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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기타미분류

룬트학파의 신학사상

Ⅰ 서 론

20세기초 독일에서는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하였다. 신정통주의는 19세기 자유주의적 신학을 극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사상가 리빙스톤은 신정통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신정통주의는 고전적인 종교개혁 시기의 기독교와 19세기 자유주의간의 창조적인 종합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탁월한 종합을 나타내는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신정통주의는 광범한 호소력과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상이한 두 전통의 연합은 창조적이면서도 동시에 몇가지의 문제점을 갖게 되었다. 신정통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은 기독교와 인간의 세속적 경험 및 판단 규범과의 불연속성에 집중되어 있다.

즉, 계시와 자연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정통주의는 어떤 자연신학도 거부하고, 계시와 자연과의 불연속성을 '역설의 변증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대륙에 있으면서도 바르트의 방법론과는 달리 19세기의 신학을 극복하려했던 움직임이 스웨덴에서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룬트학파"라고 일컫는다. 20세기초 대륙에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근거리에 있던 스웨덴에서는 바르트의 영향이 별로 없었다. 룬트학파가 신정통주의처럼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한 것에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방법론과 내용에 있어서는 신정통주의와는 매우 달랐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사가 라투렛은 당시 스웨덴의 신학(아울렌과 니그렌)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이 두 사람(아울렌과 니그렌)은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슐라이에르마허에서 리츨과 하르낙에 이르는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 신학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이성과 이 이성의 소산인 자연신학을 바르트만큼 극단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개혁신학의 전통을 따르는 칼 바르트와는 대조적으로 루터의 신학 전통에 충실하면서 루터 이후 루터교의 잘못된 신학 발전을 비판하고 루터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신학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고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신학자들에게로 돌아가서 자신들이 말해 온 고전적 기독교를 회복하려 하였다. 이들은 바르트적 '역설'보다는 '승리자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의 경이로움과 기쁨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니그렌은 특히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심의 사랑인 '아가페'를 기독교의 핵심적 특징으로 보았다.

따라서 본 논고는 라투렛의 교회사관에 동의하면서 스웨덴의 신학자들이 바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바르트의 문제의식 곧, 19세기 자유주의적 사상에 반대하였다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으나, 그 방법론과 전개과정에 있어서는 바르트와 전혀 달랐다고 본다. 그도 그럴것이, 스웨덴의 룬트학파는 루터교 전통을 따르면서도 칸트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해석을 수용하여 교의학을 형이상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종교의 독자성과 학문적 성격을 증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고에서는 바르트와 동일하게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과학적 역사비평학에 대항하여 스웨덴의 룬트신학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 신학방법론에 따른 내용 전개 - 를 살펴보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본 논고에서는 스웨덴 신학 전체를 논하지는 않고, 20세기 스웨덴 신학의 독자성을 확보한 "룬트신학"(The Lundensian Theology)의 몇몇 신학자들(아울렌, 니그렌, 빙그렌)만을 언급하려한다. 다음에 서술될 Ⅱ장에서는 니그렌을 중심으로 룬트신학의 "신학방법론"을 서술할 것이며, Ⅲ장에서는 니그렌과 아울렌의 사상을 그들의 주저인「아가페와 에로스」「승리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고, Ⅳ장에서는 니그렌의 제자로서 아울렌과 니그렌의 사상적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빙그렌의 사상을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Ⅴ장에서는 룬트신학의 장 약점을 논하면서 그 의의를 논하겠다.

그러나, Ⅱ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룬트신학에 밑그림을 놓았던 웁살라 대학의 죄더블롬의 연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죄더블롬에 의해서 스웨덴 신학의 독자성이 주창되었기 때문이다.

⑴ 스웨덴 신학의 새로운 지평자 - 죄더블롬

20세기 전반에 있어서 스웨덴 신학의 거장들인 나단 죄더블롬(Nathan Söderblom), 빌링(Einer Billing), 그리고 아울렌(Gustaf Aulen) 등은 모두 웁살라 대학을 거점으로 신학의 과학적 연구 방법과 비교종교학적 방법을 개척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룬트의 아울렌과 니그렌 신학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前단계로서, 우리는 웁살라 대학에 있었던 나단 죄더블롬의 신학적 지평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죄더블롬에게서 비로소 스웨덴 신학의 독자성의 길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생각의 바탕위에서 '룬트신학'이라는 건물이 세워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죄더블롬은 1901년 웁살라 대학 종교학 교수 취임연설에서 스웨덴 교회의 혁신과 스웨덴 신학의 수립을 다음과 같이 제창하였다.

학생 제군은 오늘날 말 못할 딱한 상황 속에 있는 줄 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미 낡은 기독교와 낡은 교회를 위해 봉사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과학적 신학(scientific theology)을 제창함은 장래 여러분이 영광의 사명을 감당해 주기를 충심으로 바라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객관적, 역사 비평학은 나의 소년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송두리채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파괴적인 과학이 오늘 나의 신학연구에 도움이 되었고 나아가서 새로운 신앙을 구축함에 이르게 했다. 과오(過誤)는 과학 자체에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의 정신, 참을 추구하고 역사적 실재를 추구하는 인간의 과오에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나의 짧은 체험을 통하여 주저함 없이 말하려 하는 것은 과학을 경원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친숙하여 그것을 더 철저히 연구함으로 실재의 넓고 깊은 차원으로 시야를 넓혀 가면 거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된다.

이 연설에서 죄더블롬은 '과학적 신학'(scientific theology)을 주창하였다. 그의 생각 위에서 스웨덴 신학은 발전하였는데, 죄더블롬은 '여러 종교를 연구하면 할수록 기독교의 독자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스웨덴 신학은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하였고, 순수한 학문, 순수한 과학으로서 타분야의 학문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죄더블롬이 주창한 '과학적 신학'은 룬트신학의 신학적 방법론이 되었으며, 룬트학파의 거장들인 아울렌, 니그렌에게서 체계화, 조직화 되었다. 그러면, 죄더블롬에 의해서 주창되고 아울렌과 니그렌에 의해서 발전되고 체계화된 소위 '과학적 방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그 내용을 다음 Ⅱ장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Ⅱ 룬트학파의 신학방법론

룬트학파는 20세기초 루터 해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갔던 스웨덴 학파를 일컫는데, 거기에는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 안더스 니그렌(Anders Nygren), 구스타프 빙그렌(Gustaf Wingren)과 같은 학자들이 포함되었다. 물론 룬트신학을 형성하는데는, 웁살라 대학의 죄더블롬이 밑그림을 제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죄더블롬의 밑그림 위에서 성장한 룬트학파 가운데, 여기서는 니그렌과 아울렌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이들의 신학 방법론과, 그 내용을 소개하면 자연히 룬트신학의 특징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룬트 신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첫째 기독교 신앙의 독자성이 무엇이며, 둘째 조직신학의 역할 기능은 무엇인가를 밝히고 그 주제를 연구하는 일이었다.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사람이 안더스 니그렌과 구스타프 아울렌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룬트학파의 이 두명의 신학적 방법론을 조사하려 한다. 안더스 니그렌은 "주제연구"에 집중했으며, 구스타프 아울렌은 조직신학의 역할 기능에 집중하여 '과학적 방법'을 신학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조직신학의 역할 기능을 새로운 각도에서 서술하였다.

