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대적 : 권태
노승수 목사
세상의 모든 종류의 이별에는 항상 권태가 있기 마련입니다. 때론 불가항력적 상황이 사랑하는 사람을 물리적으로 갈라 놓을 수는 있지만 그들이 마음을 함께 하는 것을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별의 원동력은 근본적으로 권태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인물이 한 명 나옵니다. 데마는 처음에 아주 신실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랑받는 의원 누가와 함께 바울의 동역자로 언급됩니다(골 4:14) 그러나 바울의 말년 그가 감옥에 갖혔을 때, 그가 옥중에서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순간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그래서 권태란 항상 인간의 모든 사랑의 마침표입니다. 사랑엔 항상 유효기간이 있는 것이지요. 짧은 유통 기한도 긴나긴 유통 기한도 모두 모두 권태에 의해서 끝을 맺습니다. 권태는 또 다른 것에 대한 흥미와 사랑으로 옮겨갑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서 바울과 그의 복음의 사역을 버리고 떠나갔듯이, 사랑이란 이렇게 늘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하디 흔한 멜로 드라마를 대표할만한 대사 중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가 시사해주듯이 사랑은 변하고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꿉니다. 이런 권태는 영적 여정의 가장 큰 대적입니다. 동시에 그가 그 동안 보여왔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목사님은 청년들의 헌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고 단지 그 대상이 주님이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단언컨대, 그 사랑이 진실하다면 결코 권태라는 영적 대적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습니다. 때론 결혼 관계에도 권태라는 것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우리의 부질 없는 맹세들은 우리 마음의 이 대적들에 의해서 처참히 무너지고 맙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이 변하기 쉬운 사랑을 의지한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권태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해아래 새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창조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눈은 권태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권태는 또한 위기의식의 부재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삶이 안이해진 것이지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은 자신의 영혼이 죽게된 상황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온갖 새로운 것들을 찾아 나섭니다. 이 일에 전문가가 있는데 그것도 성경에 있습니다. 다름 아닌 솔로몬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큰 부와 세상에 안해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년의 그의 우상숭배의 타락은 바로 이 안이함에서 오는 권태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줄다리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권태라는 영적 대적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줍니다. 때론 하나님께서도 신실한 성도들에게 그가 특별한 죄를 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가리우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 영적으로 홀로된 것같은 느낌을 우리의 죄의 결과로만 생각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적 침체 곧 영적 버려둠의 원인이 성령이시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토마스 굿윈은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도 역시 어두움의 상태에 처할수 있으며, 전혀 빛이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수년동안을 그와 같은 상태에서 걷게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권태라는 영적 대적을 막으시고 성도로서 누리게 될 여러가지 은혜들을 개발하십니다.
그러므로 권태는 차라리 "영적 침체"보다 못합니다. 이것은 정말 강력한 영적 대적입니다. 버려진 것 같을 때, 매달리는 마음에는 아직 사랑이란게 남아 있지만 권태로운 마음에는 전혀 사랑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결코 우리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권태는 우리 사랑의 샘의 근원을 메마르게 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동기와 근원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르기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딤후 2:13)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한 관계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안전에는 항상 권태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럼 주님으로부터 오는 안전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안전은 어떻게 다를까요? 주님으로부터 오는 안전은 진실과 현실이라는 기초위에 세워진 안전입니다.
예컨대,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한 것처럼 이 안전은 사망의 골짜기가 없기 때문에 혹은 폭풍우가 없기 때문에 누리는 안전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 안전지대가 되어 주심으로 느끼는 위험천만 속의 안전이랄까요(시 12:5)? 우리가 만들어내는 기만적 안전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이런 영적이며 심리적이며 물리적 위협들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림으로 얻으려는 안전은 위험이 지워짐과 동시에 권태도 함께 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자기 기만과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은 죄책감의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안일하게 만듭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율법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것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우리를 안일에 물들게 하고 그것은 필연 권태를 부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서 의를 얻으려는 열심 또한 동일한 결과를 낳습니다. 율법을 지켜냈다는 자기 만족 혹은 완전주의적 기만은 우리를 안일에 물들게 합니다. 신자가 신앙 생활이 더해질수록 죄책감의 죄의식이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날카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권태라는 영적 대적을 피하고 주님의 은혜에 참으로 침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권태로 몰고 갑니다.
나는 무언가에 권태를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목회, 나의 신앙, 나의 가정, 그것은 내가 영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방치하면 정말 우리 영혼은 데마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참되게 주님이 부르신 자, 곧 그 부르심에 후회하심이 없이 부르신 자가 그리 되는 일이 없지만 그것은 감추어진 뜻입니다. 나는 정말 이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혹시 권태 속에서 너무나도 안일하게 확신이라는 자기 기만의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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