이로서 향유되지만, 그것 역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향유하기 위한 우티에 불과한 것이다.


D. 자기사랑


1. 자기사랑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계명이 아니다. 딤후 3:2에서는 이를 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신약에서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이기적인 사랑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를 마 22:37-39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과 관련지워 이해했다. 즉,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본래 자기사랑은 인간 본성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굳이 별도의 계명을 줄 필요가 없었다. 이웃사랑의 계명은 명백히 자아사랑을 긍정하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사랑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2.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기사랑은 첫째, 자연적이면서 중립적인 용어이다. 자기사랑은 본유적으로 인간들의 내면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라는 특별한 계명이 필요 없다(Doct.,1.26.27). 이같은 자기사랑의 본능을 특별히 악하다고 볼 수는 없다. 동시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완전한 행복을 갈망한다. 이것은 진정 이성적인 피조물로서 영혼의 만족을 추구하는 순수한 자기주의(pure egoism)인 것이다(Burnaby, 118). 둘째로, 그러나 자기사랑이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을 추구하고 자신이 자기 영혼의 주인이 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파멸로 끝나게 된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려는 것으로서, 교만(superbia)의 죄에 해당한다. 하나님 없는 자기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 안에 머무는 대신 자기 밖으로 내쫓기고 소외되며, 이같은 자기사랑은 자기주의라기보다 자기신화주의(自己神化主義, egotheism)라 할 수 있다(Burnaby, 121). 셋째로, 참으로 가치있는 자기사랑은 최고선이신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명예는 신의 형상이 되는 것이며, 그 본을 주시는 분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는 그 형상을 보전할 수 없다"(Trinity, 12.11.16). 그러므로, "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Ibid.). 이웃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수록, 그는 자신의 몸과 영혼을 사랑하고 선을 베푸는 것이다(Morals, 26.48; CG.,19.14). 이웃을 증오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를 증오하는 것이다(Doct., 1.23).

3. 그런데. 이같은 세 번째 자기사랑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은혜로 성령이 주어질 때에야 가능해진다. "(성령을) 하나님에게서 받지 않으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할 힘이 없다"(Trinity, 15.31). 성령은 인간의 마음에 사랑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일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성령의 내주 후에도 인간은 스스로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신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E. 쟁점-아가페와 에로스


1. 니그렌은 룬트학파 특유의 주제 연구(motif-research)의 방식으로 인간의 종교적 특성을 이루는 근본적인 종교적 성향 문제를 연구하였다(Nygren, x). 그에 의하면 각 종교는 나름대로 독특한 신앙 원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서구 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원리는 구약 유태교의 노모스(nomos)와 신약 기독교의 아가페와 헬라철학의 에로스이다. 이 세 가지 원리는 제각기 다르다. 아가페는 죄인마저 사랑하시는 신 중심의 사랑이요, 에로스는 자기완성을 위하여 최고선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적 사랑(갈망)이며, 노모스는 신 중심의 사상적 경향을 가지지만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기구원을 완성하려는 본질상 이기적인 노력이다(Ibid., 247-253). 이 중 에로스와 노모스는 본질상 자기중심의 동기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래서, 니그렌은 대표적인 종교 원리로서 아가페와 에로스를 연구한다. 아가페는 신이 값없이, 조건없이 강림하여 무가치한 인간들을 사랑하는 신적인 사랑이다. 신적 아가페에 감동된 인간들의 사랑 역시 자발적이고 무동기적인 사랑이다. 이는 신적 아가페가 먼저 내려옴으로써 일깨워지는 사랑이다. 이에 비해 에로스는 최고선인 신을 갈망하고, 추구한다. 그것은 본질상 인간의 자기사랑이다. 자기가 영적인 상승을 거쳐 신에게로 도달하는 것이다. 비록 고상한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 본질적 동기는 자신의 상승에 있다. 이웃 사랑 역시 자신의 상승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Ibid., 210-217).

2. 본래 에로스 동기가 지배했던 고대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가페 동기가 도입되고, 교회를 통해 꾸준히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러나 교회 내에도 에로스적 동기의 영향을 받아 순수한 아가페 동기를 희석, 왜곡시키는 신학자, 이단들이 생겨났는데, 주후 5세기에 와서 종교적 천재인 어거스틴에 의해 양자의 독창적인 종합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카리타스종합(caritas-synthesis)이다(Ibid., 449-452). 이는 어거스틴이 플라톤적 에로스와 원시 기독교적 아가페의 두 종교 세계의 변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리타스는 에로스도 아가페도 아니며 그 종합이지만, 그것은 나름대로 새로운 독자적 단일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 카리타스 개념이 중세 가톨릭 교회에로 답습되었는데, 루터의 종교개혁에 와서 다시금 아가페 동기가 갱신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3. 니그렌은 어거스틴의 카리타스를 행복을 향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지향하는 것으로서, 자기사랑과 이웃사랑에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아가페와 에로스가 서로 대조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양자 모두 동시에 가능한 사랑으로 여겼다는 것이다(Ibid., 472). 그래서 양자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길을 찾았는데, 곧 그가 회심 전부터 이미 가지고 있었던 플라톤적 에로스 동기에 기독교적 아가페를 추가시켰을 뿐이었다. 에로스는 신을 볼 수 있게 하고 그의 이끄심을 느끼게 하지만 그 교만(superbia) 때문에 신에게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 그럴 때 아가페가 신의 겸손(humilitas)으로 나타나서 영혼과 유한자들과의 마지막 고리를 자르고 영혼을 해방시켰다. 그 때 에로스적 상승은 성공하게 된다. 요컨대 신의 후밀리타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과 인간 영혼 사이의 거대한 간격을 연결해주었다는 것이다(Ibid., 470-475).