⑴ 안더스 니그렌

니그렌의 신학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적 관심 영역에 따라 발전 단계를 구분해야 된다. 니그렌의 신학적 관심영역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종교 철학의 영역이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저술로는 그의 첫 번째 주요 저작인「종교적 선험 : 그 철학적 전제들과 신학적 함의들」(1921) 이라는 저서였다. 그는 또한「교의학의 학문적 기초」(1922),「신학에서 객관성의 문제」(1922),「철학적 윤리와 기독교 윤리」(1923),「윤리학의 기본 질문들」(1926),「종교성과 기독교」(1926)를 집필하였다.

두 번째는 역사 신학의 영역이다. 이 시기는 두 권의 책으로 출간되어(1930, 1936),「아가페와 에로스」라는 영문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그의「기독교 사랑의 개념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원시 기독교와 종교개혁」(1932),「하나님의 사역으로서 속죄」(1932)에 관한 논문들을 집필하였다.

세 번째는 윤리학과 성서주석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것이었다. 니그렌은 후에 성서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1944년 로마서 주석과 룬트 감독교구의 목사에게 보내는 목회서신(1949)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951년「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었다. 1956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라는 책이 따라 나왔다. 그는 또한「성경에 관한 책」과「교회에 관한 책」이라는 두 권의 눈문집에 대하여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위의 세 시기에서 니그렌의 신학방법론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첫째시기의 저술들과 둘째시기의 저술 中「아가페와 에로스」에 잘 나타나 있다.

㉠ 문제제기

니그렌은 신학의 방법과 영역, 그리고 심지어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졌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는 '성경 영감설'과 '권위'에 대한 전통적 교리에 치명상을 주었다. 성경에 대한 전통적 사용에 근거한 신학은 칸트와 그의 계승자들의 철학적 작업에 의해서 더욱 손상을 받아, 초월적 영역에 대한 그림을 구성하기 위하여 성서의 신학적 명제들을 사용하는 학문적 방법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신학자들은 연구 대상으로서 초월적인 영역을 제거하고, 단지 철학이나 종교 심리학, 비교종교학이나 윤리학을 반복할 뿐이었다. 이러한 문제제기와 더불어 니그렌은 신학자를 위한 합법적인 학문적 과제가 존재하는지 하는 문제와 이 영역에서 유효한 지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들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를 발견하는 과제를 스스로 설정하였다.

㉡ 영원한 범주(The category of eternity)

니그렌은 전통적인 신학 방법에 대한 역사적 연구들과 비판철학의 판단을 받아들였으며, 그러한 방법론에 따른 어떤 초월적인 것에 관한 학문도 있을 수 없다는 칸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인간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은 학문적 대상이 될 수 없다. 학문은 인간 경험의 실재들 위에 기초해야 한다. 만약 신학이 유효한 지식을 제공할 것을 주장하려 한다면, 신학은 두 가지 요구 사항과 대면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 신학이 우선 조사를 위한 그 자체의 주제 문제를 가져야 하고, 또한 어떤 다른 원리에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둘째, 신학이 그 주제 문제에 적합한 학문적 연구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그렌은 우선 종교가 학문적으로 연구 조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학은 윤리학과 철학, 혹은 심리학과 같은 어떤 다른 원리들의 가면을 쓴 각색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반대하여, 종교는 다른 학문과는 달리 그 자체의 학문성과 독립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즉 종교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니그렌은 "영원한 범주"(Category of eternity)를 설정하였다. 종교는 "인간 본질로부터 뗄 수 없는 필연적이고 영원한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문화적 삶속에 필연적인 부분으로 구체화 되었다.

니그렌은 "영원한 범주"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철학적 견지에서 네가지 범주를 설정한다. 첫째는 이론적 질문, 진리에 대한 질문이다(과학). 진리에 대한 질문은 학문적인 분야를 지시한다. 두 번째 질문은 옳고 그름의 질문이며, 선과 악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질문이다(윤리). 세 번째 질문은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예술). 네 번째 질문은 영원한 것에 대한 질문, 즉 종교적 질문이다. 니그렌은 영원한 것에 대한 질문이 정신의 삶에 대하여 기본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네 범주에 의하여 니그렌은 네 가지 의미의 독특한 분야들, 즉 과학, 윤리, 예술, 종교의 존재를 확립하려고 시도한다. 각 분야는 경험의 자료에 대한 각자의 독특한 접근 방법을 가지고 있다. 과학적인 영역은 '이론적'이며, 과학적 맥락에서의 진술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그러나 윤리학이나 미학, 종교에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윤리학과 종교의 진술들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상이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이상들이 존재하며, 이 이상들이 옳고 참된 것은 경험적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적인 결단과 헌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각 분야는 그 자체의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자체의 용어로 다루어져야 하며 다른 분야의 하나로 환원되는 것에 저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니그렌은 '선험적 범주'를 도입하여 종교의 영역을 확보하였는데, 그가 이렇게 분석한 목적은 종교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경험의 독립된 형태라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니그렌은 말하기를, 종교를 낯선 제의적 실행이나 단순한 신화론적 개념들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충분하고 실제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외부로부터 인간의 삶에 부과된 우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의미에서 정신적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종교를 윤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헤겔은 종교를 철학과 동일시하였다. 그러나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그 자체의 토양과 그 자체의 법체계들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해 온 대로 종교를 연구해야 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관점으로부터만 바르게 이해되고 설명될 수 있어서, 정신 생활의 다른 영역들을 다스리는 체계들의 응용에 의하여 종교의 의미를 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 주제연구(motif-research)

