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목회칼럼

오불관언과 연리지

오불관언과 연리지

노승수 목사

오늘 인터넷에 이런 기사가 하나 떴다. 중국에서 일어난 일인데, 6살 아이가 옥상에서 떨어져 피흘리며 신음하고 있음에도 아무도 신고도 안하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아이는 죽고, 중국 전체가 중국의 몰인간성에 충격에 빠졌다고 전한다. 이것은 ‘내집 앞 눈은 쓸어도 남의 집 지붕 위의 서리는 쳐다보지도 않는다’(只顧自掃門前雪, 休管他人瓦上霜)는 중국인의 사고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심지어는 2005년에는 버스차장이 버스 안에서 버스비를 내지 않는 초등학생을 목졸라 죽이는 일이 있었는데 수많은 승객 중에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을 오불관언’(吾不關焉)이라고 한다. 중국사람들이 흔히 하는 관용적 표현중에 "메이 꽌시"(沒關係)라는 게 있다. 직역하면, "아무 관계 없다."인데 "괜찮다"는 뜻이다. 나랑 아무 관계 없으니 괜찮은 것이다. 또 남의 일에 참견을 할라 치면 "샤오 꽌시엔스"(少關閑事)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는데, "괜히 쓸데 없는 일에 관계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인데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표현들은 중국인의 사고 방식을 잘 드러내준다. 이런 중국사람들에게 지난 1997년 한국의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은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었으리라. 

그런데 이와 같은 오불관언은 성경에도 나온다. 그것도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나온다.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것이다.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하는 오불관언의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를 돌보고 부비를 내어주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강도만난 자와 같은 우리에게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되어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에 어쩌면 작은 예수일지도 모르는 이웃들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처럼 잘도 외면하면서 산다.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 이와 같지 않는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건만 '내가 속한 교회'가 괜찮으면 다른 교회는 어떻든 상관이 없는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는 중국식의 사고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물론 한 교회가 모든 힘든 교회를 돌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변에 어렵게 고전하고 있는 교회에 대한 돌봄은 없고, 교회 안에서 성가대나 교회학교 등등의 부서는 재정을 넘치도록 쓰고 있다면, 그리고 여기 저기에서 무엇인가가 낭비되고 있다면, 이걸 주님이 기뻐하시겠는가? 존 플라벨은 "흔히 부족함의 없는 곳에 낭비가 넘치는 법"이라고 했다. 오늘날 큰 교회들은 살림살이들을 보면 부족함이 없고 그것은 역시 낭비가 넘치고 있는 것의 반증인 셈이다. 그런 현실적 안주와 가난하고 힘든 교회들에 대한 외면이 합쳐져서 교회의 '오불관언'을 부른다.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가 있다. 전혀 다른 수종의 어린나무가 가까이 서 자라다가 서로에게 상처가 나거나 해서 서로 다른 나무간에 결이 통하게 되고 하나의 나무로 자라게 되는 현상을 연리지라고 한다. 뿌리가 서로 엉키고 상처는 오히려 서로를 하나의 나무가 되게 한다. 그러나 개별의 가지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다른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사전에 보면,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이라는 일차적 의미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어, 화목한 부부나 남녀 사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서로 다른 그러나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을 연리지나무라고 한다. 마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와 같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같기도 하다. 
상처는 되려 두 나무가 하나가 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서로 엉키면서, 서로 부대끼면서, 그렇게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나가 되어 간다. 연리지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이웃한 나무와 조화를 이루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각기 다른 수종이 자기를 지키려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연리지가 되지 못하는 보통의 나무는 그냥 죽고 만다고 한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너무 많다.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공존이 아닌 공멸로 이어진다. 피할 수 없는 상대라면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상처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부부도 이와 같고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이와 같다. 성경은 이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성도는 환난에서도 즐거워 하는데, 그 까닭은 연단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연단이 우리의 소망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이다. NIV 성경은 이 연단이라는 단어를 캐릭터 곧 사람의 성품으로 번역한다. 성품의 변화를 보면서, 우리가 장차 누리게 될 천국을 소망하여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까닭은 사랑이 성령으로 인해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가까이 함은 우리에게 환난을 유발한다. 그를 가까이 함은 우리의 죄를 각성케 하고 그것은 우리 심령에 애통함을 가져다 준다. 성도간의 관계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부부가 되는 관계도 상처와 아픔을 일깨운다. 아파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배운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성도의 교통이 일어난다. 그제야 비로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간다.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갖는 것도 이와 같은 영적 원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와 성도는 다른 지체과 교회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아픔을 주시는 주님 앞에 겸비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온전히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 고린도 교회가 그 수많은 아픔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성도라 불리운 것처럼 이런 아픔은 우리로 거룩에로의 부르심의 결과이다. 상처가 왔는가?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할 때이며, 평안한가!! 혼자 그 평안을 누려야 할 때가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제사 비로서 우리는 더욱 주님을 닮아간다. 그리고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연리지목이 하나의 나무가 되어가는 것처럼 교회의 아픔도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이 나타나길 소망한다. 내가 선택할 태도는 무엇인가? 오불관언인가? 아니면 연리지인가? 상처와 아픔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식어지게 하고 우리의 태도를 오불관언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연적 인간은 어쩌면 오불관언이 자연스런 삶인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으시면 우리의 태도는 상처에도 불구하고 연리지가 되어야 한다.


'블로그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대적 : 권태  (0) 2018.04.28
기질과 핵심감정(1)  (0) 2018.04.28
거짓되고 음란한 세대  (0) 2018.04.28
현재를 사는 인생  (0) 2018.04.28
내버려 두어라  (0) 2018.04.28