4. 니그렌은 카리타스 유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 인간 생명의 근본적 형태로서의 획득적 사랑(acquisitive love). 어거스틴은 모든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소유(획득)함으로써 자기가 행복하게 되길 기대하고 갈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기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대상을 막론하고 그 성격은 획득적이다. ②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 이 욕구적 사랑은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다. 다만 그 사랑이 향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사랑의 선악이 판명된다. 그에 따라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로 구분되는데, 이는 본질상 에로스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③ 우티와 후루이. 어거스틴은 존재의 계층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에 차별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사랑은 본질상 획득적, 욕구적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역시 욕구적인 사랑이며, 아가페적인 비이기적 사랑은 아니다. ④ 상승의 사다리 모델. 어거스틴은 신께로 상승하기 위해 덕의 사다리(ladder of virtue), 사색의 사다리(ladder of speculation), 신비주의의 사다리(ladder of mysticism)의 3 가지 상승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신플라톤주의적 방법이다(Ibid., 476-558). 요컨대, 그의 카리타스 유형은 본래 에로스적 구원 동기를 수용하면서 단지 치명적 단점인 교만을 제거하기 위한 치료책으로서 신약의 아가페를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종합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원시 기독교적 아가페 동기가 희석되고 말았다.

5. 이상의 논지는 대부분 그럴듯하게 들린다. 특히 그가 수백 종에 이르는 어거스틴의 원전들을 철저히 인용하였다는 점에서 함부로 논지를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어거스틴 학자들은 대체로 그의 이론이 극단적이고 과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영국의 버나비는 니그렌이 과도한 이분법을 동원했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니그렌의 어거스틴 이해는 첫째로, 루터주의적인 반(反) 신비주의적 시각에 입각하고 있다(Burnaby, 3-21). 둘째로, 어거스틴은 기독교 신플라톤주의자가 분명하지만, 그가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혼합시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양자간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이가 들면서 양자의 절대적인 차이점을 점점 더 의식했다고 한다(Ibid., 23-42).  셋째로 어거스틴은 이교적인 행복주의를 끌어들여 기독교의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윤리를 희석시켰다고 니그렌이 말한데 대해, 비록 그가 헬라철학의 행복주의를 끌어 들였지만 그 안에 담긴 기독교 윤리는 고대의 다른 어떤 윤리학과도 질적으로 구별되는 성경적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Ibid., 43-82). 또한 버나비는 초기의 어거스틴과 후기의 어거스틴은 상당히 다르며, 어거스틴의 사상을 하나의 고정된 체계로 보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니그렌은 이같은 점을 간과했다고 하였다.  

6.  니그렌은 신약의 아가페를 에로스와 완전히 분리시키며, 양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신약 기자들은 에로스 대신 아가페를 사용한다. 틸리히에 의하면 이것은 그 당시 에로스란 용어가 지나치게 성적인 의미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인간의 고상한 갈망(즉 에로스)의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한 선한용교수에 의하면 니그렌의 신적인 아가페 해석은 무조건적인 사랑에 치우친 나머지 신적 정의를 도외시하는 면을 보이고 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일 뿐 아니라 공의의 종교이기도 한데, 이 사실을 간과하였고, 이 점에서 윤리적으로 치우쳤다고 한다(Ibid., 145). 나아가서, 플라톤의 에로스를 아가페와 정면 배치되는 이기적, 획득적 사랑으로만 본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비판하고 있다(Ibid., 148).

7. 필자가 보기에 니그렌의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 속에는 참으로 탁월하고 도전적인 통찰력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는 고대의 종교적 동기를 3가지로 축소시킨 점에서 지나치게 단순화시켰고, 아가페와 에로스를 접촉점 하나 두지 않고 완전히 단절시킨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 경우, 자기 향상을 위한 인간적인 모든 노력은 그 의미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문화나 도덕은 전부 신적인 정죄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신봉하는 신정통주의적 구도와는 일치하겠지만, 너무 배타적이다-이를 극단적으로 고집하다간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필자는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은 헬라철학의 에로스의 답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정화된 사랑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에는 니그렌이 지적한 다양한 특징들이 엿보인다(솔직히 그렇기 때문에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사상은 부단히 변화되고 발전하였다. 그는 젊어서는 플라톤주의에 깊이 빠졌으나 늙어서는 그것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점차 인간의 자유의지조차 신의 선행(先行)하는 은혜 없이는 무능하다고 함으로써 은혜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다. 이같은 신적인 은혜는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에 속한다. 그의 신학적 관점은 이처럼 부단히 변화를 겪었다. 니그렌은 어거스틴이 교회의 은혜의 교사(Doctor gratiae)라는 사실을 일부러 도외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은 에로스적 동기보다는 아가페적 동기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게, 나아가 기존의 에로스 개념을 변혁하여 아가페 개념으로 변모시킨 것으로 보는 게 그의 본래 의도에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IV. 마치는 글


어거스틴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복 추구를 그의 윤리학의 근본 전제로 상정하면서 출발하였다. 행복의 추구는 최고선에 관한 논의에로 연결되었다. 그는 행복의 조건을 규정하면서 행복이란 확실성과 불변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에 합당한 존재는 영원불변하는 신밖에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신을 소유하는 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자이다.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사랑(카리타스)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핵심적 요소이다. 그는 사랑의 질서 개념을 도입하여 사랑을 질서 여부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었다. 그 중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질서 있는 바른 사랑을 카리타스라고 하였고, 무질서한 사랑 곧 자유의지의 남용을 쿠피디다스라고 하였다. 이같은 그의 사랑 개념은  그의 윤리학의 토대가 되었다. 윤리란 근본적으로 사랑 외에는 다른 것이 아니며,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 그의 윤리학은 사랑의 윤리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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