니그렌은 종교의 영역을 "영원한 범주"라는 틀거리속에 놓고, 그것의 객관적인 학문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범주를 역사적인 현상에 적용하였는데, 그것이 "주제연구"였다. 니그렌이 말하는 "주제연구"(motif-research)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신학적저술「아가페와 에로스」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책 서론부분에서 니그렌은 '주제연구조사'(motif-research study)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적인 종교 연구(the modern scientific study of religion)와 신학적 연구에 관련된 이런 문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서로 다른 근본적인 주제의 빛에 비추어 본 서로 다른 종교 형태의 내적 이해에 이르는 것이다. 오랫 동안 비교 연구라고 하면 주로 서로 다른 종교적 자료들로부터 방대한 자료 수집을 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 왔다. 그러나 실제로 비교 연구를 하려고 하면 곧장 그 불확실성이 드러나고 만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사상 혹은 신념(belief)이라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서는 결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쪽에서는 그것이 근본 개념(basic conception)이라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좀 더 흐릿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상이나 혹은 신념은 전혀 똑같은 의미를 갖지 않고서도 정확히 똑같은 형태를 지닐 수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종교가 다르면 그 종교적 상황도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상, 혹은 신념 혹은 느낌(sentiment)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오직 그 자체의 자연적 맥락의 빛에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그 종교가 관여하는 근본사상(basic idea) 혹은 그 추진력(driving power)이 무엇인지를, 혹은 그 종교의 전체적 특색과 각 부분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특수 내용과 색깔이 어떤 것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주제연구(motif-research)라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영역이 되었든 혹은 다른 영역이 되었든 간에 그런 구조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니그렌이 말한 '주제연구조사'(motif-research study)란 다른 일반적인 종교학의 영역에서 다루는 '역사적-기원학적 연구(Historical-genetic research)'에서 처럼 역사적인 관련들과 동기들의 기원들에 관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징적인 내용과 전형적인 나타남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고 볼 수 있다. 즉 역사적인 현상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이 '주제연구조사'라는 방법론을 통해 니그렌은 '근본주제(fundamental motif)'에 대한 定義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근본주제라고 묘사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본주제라는 용어에 관해서 우선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예술의 영역(the realm of art)일 것이다. 근본주제는 예술 작품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만들어주고, 그 통일된 전체의 구조를 결정하고, 그 통일된 전체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해 준다. 하나의 근본주제란, 규범적인 의미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fundamental question)으로 묘사될 수 있는 근본적인 특성(fundamental nature)을 지닌 문제에 대해 어떤 특별한 전망(견해,outlook)을 통해서 얻어진 답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니그렌에게 있어서 '근본주제'란 인생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는 것이며, 이것은(agape, eros, nomos) 어떠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그의 신학 방법은 '주제연구'(motif-research), 곧 외부적인 형태들과 표현들을 넘어 어떤 전망의 기초적 '주제'(motif)를 취하려는 시도이다. 니그렌은 어떤 종교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고 그것을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시키는 의미에서 특별히 '주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모든 종교는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를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들 종교들은 그들의 기초적인 동기들, 즉 어떻게 이 교제가 실현되어질 것인가 하는 그들의 기초적인 개념들에 의해 구분되어진다는 것이다. 곧, 어떤 주제에 의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가 실현 되느냐에 따라 신중심적인 종교 혹은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니그렌은 위에서 살펴본 '주제연구'라는 방법론과 그에 따른 '근본주제'라는 motif를 가지고서 기독교의 사랑 개념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기독교의 근본주제는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아가페는 기독교의 기본적인 범주이다. 신약 성경의 다양한 신학들을 통일하는 원리, 교회의 삶에서 발전시킨 모든 신학들의 일반적인 중심, 창조, 성육신, 부활과 같은 기독교 전통의 위대한 교리들의 본질적인 의미임을 증명함으로써 아가페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범주라고 주장했다.

⑵ 구스타프 아울렌

안더스 니그렌이 말한 "영원한 범주"는 순전히 형식이고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그 범주를 가지고 종교의 경험적 소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기술해야 하는데, 이 일을 아울렌이 담당하였다.

아울렌에 의하면 조직신학은 독자적인 특수한 대상을 갖는다고 한다. 다른 과학이 대상을 갖듯이, 조직신학의 대상은 기독교의 신앙이며, 이 대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 역사적으로 주어진 구체적인 유기적 전체(organic whole)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의 과업은 바로 이런 신앙의 의미를 명석하게 해명해 주는 일이다. 아울렌은 자신의 조직신학 저서「The Faith of the Christian Church」속에서 조직신학의 대상과 기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조직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학문의 학적인 노력이 의도하는 바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를 갖는 방법을 다하여서 명확하게 하는 데 있다. 조직신학의 과제는 논증적이거나,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분석적이며 비판적인 것이다. 그 목적은 신앙의 증명이나,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에 집중하여야 하며 신앙 자체의 개념과 견해를 가장 명확하게 제시하여야 한다. 3. 조직신학은 종교철학과는 별개의 것이다. 종교철학은 종교적인 '범주'를 설정하고 인간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의 그 위치를 규명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조직신학은 합리적인 형이상학과 같은 종교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4.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 관계가 있고 따라서 그 긍정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조직 신학은 종교적 주제를 다루며 종교적 의식의 분석에만 국한되는 종교 심리학과는 다른 것이다. 5. 조직신학의 기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를 분명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고백적인 제한에 얽매어질 수가 없다. 조직신학이 오직 순수히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고백적인 것이 될 수가 있다. 6. 조직신학의 기능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의를 분명하게 하는 한 순수한 학문적인 것이 된다. 조직신학이 그 학문적인 연구를 다른 목적으로 하지 않고 본래의 목적만으로써만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 생활에 봉사할 수가 있다.

 

아울렌에 의하면, 조직신학의 기능은, 첫째 조직신학의 임무는 과학의 논리기술적 도구를 가지고 신앙을 구성하고 있는 개념들을 귀납적으로 조사 분석하여 그것들을 명석화해 주는 일이다. 그 목표는 두말할 것 없이 신앙의 핵심을 바르게 찔러 그 진상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 즉 그 핵심의 독특하고 본질적인 것을 찾아 헤매이는 일이다. 이것이 이른바 주제연구의 신학적 프로젝트의 첫 단계이다.

둘째, 조직신학은 귀납적인 주제조사연구에서 얻은 근본주제를 샅샅이 드러내기 위하여 분석적으로 모든 비본질적이며 지엽적인 것을 제거하고 불필요한 붙착물을 제외하는 일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근본주제를 에워싼 비본래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을 벗기는데 있어서 어떤 규범이나 외적 규준에 의할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지닌 '내적논리'(inner logic)에 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규범도 신앙 위에서 위세를 부릴 수 없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무엇을 믿어야 한다'는 따위의 어떤 규범적 권위를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신앙 자체의 논리에서 신앙의 본질을 해명해 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아울렌은 신앙의 근본주제를 역사에서 객관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가 발견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개념 혹은 근본적인 테마(Fundamental idea of fundamental theme)는 니그렌과 동일한 '하나님의 아가페'였으며, 아울렌은 아가페라는 '근본주제'에 의하여 다음장에서 다룰「승리자 그리스도」에서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니그렌이 신학의 대상을 개념화, 추상화된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그 신앙의 주제를 발견하려 했던 것과 같이, 아울렌 역시 역사안에서 기독교의 극적(dramatic)인 개념(승리자 그리스도)을 찾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주제연구를 퉁하여 찾은 근본주제에 대하여 니그렌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울렌은 이를 체계화하고 조직신학적으로 서술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신앙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러기에 학문적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학문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룬트학파의 결론이었다.

Ⅲ 룬트학파의 신학사상

룬트학파는 "주제연구조사" 방법론을 통하여 기독교의 "근본주제"를 "아가페"(Agape)로 설정하였다. 룬트학파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찾은 근본주제를 역사속에 적용하였는데, 그것이 니그렌에게 있어서는「아가페와 에로스」였고, 아울렌에게 있어서는「승리자 그리스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책을 중심으로 룬트학파의 신학사상을 검토하려 한다.

⑴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를 중심으로

니그렌은 위에서 살펴본 '주제조사연구'의 방법론을 가지고서 기독교의 사랑 개념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 기독교의 근본주제는 '아가페 사랑'으로 특징지워지며, 희랍의 종교들은 '에로스 사랑'으로, 유대교는 '노모스 사랑'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완전히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는 서로 뒤섞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는 것이다.

㉠ 두 주제들간의 對立

니그렌은 자신의 '주제조사'를 통하여 헤겔식의 Thesis-Antithesis를 설정하고 두 개의 대립되는 근본 중심사상들(motifs)을 놓는다. 그것이 에로스 사상과 아가페 사상이다. 그는 "본시 아가페는 에로스에 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또 에로스 역시 아가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원래 에로스와 아가페는 본질적으로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으나, 헬레니즘 세계에 아가페가 뛰어들어옴으로써 이 두 사상은 충돌을 맺게 되었으며, 역사속에서 서로 상관을 갖게 되었다고 니그렌은 말한다. 이제 니그렌이 파악한 "에로스 사랑"과 "아가페 사랑"의 특징을 살펴보자.

㉡ Thesis로서의 Eros motif

니그렌은 에로스 주제의 특징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에로스는 탐욕적 사랑이다. 에로스 사랑은 아직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고 욕구하는 인간의 갈망, 노력인 것이다. 둘째, 에로스는 인간이 신적인 것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에로스는 하나님과 인간 삶의 중재자(mediator)이다. 셋째, 에로스는 자기중심적 사랑이다. 에로스가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면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목적은 가치있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행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 Antithesis로서의 Agape motif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사랑의 특징은 에로스의 사랑과는 절대적으로 구별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가치 추구의 사랑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하나님이 죄인을 향해 밑으로 내려오시는 사랑이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추구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위로부터의 사랑(love from above)"인 것이다.

니그렌은 아가페 사랑의 특징을 4가지로 요약하는데, 첫째 아가페는 자발적이며 "비동기적(unmotivated)"이다. 둘째, 아가페는 "가치에 치우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에게나 악인에게 모두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셋째, 아가페는 창조적 사랑이다. 아가페는 가치(value)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창조한다. 아가페는 사랑함(loving)으로서 가치를 사랑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넷째, 아가페는 하나님과의 친교(fellowship)를 일으키는 창시자(initiator)이다. 인간편에서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길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친교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행위에 돌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을 만나러 오셨고 자신을 내어 주셔서 친교를 이루셨다.

이상으로 우리는 니그렌이 구분한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니그렌에 따르면, 본질상 이 둘은 결코 하나가 된다거나, 또는 섞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변천 과정에서 서로 뒤섞이게 되었고 급기야는 아가페도 아닌, 에로스도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랑 개념인 '카리타스'(caritas) 사랑 개념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하며, 그 역사적 과정을 서술한다.

㉣ 속사도 시대와 3세기의 교부들

속사도 시대에 이르러 몇몇의 사랑 개념 요소들이 등장하여 상호 작용을 하며 균등화와 동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는데, 니그렌은 이런 사랑을 유형별로 세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구약의 노모스(Nomos), 둘째는 헬레니즘의 에로스(Eros), 셋째는 신약의 아가페(Agape)이다. 이 세가지 유형의 사랑 개념은 속사도시대부터 상호 대립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발전하면서도 이 세 가지 주요 유형들은 계속해서 존속하였다고 니그렌은 말한다. 그 증거로 니그렌은 니케아 이전의 신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변자들인 이레네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등 3명의 신학자들을 소개한다. 터툴리안은 구약의 노모스 개념에, 알렉산드리아 신학 즉 오리겐은 에로스 개념에, 이레네우스는 원시 기독교의 아가페 개념에 집중하였다고 보았다.

㉤ Synthesis로서의 Caritas

안더스 니그렌의「아가페와 에로스」에서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거스틴의 "카리타스"(Caritas) 사랑이었다. 그는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이 에로스 사랑과 혼합되면서 카리타스적 사랑으로 변질되어 중세의 신비주의 신학, 공로주의적 구원론, 나아가 현대의 개신교 기독교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제 니그렌이 지적한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을 살펴보자.

衁. 카리타스 사랑의 이중적 국면

니그렌에 따르면, 어거스틴이 말한 '카리타스' 개념은 순수한 아가페적 사랑도 아니고, 순수한 에로스적 사랑도 아니었다고 말한다. 니그렌은 이 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로스는 혼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스스로 하나님께 이끌린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단지 원거리에서만 본다. 하나님과 영혼 사이에는 거대한 大洋이 있다. 그래서 영혼이 그분에게 도달하였다고 상상할 때, 그것은 단지 자기충족과 교만, 즉 그 자신의 은신처에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교만이 없었다면 에로스는 영혼을 하나님에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가페는 그것을 도울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humilitas(謙遜)는 인간의 superbia(驕慢)를 정복해야만 한다. 영혼이 자신을 지상적 일시적인 것들에 얽매이게 하는 다른 모든 연줄(ties)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만에 감염되어 있다면, 그것은 상승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superbia에 의하여, 영혼은 자신의 사슬에 얽매여서 그 자신 위에 있는 것에 올라갈 수 없다. 有限者들과 영혼의 마지막 고리를 잘라내는 것이 아가페의 임무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humilitas의 영향으로 자신으로부터 해방될 때, 그 상승은 성공한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 영혼을 아래쪽으로 끌어내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혼을 大洋 너머에 있는 조국으로 운반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그분의 humilitas이다.

遁. 카리타스 사랑에 대한 定義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의 중심은 '모든 사랑이 획득적인 사랑(acquisitive love)'이라는 것이다. "욕망", 즉 "획득적 사랑"은 모든 인간의 삶의 기초-형태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이것에서 추구하고 다른 사람은 저것에서 추구한다. 그러나 모든 이들은 사랑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즉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사랑 개념에 놓여 있는 근본 주제(motif)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카리타스" 사랑을 요약하면, 첫째 모든 사랑은 획득적인 사랑이다. 둘째 이 획득적 사랑은 인간 생활에서 가장 기초적 근본적인 현상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가 어떤 것을 요구해야만 하는 즉 사랑하고 동경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이 획득적 사랑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사실은 단지 인간적이며 인간이 일시적 존재로 피조된 사물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표현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욕망이 올바른 대상에 두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다. 즉 인간의 필요를 실제로 만족시킬 수 있는 대상을 향하는 사랑은 올바른 것이다. 하지만 그릇된 대상을 향하는 사랑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은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caritas and cupiditas)'의 구분을 시도한다.

鑁.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caritas and cupiditas)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의 구분은 명확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둘의 차이점은 단지 사랑의 방향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安息(quies)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랑은 카리타스요, 그렇지 못한 것은 쿠피디타스이다. 따라서 사랑의 방향이 진정한 안식을 가져다 주는 위쪽을 향하느냐, 아니면 일시적인 안식만을 가져다 주는 아래쪽을 향하느냐에 그 차이가 나타난다.

카리타스는 위쪽으로 향하는 사랑이고 쿠피디타스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사랑이다. 카리타스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쿠피디타스는 세상의 사랑이다. 카리타스는 영원한 것을 위한 사랑이고, 쿠피디타스는 일시적인 것을 위한 사랑이다. 사랑이 이처럼 대조적인 경로들을 택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본성상 영적이면서 육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조물들 중에서 으뜸이며, 그래서 그에게는 두 가능성들이 모두 개방되어 있다. 카리타스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올라갈 수 있다. 반면에 쿠피디타스 안에서 그는 더 열등한 창조로 내려앉을 수 있다. 인간의 영은 영원한 존재에게 가는 길을 날아오름으로써 그곳에서 행복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육신적 육적인 본성은 그 무게로써 지상적 일시적인 것에 그를 얽매게하고 그의 飛行을 방해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카리타스와 쿠피디타스가 동일한 근거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즉 각각의 경우에 그 대상은 다르지만, 그 사랑의 본질(nature)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쿠피디타스 뿐만 아니라 카리타스도 획득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兩者는 모두 오직 자기 자신의 "선"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상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카리타스는 쿠피디타스와는 달리 그것의 "선"을 일시적인 것에서 찾지 않고 영원한 것에서 찾기 때문이다. 카리타스나 쿠피디타스 모두는 '획득적 사랑'이라는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니그렌은 주장한다.

 

이상으로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을 정리해 보았다. 니그렌은 어거스틴의 카리타스 개념이 결국은 기독교적 아가페의 사랑 개념을 변질 왜곡시켰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가 한편으로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은총개념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루터식으로 이해하지 않고 '주입된(infusa)' 개념으로 보았으며, 은총이 효력적(effective)으로 우리의 영혼안에서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그렌은 어거스틴의 이런 견해가 이제 바야흐로 중세 서방교회의 구원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 Agape 사랑의 회복(Luther)

니그렌은 종교개혁에서 일어난 위대한 종교적 혁명의 가장 심오한 취지는 이 사건에서 神中心的인 종교가 자기천명을 하였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한다. 루터는 모든 종류의 자기중심적인 종교에 반대하여 순전히 신중심적인 종교를 강조하였다. 가톨릭적 사랑 개념의 특색을 나타내게 되는 자아중심적 태도에 반대하여, 루터는 철저하게 신중심적인 사랑 개념을 제안한다. 그것은 획득적 사랑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이다. 니그렌은 루터가 기독교의 아가페적 사랑을 회복시켰다고 보고 그 실례로서 4가지를 든다.

衁. 인간적 수준으로 내려온 하나님의 친교

'친교'(fellowship)라는 것이, 고대교회에선 매우 일찍부터 하나님과의 친교가 신적인 성결의 수준에서의 친교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이 경향은 중세 교회에서 더욱 현저하게 발전했다. 하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교는 이제 인간적 수준에서의 친교가 된다. 루터의 개념은 "성결이 아닌 罪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공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외에 다른 종류에서의 하나님과의 친교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의로와진 기독교인은 "義人이면서 동시에 罪人(simul iustus et peccator)"이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죄인이지만 신적 사랑에 의해서 칭의받아서 하나님과의 친교로 인도되었다.

遁. "천상의 사닥다리들"에 대한 투쟁

중세기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향해 갈 수 있는 하나의 공통된 방법(Way)으로 실천적인 '공로의 길'(way of merit)이건, 신비주의의 상승이건, "존재유비(analogia entis)"에 의거한 사변적 사고의 길이건 상관없이 이 세가지 천상적 사닥다리들 중에서 하나를 수단으로 삼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향하는 우리의 길(our way to God)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길(God's way to us)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중세기적 "천상의 사닥다리들"을 비판하였다.

鑁. "Fides Caritate Formata"(사랑으로 형성된 신앙)에 대한 투쟁

가톨릭시즘의 "사랑으로 형성되는 신앙" 개념은 카리타스-종합에 대한 루터의 공격의 절정에 해당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는 어거스틴처럼 은총이 인간에게 주입되어 주입된 은총에 의해서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루터가 말한 칭의란 "밖으로부터 온 의(alien righteouness)"에 의해서 우리에게 전가(imputatio)된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에게 가치를 주는 행위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 앞에서 불의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고 용납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루터에게 있어서는 어거스틴처럼 카리타스 사랑이 주입되어 인간이 실제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온" 의의 전가로 인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니그렌이 파악한 어거스틴적 카리타스 사랑에 반대한 루터의 신학을 요약하였다. 그러면, 니그렌이 파악한 루터의 아가페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니그렌은 루터가 회복한 아가페 주제의 특징을 세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기독교적 사랑은 행복론적 주제를 가진 모든 행위에 대립되는 자발적인 것이다. 둘째, 기독교적 사랑은 모든 율법주의에 대조되는 자발적인 것이다. 셋째, 기독교적 사랑은 "흘러넘치는 사랑(Quellende Liebe)"으로 묘사된다. 기독교적 사랑은 세상의 사랑처럼 그 대상의 탐나는 특성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사랑이 아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그 자신의 원천인 하나님과의 친교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상으로 니그렌의「아게페와 에로스」의 내용을 상술하였다. 상술한 것처럼, 니그렌은 룬트학파의 신학적 전제(前提)인 "주제연구조사" 방법론을 가지고 기독교의 내적 역사를 탐구하였다. 니그렌이 파악한 기독교의 중심 주제로서의 "아가페" 개념에 대한 비평은 다음장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리는 주제연구의 방법론에 의한 역사적 저술을 남긴 또 한명의 룬트학파 아울렌을 살펴보자. 그는 니그렌과 동일하게 "아가페"사랑을 기독교의 중심 주제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아울렌은 아가페 사랑을 전통적인 구속론인 "속죄론"에 적용시켰다.

⑵ 구스타프 아울렌 :「승리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아울렌은「승리자 그리스도」속에서 속죄론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평가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렌 역시 니그렌이 파악한 기독교의 근본주제를 "아가페 사랑"으로 보았다. 다만 그가 "아가페 사랑"을 역사속에 적용시킨 방법은 "속죄론(구속론)"이라는 구원론과 관련시켰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었다. 결론은 니그렌과 동일하다. 아울렌이 룬트학파의 신학방법론인 "과학적 방법"을 역사속에 적용시켜 얻은 결론은 기독교의 속죄론은 "고전적 견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내용을 다음에서 살펴보자.

아울렌은「승리자 그리스도」에서 말하기를 초대 교회는 속죄론이라고 할 만한 잘 다듬어진 교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교부들의 시대가 신학에 공헌한 분야는 주로 기독론이나 삼위일체의 교리에 관계된 것이고, 속죄론을 철저히 사색해서 교리로 서술하기 시작한 것은 켄터베리의 안셀무스이다. 안셀무스는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란 책에서 고전적인 속죄론을 펼쳤다. 그것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행위의 대상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화해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사실 속죄론 사상은 중세의 '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속죄사상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안셀무스의 속죄론은 "객관적 견해"로, 아벨라르의 속죄론을 "주관적 견해"로 각각 지칭하는데, 이들의 사상 계보를 보면, "객관적 견해"의 속죄론은 안셀무스 → 중세의 스콜라 철학 → 종교개혁 → 17세기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로 나아갔으며, "주관적 견해"는 아벨라르 → 소치니 주의 → 계몽주의(리츨은 계몽주의 시대를 객관적 견해의 붕괴 시기로 봄)로 흘러갔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울렌은 중세시대에 발달한 "객관적 견해"와 "주관적 견해"가 본래 기독교의 속죄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소위 "고전적, 극적 견해"의 속죄론을 내세운다. 아울렌은 속죄론에 대한 세가지 유형의 견해를 분석 비교하여 본래 기독교의 참된 속죄론은 "고전적, 극적 견해"라고 주장한다.

㉠ 속죄론의 세가지 유형

아울렌은 속죄론을 세 유형으로 나누는데, 그 각각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고전적인, 극적(drama)인 견해"로서, 이것은 고대교부들, 특히 이레네우스에게서 발달되었는데, '속죄'라는 것을 하나님의 투쟁과 승리로 보는 것으로 이원론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뜻에 적대하는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셨다. 곧 그리스도 곧 '승리자 그리스도'가 세상의 악한 세력 곧 인류를 속박하고 고난을 받게 하는 폭군과 싸우며 그것을 정복하여서 하나님께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키셨다는 것이다. 이 속죄론은 고전적인 기독교 본래의 속죄론으로 다른 두 유형(객관적 견해와 주관적 견해)과 전혀 다르다.

둘째는 "객관적인 견해"로, 이것은 안셀무스에게서 체계적으로 발달되었는데, 표면적으로(객관적으로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셨다)는 "극적인 견해"와 동일하다. 그러나 "극적인 견해"와 "객관적인 견해"의 차이점은, 전자는 속죄 또는 화해의 업적을 시종 하나님 자신의 업적으로 즉 계속적 신적 업적으로 보는데, 후자에 의하면 속죄의 행위는 그 근원을 하나님의 뜻에 두지만 그것이 실현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을 위한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불연속의 신적 업적이라고 불러진다. 이 "객관적인 견해"는 서방교회에서 발달했기에, 아울렌은 이를 "라틴유형"이라고 일컬어 "고전적이고 극적인 견해"와 구분한다.

셋째는 "주관적인 견해"로, 이것은 아벨라르에게서 출발하는데, 속죄를 하나님 편에서의 변경된 태도보다는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인간의 도덕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견해이다. 이런 "주관적인 견해"와는 달리 "극적인 견해"는 단지 사람에게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황이 전혀 변해진 것,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가 변해진 것,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의 태도까지도 변해진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극적인 견해"는 철저히 객관적인 성격의 것이다. 그리고 그 객관성은, 속죄란 것은 사람에게 개인으로서 영향 끼쳐 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구원이란 극적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이란 사실로써 한층 더 강조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아울렌이 구분한 속죄론의 세 유형을 살펴보았다. 아울렌은 이상의 속죄론의 구분을 역사속에 적용시켰는데, 우리는 다음에서 역사속에서 발달된 그 유형들의 실례를 각각 살펴보고자 한다.

衁. "고전적 견해"

a. 이레네우스(Irenaeus)

아울렌의 지적에 의하면, 이레네우스는 속죄론과 구속론에 대하여 명확하고 포괄적인 서술을 해 준 첫 교부였다. 성육신의 목적("Ut quid enim descendebat?" 곧 무슨 목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셨느냐?)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썩지 않고 죽지 않는 것과 연합되지 않고서는 썩지 않음과 죽지 않음을 얻을 수 없다." 구속은 "신성 곧 죽지 않음을 인간 본성 안에 받는 것이라고 하며 죄에서의 해방이란 사상은 이차적으로 취급되었다."

이레네우스는 죄와 죽음을 인류의 원수라고 하며 이원론적 견해를 지지한다. 그리스도의 업적은 인류를 노예로 삼는 세력, 곧 죄와 죽음과 악마를 철저히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업적을 완수하시고 죄와 사망과 악마를 이기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지 어떤 중간적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라틴적 견해"와 변증론자들은 그리스도를 '둘째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여 중간적 존재로 파악하여, 불연속성의 특징을 지니는데 반(反)하여, 이레네우스는 하나님 자신이 이 죄와 죽음의 세계에 들어오셨다고 함으로써 연속성을 강조한다고 아울렌은 주장한다.

b. 신약성서

아울렌은 신약성서 내용중에서 바울의 신학에 집중한다. 아울렌은 바울의 가르침이 라틴 교리에 속하지 않으며 또 주관주의적, 자유주의적 견해도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고전적 견해에 속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업적은 동시에 속죄 곧 하나님과 세계와의 '화해' 업적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구원론은 곧 속죄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류를 심판과 율법에서 구원하시고 공로와 정의의 질서를 초월하는 새 관계 질서를 세우신 것이다. 로마서 3장 24절 이하의 요절(이 예수를 하나님은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도, 속죄론의 라틴적 견해를 지지하는 구절로 취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거기엔 라틴 교리의 특성인 하나님의 정의가 사람의 훼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사람을 위한 그리스도의 지불로 말미암아 갚았다는 사상이 없는 까닭이다. 그 교리에 의하면 희생제가 사람 편에서, 아래로부터 하나님께 드려졌다. 바울에게서는 구속을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신 것이다.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는 고후 5장 18절 이하에서 만큼 풍부한 내용으로 표현된 곳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느니라."

c. 루 터

아울렌은 루터란답게, 그리스도의 업적에 대한 루터의 해석이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가 가진 전형적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루터신학에는 하나님의 활동의 직선적인 연속성이 있다. 둘째로, 루터에게 있어서 속죄론은 전체가 이원론적이요 극적이다. 그것은 엄청나 격투(mirabile duellum)로 그려져 있다. 그 투쟁에서 승리자는 그리스도이시다.

라틴 견해에서는 그리스도가 치룬 만족 행위는 징벌의 요구와 벌을 철회하는 것 사이에 지어논 합리적 타협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의의 요구는 인간 편으로서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보상 행위로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는 이 합리주의의 자취가 모두 지워진 것이다. 그것이 지워진 까닭은 이원론적 전망이 강조되었고, 저주와 진노를 승리한 것은 그 말의 완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라틴 견해의 전제는 고해의 도덕주의적 사상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을 굉장히 꺼려하였다. 라틴 견해는 법과 정의를 하나님의 사람과의 관계를 표시하는 전형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루터가 갈기 찢어버린 사상이며 하나님의 주장을 높은 차원에 모시고 율법을 사람을 포로로 한 폭군의 하나로 취급한 사상이다. 라틴 교리의 구조는 시종 합리주의적이었다.

遁. "라틴적 견해"

a. 교부시대

라틴적 견해는 터툴리안이 건축재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고, 키푸리안이 그 자료로써 속죄론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터툴리안에게서 '만족(satisfaction)과 공로(merit)'란 기본 개념이 나타나는데, 두 말 다 속죄를 위한 '고해'(penance)란 사실에 적용된다. 만족이란 것은 사람이 자기의 과실에 대해서 변상하는 것이다. '공로'란 사상도 명령된 것을 실천한다는 것, 율법의 준수란 것과 연관된다. 만일 이같은 준수가 "공로를 짓는" 것이 된다면 이 술어는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 "여분의 행위"(supererogatoria) 곧 엄격히 재서 의무 이상의 것을 하는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이 공로는 단식, 자발적 독신생활, 순교 등을 포함한다. 이런 여분의 공로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이양될 수 있다는 사상이 터툴리안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키푸리안에게서는 나온다. 키푸리안은 이 원칙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된 여분의 공로에 적용하고 그의 업적을 "만족"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여분의 공로를 획득하고 만족과 보상으로서 하나님께 지불하였다. 여기서 속죄론의 라틴 견해의 핵심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레고리 1세가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를 강력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구속의 극을 선명한 색채로 그림 그려서 아주 현실적인 때로는 기괴한 표상을 사용하였다. 그의 이런 사용법이 후대에 중세기의 관념인 "미사의 희생"이란 사상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는데, 이 견해는 인간이 하나님께 향하여 드리는 희생제사를 계속 강조함으로 속죄론의 라틴적 교리의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b. 중 세 기

라틴 견해가 성장해온 모체는 고해 제도라고 강조되어야 한다. 라틴적인 고해(속죄하기 위해서 고행하는 것)의 사상은 속죄론의 라틴 견해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그 기본 사상은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제사나 대상을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그리스도의 업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거기서 생기는 문제점은 둘이다. 첫째는 이 사상 전체가 본질적으로 율법주의적이란 것이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업적을 말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하신 일에 강조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전적 견해와는 그 사고 방향이 전혀 다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희생제물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위하여 드려져야 한다'고 말하는 점이다. "죄의 값을 치룰 만한 다른 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제물이 되려고 오셨다.

c. 켄테베리의 안셀무스

아울렌에 의하면, 교부들(고전적 견해)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의 사업을 성취하도록 육신이 되신 것을 가르친 반면에, 중세기의 안셀무스는 그리스도로 성취된 인간의 만족 행위를 가르친다. 그의 속죄론은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수행한 것, 인간 편에서, 아래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제물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아울렌에 의하면, 성육신과 구속에 대한 교부들의 사상은 아래로 비스듬이 움직여 가는 계속적 선으로 표상되는데 안셀무스의 교리는 단절된 선, 즉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향하여 지어 드린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선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아래로 향해 오는 선이 교차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원론적인 사고 경향은 안셀무스에게서는 사라져 버렸고, 준엄한 딜레마가 속죄론을 법적 체계 안에 고정시켜 버렸다.

 

d.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속죄론

17세기 정통주의의 속죄론은 라틴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아울렌은 말한다. 중세기에서 그 사상의 중추였던 징벌의 방도와 고해의 사상이 자취를 감춘데도 불구하고 속죄론의 중세적 교리가 조금 수정되어서 존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죄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업적은 신약성서와 교부들과 루터에게서와 같이 계속적인 선으로 표시되지 않고 안셀무스에게서와 같이 중단된 선으로 표시되었다.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 편에서부터 사람 대신에 변상이 갚아졌기 때문에 그러하다.

鑁. "주관적 견해"

a. 아벨라르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이론과 함께 속죄론의 고전적 견해의 표상들과 그 이원론적 전망을 공격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속죄사상을 어떤 모양으로든지 악마와 관련시키는 것을 거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만족행위란 사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벨라르는 신학의 경건성을 강조하였다. 신학은 죽으심을 강조하였으나, 경건은 그리스도의 수난 전체를, 그것을 순교의 죽음으로서 명상하면서 주시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8세기 경건주의 전통과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흘러들어갔다.

b. 자유주의적 교리의 도래

"객관적 견해"의 속죄론은 정통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수호신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교리의 쇠퇴는 경건주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경건주의의 표어는 의인이기 보다는 "거듭남"(Wiedergeburt)이었다는 사실이다. 곧 이 술어는 주관적인 과정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선택된 것이다. 사람은 회개하고 자기의 생활을 개선하면 그 대신 하나님은 사람의 개선에 대하여 넘치는 행복으로써 갚아 주시는 것으로 이에 응답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주도적 사상은 본질적으로 신인동형론적이며 도덕주의적이다.

이상으로 아울렌이「승리자 그리스도」에서 말하고 있는 점을 정리해 보았다. 아울렌은 고전적 견해의 속죄론이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지배적인 사상이었지만, 그것이 고해제도와 관견되면서, 중세기에는 라틴 견해와 주관적 견해로 전락했으며, 루터에게서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방향 설정은 니그렌과 동일하다. 니그렌의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의 대결구도와 아울렌의 '고전적, 극적 견해'와 '라틴적 견해'는 서로 동일선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Ⅳ 룬트학파의 신학사상에 대한 비판

⑴ 신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 : "근본주제"의 前提와 弱點

니그렌은 Agape and Eros(1938)를 집필하기 전에 1921년에 두 개의 저술을 발표했는데, "The Fundamental Problem in Phiolosophy of Religion" 이라는 논문과 Religious A Priori 라는 책이 그것이다. 여기서 니그렌은 자신의 종교에 대한 비평철학의 임무를 정의내리려고 시도했는데, 그는 칸트철학의 기초위에서 종교의 타당성(validity)을 세우려고 한다. 니그렌에게 있어서 종교철학의 목표는 현존하는 각각의 종교들에 의해서 주어진 영원성(eternity)의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니그렌의 '주제연구'는 필연적으로 종교에 대한 비평철학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니그렌이 말한 근본주제에서 근본적인 질문들은 본질상 철학적인 범주에 속하고, 이런 질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역사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제연구(Motif research)가 철학과 역사의 경계선 상에서 활동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문제 모두를 포함한다. 니그렌에게 있어서 근본문제는 철학적으로 제기되고, 그 답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현실(reality)로부터 이끌어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니그렌이 선택한 방법론은 영원성과 같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역사속에서 찾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객관적인 검증이나 과학적인 추론이 아닌 주관적인 선택이 있을 뿐임을 前提하고 있다. 따라서 니그렌이 취한 방법론 역시 주관적인 타당성, 곧 아무런 근거 없는 前提만을 유일한 타당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국면속에서는 어떠한 선택도 과학적인 기초위에서 만들어질수 없다. 각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가 선택한 모든 것은 타당(valid)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윤리적이거나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선택(choice)을 제외하면 실제로 어떠한 것도 타당한 것이 없다. 선택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등장하는] 문제(question)가 피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그렌이 취한 '주제조사연구' 방법론은 필연적으로 임의의 취사 선택을 해야만 한다. 주제연구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주관성과 그것의 역사적 현상의 취사선택은 방법론적인 약점을 지닌다는 점을 피할 수는 없다.

 

⑵ 니그렌의 "사랑" 개념에 대한 비판

니그렌의 "사랑" 개념은 폴 틸리히와 Daniel Day Williams, John Burnaby 등에 의해서 비판받아왔다. 여기서는 폴 틸리히와 Daniel Day Williams의 견해를 살펴보겠다.

㉠ 폴 틸리히(Paul Tillich)

니그렌은 아가페적 사랑으로부터 에로스적 사랑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사랑은 존재론적 개념"이라고 주장한 틸리히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은 존재론적 개념(an ontological concept)이다. 사랑의 감정적 요소(emotional element)는 그것의 존재론적 본성에 따른 귀결이다. 감정적 측면으로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자체(being itself)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자체가 사랑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존재의 실재성(reality)이 삶(life)이기 때문에 이해할만하다. 신적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특성(character)을 가진다. 개별화(Individualization)와 참여(Participation)의 존재론적 모순(polarity)에 따라, 모든 삶의 과정은 분리(seperation)로 향하는 경향과 재연합(reunion)으로 향하는 경향으로 묶여 있다. 깨지지 않는 이 두 경향의 연합은 사랑의 존재론적 본성이다. 재연합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 인간 안에 개별화의 경향이 없다면 사랑은 不在한다. 인간 안에 온전한 개체화가 있는 곳에서만 사랑은 오직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또한 그가 속해 있는 연합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존재론적 본성상 그 연합에 그는 참여한다. 분리와 재연합을 위한 갈망은 피조물의 삶의 본질적인 본성에 속한다. 삼위일체는 분리와 재연합의 전형적인 예이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틸리히는 사랑을 존재론적으로 규정짓는다. 그런데, 이 존재론적 본성인 사랑은 일차적으로 분리(seperation)의 특징이 있고, 다시 재연합(reunion)의 특징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고 했는데, 사랑이 하나님이기에 존재자체가 사랑이고, 따라서 사랑은 분리와 재연합의 특성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은 그 본성상 분리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고 또 재연합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가페적 요소가 되었든, 에로스적 요소가 되었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사랑 자체가 갈망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어거스틴이 꿰뚫어본 통찰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랑은 존재론적 본성인데, 니그렌은 이런 사랑의 본성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사랑의 에로스적 요소를 아가페적 요소로부터 떼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 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 사상인 '삼위일체'의 논리와 동일하다.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서로다른 개체들이지만, 이들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셋은 모두 구별은 된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요소중 에로스적 요소가 있으며, 아가페적 요소가 있으며, 나아가 필리아적 요소가 존재한다. 이런 요소들이 구분은 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주된 특징들이 어느곳, 즉 아가페는 기독교에서, 에로스는 플라톤에게서, 필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셋을 분리한다는 것은 '사랑'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 Daniel Day Williams

Daniel Day Williams는 자신의 책 God's Grace and Man's Hope 에서 니그렌의 사랑 개념을 분석하면서 두가지의 오류를 지적한다. 니그렌의 'The motif'란 종교가 구원의 방법에 관하여 질문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의미하며, 아가페의 motif는 물과 불이 섞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로스 motif와 섞일 수 없다. 그것들의 종합을 시도하려는 것은 오직 아가페의 진리를 완전히 제거 하거나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고 니그렌은 주장했지만, Williams는 니그렌의 이런 주장(doctrine)이 급진적인 율법무용론으로 이끈다고 비판한다. 니그렌은 키에르케고르처럼, 분명히 은총 안에서 성장(growth)을 위한 어떠한 여지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 향하는 기독교인의 어떠한 상승도 없다고 명백히 말한다. Williams가 보기에 니그렌의 근본적인 오류는 두 개의 서로 밀접하게 관계된 가정들(assumption)에 놓여있다고 했다. 하나는 신학적인 방법론(theological method)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구조(the structure of love)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衁. 신학적인 방법론의 문제점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니그렌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니그렌은 어떤 신앙의 근본주제는 다른 신앙의 주제(motif)를 배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한(unique)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것도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기독교의 자의식(self-consciousness)에 관한 이런 논리는 교회가 나찌즘과 같은 악마적 종교에 반대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할 때에는 이해할만하다. 결국 니그렌의 견해는 다분히 상황적이며, 오늘날과 같이 다원주의 시대의 상황속에서는 그 타당성을 잃어버린다.

遁. 사랑구조의 개념의 논리적 모순성

사랑구조의 개념에서도 니그렌은 논리적인 모순을 낳았다. 니그렌은 사랑은 순전히 자기 중심적이거나 완전히 자발적이며 非주제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내가 만일 내 이웃의 Good fortune을 즐긴다면, 나는 정말로 이기적이다. 그의 Good fortune을 즐기는 것은 '나(ego)'이기 때문이다. 그런까닭에, 내가 내 이웃의 善으로부터 만족을 이끌어낸다면, 내 만족의 근원이 전적으로 나의 것인지가 실제적인 문제로 등장한다. 이것은 오직 나와 내 이웃이 완전히(absolutely) 격리된 존재라는 경우에서만 참되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랑은 명백히 가능하다. 니그렌은 인간과 이웃,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 -한 사람의 善은 실제로 他者의 善이 되는 사회적 관계- 라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우리는 善을 위한 인간적인 욕구의 요소를 제외시키는 아가페의 사상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고 Williams는 말한다. 인간의 문제는 아가페가 완전히 인간의 욕망밖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죄인된 인간이 욕구할 때, 그는 사랑의 정신(the spirit of love)을 타락시켰다는 점에 있다.

Ⅴ 결 론

우리는 이상으로 20세기초 스웨덴의 룬트학파의 신학적 방법론과 그들의 신학사상을 정리해 보았다. 바르트와 더불어서 이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20세기에 부활시켰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바르트가 종교개혁의 유산을 20세기에 새롭게 적용했듯이, 이들도 종교개혁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룬트학파는 19세기 계몽주의의 소산인 '역사-비평학'을 수용했으며, 칸트의 종교철학을 받아들였다. 또한「승리자 그리스도」에서 아울렌은 성서에서부터 출발하지 않고, 교부 이레네우스에게서 출발하고 있다. 이 말은 17-18세기 정통주의에서 '오직성서'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룬트학파의 신학사상은 논리구조상 루터가 갖고 있는 약점 곧, '세상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책임의식의 결여'를 답습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은 20세기 후반에는 큰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신학적 방법론에 의해서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생태계의 문제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종교철학의 견지에서 다른 종교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면에서, 종교 상대주의 속에서도 기독교의 독자성과 우위성을 발견하려고 했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가치가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참 고 문 헌

- 룬트학파(니그렌, 아울렌, 빙그렌)의 원저서

1. Anders Nygren, Agape and Ero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2. Gustaf Aulen, The Faith of the Christian Church, 김광석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65.

, Christus Victor,(London, 1945), 전경연옮김「속죄론 연구」대한기독 교서회, 1970.

3. Gustaf Wingren, Theology in conflict, Muhlenberg Press, 1958.

- 룬트학파(니그렌)에 대한 비판 저서

1. John Burnaby, AMOR DEI : A study of the religion of st. Augustine, (Fellow of Trinity college, Cambridge, 1938).

2. Daniel Day Williams, The Spirit and the Forms of Love, (New York : Harper & Row, 1968).

, God's Grace and Man's Hope, (New York : Harper & Brothers, 1949).

- 일반적인 참고서적

1. James C. Livingston, Modern Christian Thought : From the Enlightenment to VaticaⅡ, (Macmillan, 1971).

2. Kenneth Scott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 Ⅱ (Harper&Row, 1975).

3. Dean G. Peerman and Martin E. Marty, A Handbook of Christian Theologians, 신 경수 옮김,「기독교 신학자 핸드북」(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4.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volumeⅠ, (The Univ. of Chicago Press, 1951).

5. Johannes B. Lotz, Drei Stufen der Liebe,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 서울: 서 광사, 1997.

- 참고논문

1. 김영한, "구스타브 빈그렌의 신루터주의 신학", 목회와 신학, 1989.

2. 정하은, "룬트학파의 과학적 신학조류" , 기독교사상, 통권 제93호, 1965.

3. 선한용, "기독교적 아가페(agape)와 플라톤적 에로스(eros)에 대한 새로운 이해 시도", 「신학과 세계」(28집)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